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설산의 천궁 (5)
* * *
“육체보단 정신이 중요한 것이겠죠?”
하후철은 긴 고민을 끝낸 것 같았다.
“대협. 사형 머릿속의 비술을 완전히 제거해주십시오. 설사 온몸을 못 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사형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가길 바랄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아. 매우 위험할 수 있는데… 괜찮겠나?”
“사형이 깨어나지 못하고 죽더라도 대협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죽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후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말이었지만, 그것이 신주의협의 부담감을 줄여주진 못했다.
부담을 털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치료를 성공하는 것뿐.
신주의협은 마음을 가다듬고 사내의 백회혈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드득 이를 갈고 몸을 뒤트는 것이 강하게 치료를 거부하는 모양새였다.
하후철은 애가 탔지만 숨소리조차 참아가며 묵묵히 지켜봤다.
일 다경쯤 지났을까?
사내의 눈과 코에서 핏물이 흘렀다.
하지만 신주의협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백회혈로 회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진기를 일으켜 공중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치료는 끝이 났다.
“대협. 치료는… 잘된 겁니까?”
“최선을 다했네. 결과는 하루 이틀 지나야 알 수 있을 걸세.”
“대협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사형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후철은 털썩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치료 결과에 상관없이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
어쩌면 결과가 나오진 않은 지금이 감사를 표할 가장 적절한 때였다.
“인사는 잘 받겠네. 하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자네 사형을 위해서라도 빨리 피해야 하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내를 등에 업고, 한 손으로는 하후철의 옷깃을 잡은 채로 신주의협은 바람처럼 달렸다.
초절정의 고수인 하후철이 소름이 돋을 만큼 가공할 속도였다.
나무 위를 날아 넘고 계곡을 건너뛰면서 옥룡설산 아래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달렸을 때 오 일이 걸렸던 거리를 단 두 시진만에 주파하여 꽤 규모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신주의협은 쉬지 않았다.
튼튼한 마차를 구하고 이불과 먹거리를 사서 마차 안에 넣었다.
“자네 사형의 회복을 지켜보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군. 자네는 사형을 데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게.”
“저희만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대협께서는…?”
“난 천궁으로 돌아가겠네. 아까 자네가 했던 질문…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밝혀야 하니까.”
“대협을 모시고 함께 싸우고 싶지만 제 실력으로는 방해만 되겠지요? 알겠습니다. 저는 사형과 함께 태양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차에 오르기 전 하후철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렸다.
조심하시라는 말, 무사하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신주의협이니까.
* * *
신주의협은 한 마리 독수리처럼 설산을 올랐다.
중간쯤 왔을 때 태양이 떠올랐다.
간밤에 몰래 나온 것은 들통날 수밖에 없었고, 계곡에서의 사건과 연계되어 의심받을 공산이 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의심하지 않더라도 신주의협 스스로가 먼저 나설 생각이었다.
천궁에 도착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경비 무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보니 계곡에서 생긴 일 때문에 비상이 걸린 것이 분명했다.
뭐, 상관없겠지.
신주의협은 개의치 않고 곧바로 대기소로 향했다.
“신월 형!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지금 난리가 났다고요. 형하고 하후 형이 없어졌다고 판별관님이 아침부터….”
“단유.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내 말 잘 들어라.”
“네?”
“넌 본성이 나쁘진 않은 것 같고 아직 천궁의 일에 관여되지도 않았으니 충고를 해주는 거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라. 단 왕부로 돌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혹시 다른 갈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라.”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신주의협은 단호히 고개를 돌리고 대기소를 나왔다.
잠시 동안 함께 생활했던 인연을 생각해 기회를 줬다.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단유의 판단.
아마도 자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겠지만… 이 이상 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궁에서의 작은 인연을 정리한 신주의협은 곧바로 내전으로 향했다.
모든 의문을 풀어줄 자가 그곳에 있으니까.
막 내전의 입구에 들어서는데 저 앞에 조탁 노인이 보였다.
—신월!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어서 도망가서 숨지 못할까?
조탁 노인은 안절부절못했고, 전음을 보내는 목소리는 몹시 다급했다.
—자네는 지금 큰 의심을 받고 있다는 말일세! 우선은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야.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볼 테니 자네는 우선 숨어있다가 나중에….
그래, 저 노인도 있었지.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조탁은 천궁에 너무 깊게 개입되어 있다.
슈욱.
한줄기 경력이 날아가 조탁 노인의 수혈을 짚었다.
노인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
하루 정도 잠들었다 깨어나면… 그때는 노인의 잘잘못을 따져볼 여유가 있겠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왼쪽으로 가면 좌호법, 오른쪽으로 가면 우호법의 거처였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방향을 틀지 않았다.
그대로 직진하여 내전의 후원을 가로질렀다.
“멈춰라!”
후원에서 연결되는 삼 층 전각의 앞을 경비대가 가로막았다.
모두 삼십여 명에 꽤 강한 고수인 경비대장까지 있었다.
“너는 지난밤 사라졌던 신월이군. 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곳이 감히 어디라고.”
“이 전각의 주인에게 물어볼 것이 많소. 길을 비켜주시오.”
“닥쳐라! 취조를 당해야 할 놈이 적반하장 질문을 하겠다고? 너희는 무엇 하는 것이냐? 어서 저놈을 체포하지 않고!”
경비 무사들이 다가왔다.
일반 무사들과 싸우고 싶진 않았지만, 뭐 상대가 정 원한다면….
하지만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각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덕분이었다.
“경비대장. 그를 들여보내세요.”
“네? 하지만 천사장님… 이자는 지난밤 양성소에 침투했던 범인일지도 모릅니다. 당장 체포해야….”
“예를 갖추세요. 그는… 궁주님의 벗입니다.”
경비대장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불신의 표정이었고 충격이 큰 것 같았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신주의협 본인이었다.
얼어붙은 경비대 사이를 걸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삼 층이었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을 때마다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될까?
오래전 초월경에 이르러 세상을 넓게 보는 신주의협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흔 살쯤 되었을까?
조금은 유약해 보이는 학자풍의 사내가 신주의협을 맞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말이오?”
“글쎄요? 한 달쯤 된 것 같기도 하고… 삼사 년 된 것 같기도 하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좋아하시는 차를 다리고 있습니다.”
천사장이 손수 차를 내왔다.
동정벽라춘. 확실히 신주의협이 가장 좋아하는 차가 맞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겁니까?”
“하하하. 당신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래요, 저보다 더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천사장의 답변은 모호했다.
내가 신주의협인 것을 아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돌아온 답은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 것 같았다.
이런 것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명쾌해지기를 바랐던 것인데… 오히려 더 짙은 안개가 끼고 있었다.
“저에게 물어볼 것이 많다고 하셨죠? 말씀하시죠. 성심껏 답변드리겠습니다.”
“좋소. 첫 번째 질문은… 천궁은 어떤 조직이냐는 거요. 이런 조직을 만든 목적이 뭡니까? 천궁을 만든 궁주는 도대체 누구요?”
“천궁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조만간 닥칠 재앙에 맞설 힘을 키우고 있지요.”
“세상을 구한다고? 그런 바른 뜻을 가진 조직이 금지된 비술을 써서 사람을 괴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이오?”
“닥쳐올 재앙은 끔찍한 것입니다. 적들은 온갖 괴인과 괴물로 무장하고 있지요. 그에 맞서기 위해선 내키지 않더라도 이런 준비가 필요합니다. 천궁의 의도가 올바른 것은 사실입니다. 의와 협을 추구하는 천룡사와 만검산장이 천궁을 따르는 것이 그 증거이지요.”
마음에 와닿지 않는 답변이었다.
혹세무민하는 사교에서 흔히 써먹는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교주가 누구냐는 질문은 슬쩍 피해 가고 있었는데, 그 점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성심껏 답변하겠다던 귀하의 말은 빈말이었던 것 같군. 뭐 좋소. 그렇다면 더 구체적인 것을 묻도록 하겠소. 천산 백응신장 노선배에게서 보물을 강탈한 것이 당신들 맞겠지요?”
“강탈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만… 백응신장의 물건을 저희가 보관 중인 건 맞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나를 사칭했소. 정확히 내 이름을 판 건 아니지만 백응신장이 나를 의심하도록 만들었지.”
“글쎄요… 천궁에는 당신을 사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태양궁의 건도 그렇소. 사막 한가운데서 은둔 생활을 하던 태양궁주가 돌을 들고 스스로 달려오게 만든 것. 그건 내 이름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오? 태양궁주에게 평생 친구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태양궁의 제자들을 도우신 것도 그런 인연 때문에….”
“말 돌리지 마시오, 천사장.”
신주의협의 기도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고 있다는 뜻.
분노한 신주의협과 맞서고 싶은 자는 강호에 없었고, 그건 천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게 좋겠군요.”
“무엇을 말이오?”
“함께 가시지요.”
천사장이 앞장섰다.
전각 밖에는 경비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심지어 좌우 호법까지 와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썰물처럼 물러서는 경비 무사들 사이를 걸으며 천사장과 신주의협은 내전으로 향했다.
“여기는 한번 와 보셨지요?”
내전 지하로 내려가며 천사장이 한마디 던졌다.
처음부터 내 행동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태양궁의 대제자를 구하는 걸 그냥 방치했고?
좌우 호법은 분명 모르고 있었는데, 그럼 천사장과 좌우 호법 사이에도 비밀이 있다는 뜻?
갈수록 의문투성이였다.
과연 이 지하실에 모든 궁금증을 풀 열쇠가 있을까?
“이곳입니다. 들어오시죠.”
수많은 기관장치와 시건장치를 해제한 천사장이 문을 열었다.
그곳은 넓은 석실이었다.
횃불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에 열두 개의 탁자가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여덟 개의 탁자 위에는 돌이 올려져 있었는데, 마치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스산한 붉은 빛이 깜박였다.
“이것이… 시간의 돌?”
“맞습니다. 원래 열두 개가 있어야 하는데 죄송하게도 아직 여덟 개밖에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걸 왜 나에게 보여주는 거요?”
“자세히 보십시오. 각각의 돌 밑에 기록을 남겨 놨습니다. 어디서 누가 확보한 것인지.”
천사장의 말대로였다.
옥룡 대뢰음사. 옥진 남해 천무도 등 이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옥룡과 옥진은 돌을 찾아오는 임무를 맡은 천궁의 인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름은 없고 장소만 적혀 있는 것들도 있었는데….
“태양궁, 천산 백응곡, 제갈세가, 그리고 포달랍궁. 이 네 곳은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천사장. 나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할 생각은….”
“아니오.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당신도 이제 알 텐데요? 왜 굳이 이름을 적지 않았는지.”
“내가 알기는 무얼 안다는 말이오?”
천사장은 신주의협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는데, 잠시 후 실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아시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 없네요. 궁금하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이 이름을 적지 않은 이유는, 그 돌들은 당신이 직접 구해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