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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20화 (209/210)

120화. 설산의 천궁 (4)

* * *

그로부터 며칠은 조용히 지나갔다.

하후철이 갑자기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단유가 놀렸지만,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감히 신주의협 앞에서 인상을 쓸 수 있겠나?

특별한 것이 있다면 시험 날짜가 정해진 것 정도.

앞으로 한 달 후에 정식 입궁을 위한 시험이 열린다는 소식이 왔다.

오늘 밤은 한번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리고 태양궁의 대제자를 찾아보기 위해.

마침 달이 뜨지 않는 그믐이라 야행에 적당했다.

하후철처럼 무작정 이곳저곳을 뒤질 생각은 없었다.

실은 지난 며칠 동안 기감을 퍼트려 천궁 곳곳을 파악했고, 그 결과 미심쩍은 곳 몇 곳을 찾았다.

하후철이 사고를 쳤던 내전의 지하.

천궁 후문과 연결된 계곡의 깊숙한 곳.

그리고 내전 뒤편의 천사장의 침소였다.

심지어 천사장의 침소는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억지로 기감을 펼쳐 접근할 경우 역으로 들킬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천하의 신주의협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지난 수십 년간 아예 그런 적이 없었다.

천사장이 그 정도로 고수라는 말인가?

막연한 불안감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니 천사장의 숙소를 조사하는 것은 마지막 순서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계곡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신주의협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후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바닥엔 눈이 쌓여 있었지만 당연히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후문 성벽 위엔 많은 무사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 그 일 이후로 경비가 강화된 것이다.

신주의협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래도 성벽 위로 도약했다.

누구도, 아무 낌새도 채지 못했다.

혹시 누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더라도, 까마득한 높이에 떠 있는 점 하나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궁을 벗어난 신주의협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나는 새보다 더 빠른 속도.

계곡 깊숙한 곳에 도착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곳임은 확실하군.’

계곡의 경비 태세는 천궁 내부보다 더 철저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진법과 각종 기관들이었다.

겹겹이 설치된 진법은 고대의 절진을 응용하여 지형에 맞게 설치한 것인데, 빛을 반사하는 얼음벽은 물론 곳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눈보라와 융화되어 강력한 환각을 일으켰다.

다행인 것은 높은 무공에 가려져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 신주의협이 진법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

잠시 방위를 계산하고 방향을 정한 후 거침없이 전진했다.

곳곳에 숨어있는 기관 장치들은 애당초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 나간 기술자가 아닌 이상 신주의협의 수준에 맞춘 기관을 설계할 리가 없었으니까.

천궁은 진법과 기관을 상당히 믿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순찰을 도는 경비 무사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더 깊이 접근할 수 있었다.

진짜는 여기부터인가 보군.

신주의협이 걸음을 멈췄다.

계곡 모퉁이 뒤편에서 강렬한 기파들이 느껴진 것이다.

스르륵.

최근 재미를 들인 은신술을 발휘한 신주의협이 흩날리는 눈가루에 섞여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결국 천궁의 숨겨진 모습을 만났다.

“아직도 삼 단계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붉은 바람막이를 뒤집어쓴 술사가 누군가를 질책하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삼 단계 심법의 난이도가 너무 높습니다. 천장(天將)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듣기 싫다! 최고의 인재들을 구해주고 영약도 원하는 대로 공급해줬지 않느냐?”

“송구합니다. 하지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할 천장 일 호와 이 호가 심법을 구현하지 못하는 걸 어떡합니까? 파동심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천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흠… 이번에 특급 대기소에 들어온 자 중 그런 인재가 있다고 들었다. 파동심법 입문편을 눈 깜짝할 사이에 구현했다더군.”

“정말입니까? 그럼 빨리 좀 보내주십시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직은 약속할 수 없어. 천장으로 만들지 아니면 호법들의 수하로 쓸지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답답하네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인재 하나 마음대로 못 쓰다니.”

“어쩔 수 없지. 천사장님의 결정이 그러하니. 내 최선을 다해볼 테니 자네도 인재 핑계 대지 말고 성과를 만들게.”

가만히 들어보니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거 자칫하면 여기로 끌려와 천장인가 뭔가 하는 것이 되겠군.

쓴웃음을 지은 신주의협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저 멀리 보이는 음침한 건물.

불길한 기운, 뭔가 위험한 술법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지붕의 틈, 대들보, 기둥으로 옮겨가며 내부로 들어갔다.

이곳에도 온갖 기관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역시나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횃불을 들고 가끔 나타나는 순찰 무인들.

뭐지?

대단한 고수의 기세를 보이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세상의 상리를 벗어난 듯한 기운, 뒤틀려진 생명력.

틀림없었다.

이런 느낌은 금지된 비술로 만들어진 무언가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었다.

이곳은 비술로 괴인을 제조하는 곳이구나!

술사들이 이야기한 천장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생각은 자연스레 태양궁 대제자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괴인을 제조할 인재를 뽑는다면… 하후철의 사형도 분명 적합한 재료였을 테니까.

제발 아니기를 기원하며 넓게 기파를 펼쳤다.

여기는 곳곳이 얼음이고 음기가 출렁대는 곳. 태양궁의 내공을 익힌 자가 있다면 분명 티가 날 것이다.

잠시 후, 신주의협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기원과는 다르게 극양의 공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벌써 괴물이 되었을까?

태양궁의 내공이 느껴진 곳은 지하 이 층.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가 넷이나 있었지만 단숨에 잠재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감옥 같은 구조의 공간이 십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한 곳.

하후철과 같은 기운이 뿜어지고 있는 방의 자물쇠를 뜯었다.

“내 말이 들리나?”

어두운 공간에 웅크리고 앉은 사내는 야수 같은 눈빛을 뿌릴 뿐 말이 없었다.

“실례 좀 하겠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맥문을 짚으려 하자 사내는 번개같이 몸을 피하며 주먹을 날렸다.

사방을 불태울 것 같은 열기.

태양궁의 자랑인 폭풍열권이었다.

급작스러운 공격인 데다 공력도 거의 절대급.

강호에 이런 공격을 받고 무사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지만 신주의협은 예외였다.

살짝 손을 흔들어 몰려드는 열기를 털어버린 후, 그대로 날아오는 주먹을 잡았다.

“크아악!”

사내는 야수 같은 괴성을 지르며 주먹에 공력을 집중했다.

순간 사방으로 뿌려지는 파동.

이크! 이게 그 파동심법인가 보구나!

뼈와 살, 세포까지 걸리는 것은 뭐든 분해하겠다는 듯 퍼져오는 파동.

신주의협은 급히 손을 놓으며 호신강기를 펼쳤다.

물론 신주의협의 호신강기는 뚫지 못했지만 천하제일인이 긴장할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술법사의 말처럼 파동심법 삼 단계는 완성되지 못한 듯했다.

사내의 파동은 얼마 못 버티고 스스로 사그라들었다.

신주의협은 재빨리 손가락을 튕겨 사내의 혈도를 짚었다.

사내를 둘러업은 신주의협은 잠시 갈등했다.

다른 방에도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는데 모른 척하자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

하후철과의 약속이 우선이었다.

* * *

계곡을 벗어나 인적 없는 숲속에 도착한 신주의협은 업고 있던 사내를 내려놨다.

일단 데리고 나왔지만 회복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사내의 명문혈에 손을 얹고 진기를 주입시켰다.

진기가 뻗어 감에 따라 사내의 상태가 속속 머릿속에 들어왔다.

근골과 피륙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장기, 혈맥, 그리고 기맥까지 정상이라 부르는 것으로 모자랄 정도로 강건했다.

단전은 어떨까?

예상했던 대로였다.

넓고 깊은 단전에는 강렬한 양기가 가득 담겨있었고, 오염되지 않은 태양궁의 순수한 내공임이 분명했다.

모든 상태가 다 좋았지만 신주의협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살펴본 곳이 모두 정상이라는 것은, 문제가 다른 곳에 있다는 뜻.

아직 살펴보지 않은 곳은 정말 위험한 곳인데….

조심스럽게 진기를 위쪽으로 보냈다.

경추를 타고 오르는 진기가 향한 곳은 상단전이었다.

파르르르.

진기가 진입하는 걸 거부하는 것처럼 파괴적인 파동이 흘러나왔다.

기운을 끌어올려 파동을 제압할까 고민하다가 그대로 손을 뗐다.

이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 *

【 하후철 】

선잠이 들어있던 하후철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 조용히 대기소를 나와 내가 안내하는 곳으로 오게 】

무슨 일일까?

다시는 야행을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셨었는데…?

최대한의 은신술을 펼치며 달려갔다.

경비가 강화되었지만, 신주의협이 일러주는 길로 달리니 경비 무사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후문 근처의 외진 공터.

어렴풋이 신주의협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쓰러져 있는 누군가의 형체.

하후철의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대협. 호, 혹시…?”

“자네가 직접 확인하게. 태양궁의 대제자가 맞는지.”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끌며 천천히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무릎을 굽혀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제 사형이 맞습니다. 사형은… 어떤 상태인 겁니까?”

“글쎄. 육체만 놓고 보자면 아주 건강한 상태야. 아마도 태양궁을 떠날 당시보다 더 강해졌을 거야.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매우 위험한 상태이지.”

하후철은 어디가 안 좋은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신주의협의 입에서 회복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 된 까닭이다.

“억지로 어떤 비술을 익히게 한 모양인데, 그게 상단전에 폭탄처럼 자리 잡았어. 상단전에 무리가 가서 뇌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네. 몹시 불안정하고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상태야.”

“치료가 어려운 겁니까? 상단전의 그 비술을 제거할 방법은 없는지요?”

“실은 그 이야기를 하자고 자네를 부른 거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잠시 뜸을 들인 신주의협이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사내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상단전에 심어진 비술이 파동을 발생시키지 못하도록 잠재우는 것.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신주의협은 해낼 자신이 있었다.

파동만 없다면 추가적인 뇌 손상은 없을 것이고, 그러면 생명은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비술이 제거된 것은 아니니 사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두 번째 방법은 무리를 해서 비술을 완전히 제거하는 거였다.

이것은 첫 번째 방법보다 더 어려운 것이고, 신주의협도 성공을 자신하지 못했다.

아니, 실은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완전히 안착한 비술을 떼어내려면 아마도 뇌 기능 일부도 죽게 될 공산이 컸다.

반신불수, 벙어리… 혹은 장님이 될지도 몰랐다.

“물론 내 진단이 맞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일세. 고명한 명의를 만나면 더 좋은 치료법을 알려줄지도….”

하후철은 고개를 저었다.

옥룡설산의 꼭대기에서 명의를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상단전과 비술에 관한 것이라면 신주의협보다 더 뛰어난 명의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당장 결정해야 하는 겁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조금 전 구출하는 과정에서 자네 사형은 무리해서 파동을 일으켰네. 지금은 임시로 잠재웠지만 언제 파동이 폭발할지 모르네. 게다가 아침이 되면 천궁에서도 이 일을 알게 될 거야. 대단위의 수색과 추적이 있겠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머뭇거리던 하후철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천궁은… 어째서 저희 사부님을 죽이고 사형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휴우. 나도 그게 궁금하다네. 그걸 밝혀내려 이곳에 온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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