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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22화 (99/210)

122화. 각성 (1)

* * *

내가… 천궁의 궁주라고?

기가 막혀서 화를 내야 했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천사장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을 무의식중에 예상했을 수도 있었다.

백응신장 노선배의 말이, 태양궁주의 행동이 이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모두 속은 것이다.

“천사장. 나는 내 이름의 명예나 평판 같은 것에 목매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가 내 이름을 사칭하는 것을 방관할 생각은 없소.”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당연히 나 자신이오! 난 천궁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어. 천사장 당신을 만난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저는 당신과 아주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입니다.”

“거짓말!”

신주의협은 분노했다.

인내의 끈이 뚝 끊어지면서 거친 기세가 사방으로 뻗어갔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파가 공간을 가득 채웠지만 천사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거짓이라고요? 그럼 이 무공을 가르친 건 누구라는 말입니까?”

천사장의 등 뒤로 예리한 기세가 떠올랐다.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 거대한 검.

분명 신주의협의 성명절기, 금검기(金劍氣)였다.

“이, 이건….”

“말씀해 보시지요, 이 무공도 거짓이라고! 아니면 직접 겪어봐야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천사장이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뽑는 순간 이미 금빛 기세가 신주의협의 허리를 가르고 있었다.

콰아앙!

신주의협이 손목을 흔들어 천사장의 검을 튕겨냈다.

가볍게 막아냈지만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신주의협.

직접 부딪혀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명 자신의 무공임을.

“이제 인정하시는 겁니까? 아직 부족하다고요? 그럼 이 무공도 받아보십시오!”

천사장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충격 요법을 반복할 생각이었다.

궁주를 공격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이것이 잃어버린 기억을 깨우는 방법이라 믿었다.

콰아앙! 콰앙! 쿠르르!

무시무시한 공격이 연거푸 뿜어졌다.

신주의협에겐 내키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니 소극적인 모습으로 방어만 할 뿐이었는데….

“그렇게 대충해서 저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신이 직접 가르친 제가 약해 보이냐는 말입니다!”

천사장의 기세가 폭발했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무게가 두 배씩 늘어나는 것 같았다.

이 또한 자신의 절기 중 하나인 중첩검.

콰아아앙!

진기가 맞부딪히는 충격에 지하실의 벽이 들썩거렸다.

천사장은 굳건히 버티고 섰지만 신주의협은 뒤로 서너 발이나 밀렸다.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천사장은 절대경을 훌쩍 뛰어넘는 초고수.

십 년 전 상대했던 성숙해의 환요철마 이후 이런 고수는 처음이었다.

“하하하, 당신 제자의 강한 모습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내 제자는 한 명뿐이다.”

“강한월 그 아이요? 이거… 몹시 서운한데요. 그럼 강한월도 이런 걸 할 수 있습니까?”

천사장의 검이 돌변했다.

무지막지하게 뿜어대던 기세는 사라지고 물결이 잔잔하게 출렁대는 것 같았다.

파동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타앙~

마찬가지 파동을 일으켜 검을 튕겨낸 신주의협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란스럽다는 건 인정하지. 나와 연결된 고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게 무엇이든 차차 밝혀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너희 천궁의 죗값을 먼저 물을 것이다!”

대결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신주의협이 먼저 움직였다.

날카롭고 빠른 검.

천사장처럼 기세를 드러내지도 기술을 자랑하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레 엄청난 압박감이 일어났다.

천사장도 이를 악물고 대항했다.

더 이상 입을 놀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화는 오로지 검으로만 가능했다.

채앵~ 콰앙.

검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경력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석실의 벽에 쩍쩍 금이 가고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경력의 파장과 먼지와 폭음이 난무하는 곳에서 두 명의 초고수가 격렬하게 맞붙었다.

그리고 결과는 곧 드러났다.

천사장이 놀랄 만한 신위를 선보였지만, 그래도 신주의협의 상대는 아니었다.

터엉~

검면으로 어깨를 얻어맞은 천사장이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검면이 아닌 검날이었다면 단숨에 몸이 두 조각 났을 상황.

“크으윽… 역시 대단하십니다. 검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겠네요.”

“검으로는? 검이 아니면 나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후후. 당신이 가르친 것이 검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천사장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일어났다.

석실 안을 온통 붉게 채울 만큼 농밀한 기운이었다.

순간 피 냄새가 나는 듯하여 신주의협이 미간을 찌푸렸다.

“드디어 가면을 벗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게 제 본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당신에게서 온 것이니 결국 마찬가지이지요.”

핏빛 폭풍이 휘몰아쳤다.

기괴한 초식이었고 파괴적인 내공이었다.

게다가 한 초식 두 초식 상대하다 보니 피가 제멋대로 들끓으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처음 접해보는 무공에 신주의협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회귀한 혈승이로구나!”

제자 강한월이 대신 짊어진 짐.

천궁에 오는 순간부터 염두에 둔 것이었고 이제는 확신했다.

“잘되었군. 이 천궁이 회귀자의 소굴이라면 나도 망설일 필요가 없으니.”

신주의협의 눈동자에 금빛 광채가 번득였다.

천사장을 향해 벼락같이 쇄도했고, 검이, 주먹과 손이, 지풍과 퇴법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천사장은 핏빛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맞섰지만 숨 몇 번 쉴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십여 개의 상처를 입었다.

최선을 다하는 신주의협은 과연 격이 달랐다.

하지만 천사장이 밀리는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조금은 더 잘 방어할 수 있음에도 힘의 일부를 다른 것에 쓰고 있는 것이다.

신주의협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혈령의 가루를 공기 중에 퍼트리는 것에.

“커억.”

복부를 강타당한 천사장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물론 이 순간에도 혈령의 가루가 뿌려졌다.

샤아악.

공중을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검이 어깨를 베며 지나갔을 때도, 혈령이 비산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사장이 무릎을 꿇는 순간… 드디어 목표로 했던 만큼의 혈령이 신주의협의 몸 주변을 감쌌다.

“천사장.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자백한다면….”

“시간의 돌에는 여러 가지 효능이 있지요.”

“뭐라고?”

최후의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말이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천사장은 바닥을 기듯이 움직여 붉은 돌 하나를 손에 쥐었다.

“회귀처럼 대단한 공능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혈령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어떤 곳에선 혈장석이라 불렸죠.”

“무얼 하려는 것인가?”

신주의협은 검을 뻗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사술에 능한 혈승이니 요상한 공격을 해오지 않을까 주의하면서.

“당신에게 해 되는 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천사장이 입에 머금고 있던 피를 손에 쥔 돌을 향해 뿜었다.

화르륵.

돌에서 붉은빛이 확 뻗었고, 나머지 일곱 개 돌들도 호응하듯 빛을 뿌렸다.

이걸로 무얼 하겠다는 거지?

신주의협이 의아해하는 사이 주위에 안개처럼 퍼져 있던 혈령 가루들이 밝은 빛을 뿌리며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딜!”

자연스레 금빛 호신강기가 일어나 붉은 가루를 막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기 공격도 튕겨낼 수 있는 호신강기가 혈령 가루는 막지 못했다.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에게 해로울 게 없는, 아니 오히려 득이 되는 혈령을 호신강기가 거부할 리 없지요.”

“그게 무슨….”

이상한 불안감을 느낀 신주의협은 우선 천사장을 처리하려고 했다.

검에 공력을 불어넣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붉어졌다.

* * *

여긴 어디지?

신주의협은 어떤 공간 속에 서 있었다.

주변은 온통 핏빛이었다.

천사장의 사술에 빠진 건가?

놀랐지만 당황은 길지 않았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금검공을 일으켰다.

자신의 금빛 검기는 모든 사이한 것을 베는 힘을 가졌으니, 사술로 만들어진 이런 공간쯤은 단숨에 벨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검기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네. 이 공간에서 검기가 생성될 리가 없으니.”

핏빛 공간 한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목소리 때문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의 것과 똑같은 목소리.

“당신은 누구요?”

“내가 누구냐고? 이미 알면서 질문하는 건가?”

“천사장과 비슷한 말을 하는군. 내가 알긴 뭘 안다는 거요?”

“자네는 이미 알고 있어. 나도 알고 자네도 아는 것 아닌가. 우리가 아는 것은 실은 같으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알았다.

그는 신주의협 본인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또 다른 자아.

그리고 이 공간은 아마도 자신의 정신세계일 것이다.

“어째서 또 다른 내가 있는 거지? 너와 나는 다른 건가?”

“우린 같지만 다르다. 어쩌면 남보다 더 많이 다를 거야. 굳이 말하자면 넌 신주의협이고 난 천궁의 궁주이지.”

천궁의 궁주.

그렇다면 천사장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인가?

“설명을… 해줄 수 있겠나?”

“자네는 항상 이미 아는 것을 묻는군. 자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다만 기억하지 않았을 뿐.”

내가 원래 알고 있었다고?

그래, 그랬구나.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그때였다. 이 모든 불편한 진실이 시작된 것은.

천하제일의 협객으로 추앙받으며 한창 활동하던 시절, 회귀자의 영혼이 몸속에 들어왔다.

우연은 아니었다.

회귀자는 정확히 신주의협의 몸을 겨냥하여 날아든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현시대의 가장 강한 무인.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협객.

얼마 후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 거대한 세력을 이끌 지도자였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아무런 대비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몸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신주의협과 회귀자의 영혼은 몸의 지배권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혹시 누가 봤다면 그저 잠을 자는 모습이었겠지만, 영혼이 깃든 공간 속에서 경천동지할 대결이 펼쳐졌다.

삼 일 밤낮을 계속된 싸움.

수없이 서로의 몸을 베고 찔렀지만 육체가 아닌 영혼을 죽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신주의협이 먼저 지쳐갔다.

미래에서 왔기 때문인가, 회귀자는 신주의협의 모든 무공과 수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처럼 농락당하던 신주의협의 영혼은 결국 완전히 힘이 빠져 쓰러졌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그저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

이후의 일은 신주의협의 기억은 아니었다.

회귀자와 기억이 공유되기 때문에 당연히 알게 된 것일 뿐.

몸을 차지한 회귀자는 자연스레 신주의협의 삶을 살았다.

처음 몇 년간은 이상한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강호를 누비며 협을 행하고 악을 멸했다.

그리고 강한월을 제자로 맞았다.

제자의 병을 치료하려는 노력은 꽤나 눈물겨운 것이었다.

혈액의 문제를 알고 느꼈던 괴로움, 절망감, 반드시 낫게 하겠다는 의지.

지금도 생생한 그 감정들. 과연 그것들은 사실이었을까?

기억에 의하면 그때부터였다.

강한월을 구할 방법을 찾는다는 핑계로 먼 곳을 여행하며 비밀스런 활동을 한 것은.

천사장을 만나 무공을 가르치고 천궁을 만들었다.

신주의협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나는 천룡사와 만검산장을 설득해 천궁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임무를 내렸다.

시간의 돌을 찾아오라는.

강한월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고, 모든 이의 축복을 받으며 무림맹주에 취임했다.

천궁은 비밀리에 힘을 키워갔고, 시간의 돌도 무려 여덟 개를 확보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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