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23화 (100/210)

123화. 각성 (2)

* * *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고,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계획에도 한가지 흠이 있었다.

미래에 남겨두고 온 시간의 돌을 누군가 재활용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신주의협은 오랜만에 금검문 본가를 찾았다.

강한월의 무공을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병이 치료된 강한월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가르치는 재미가 남달랐다.

제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신주의협은 여느 때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명상과 운기행공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그 일이 터졌다.

누군가 억지로 힘을 쓰는 것처럼 상단전이 열렸다.

놀라고 당황했다.

얼른 상단전의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에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았다.

백회혈이 뜨거워지더니 그자의 영혼이 들이닥쳤다.

미래의 척혈단 단주.

장무영. 그 지긋지긋한 자였다.

제대로 붙었다면 어렵지 않게 승리했을 것이다.

장무영이 아무리 천고의 기재이고 혈교의 골칫거리였다 한들 신주의협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시간의 돌이 일으킨 역천의 술법 때문인데, 회귀자의 영혼이 들어오는 순간 대상이 된 영혼은 잠시 동안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장무영은 단단히 각오하고 온 듯했다.

신주의협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혈승의 영혼을 없애겠다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고 신주의협이 점점 밀렸다.

안타까웠다.

조금만 시간을 끌 수 있다면 회귀 술법의 효과가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장무영쯤은 쉽게 소멸시킬 수 있는데.

장무영은 마불진경의 무공을 뿜어내며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 순간 하늘은 장무영의 편이 아닌 것 같았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른 신주의협이 잠들어 있는 원래 영혼을 불러냈다.

혈승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원 영혼을 보고 장무영은 크게 당황했다.

지금 혈승을 죽인다면 원 영혼도 함께 소멸할 것이 뻔했다.

회귀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왔는데, 원래 영혼을 죽인다면 자신도 혈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망설임.

주저함이 그리 긴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시간의 돌이 만들어낸 술법의 효과가 사라졌다.

점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신주의협은 싸늘하게 웃었다.

세상 참 재미있었다. 거리낌 없이 역천을 행한 자신에게 천운이 따라줄 줄이야.

장무영 저 눈엣가시 같은 놈을 죽이는 일만 남았고,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주의협은 공격을 퍼부었고, 장무영은 정신없이 밀렸다.

이제 마지막 한 수.

머리를 베어줄까, 아니면 심장을 가루로 만들까 고민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공간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걱정 가득한 강한월이 부르는 소리였다.

영혼의 공간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자 신주의협의 육체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간간이 신음을 흘리며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고, 강한월의 눈에는 사부가 주화입마에 빠진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사부님. 힘내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안 돼!

신주의협이 외쳤지만 강한월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강한월은 사부의 백회혈에 장심을 대고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사부와 제자의 육체가 연결됐다.

이건 장무영에겐 둘도 없는 기회였다.

지금이라면 강한월의 육체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마찬가지.

강한월의 영혼은 자신 때문에 죽게 될 것이고, 장무영은 무고한 영혼을 살해하고 육체를 차지한 역천의 회귀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신주의협의 손에 소멸된다면 이 세상에 회귀자가 있다는 건 영원한 비밀로 묻히게 된다.

그럼 세상은 혈승들의 차지가 될 것이고….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아니, 그 방법이라도 있으니 다행인 것이군.

장무영은 결심을 굳히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육체를 가졌을 때는 불가능하지만 영혼 상태에서는 해볼 만한 시도.

미래에서 가져온 모든 기억을 한데 모아 강한월의 몸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신주의협을 향해 돌진했다.

마불진경의 마지막 장에 기록된 무공.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콰아앙!

동귀어진을 예상하지 못한 신주의협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파괴하여 죽음의 기운을 폭발시키는 마불진경 최후의 수법은 위력이 놀라웠다.

장무영의 영혼은 즉시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폭발에 휩싸인 신주의협의 영혼도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척혈단… 장무영… 끝까지 걸림돌이 되는구나.

큰 손상을 입었으니 곧 잠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잠들어 있던 원래 영혼이 깨어날 거고.

시간이 없었다.

신주의협은 서둘러 기억을 정리했다.

비밀로 해야 할 기억들을 봉인하는 순간 그는 잠이 들고 원래 영혼이 깨어났다.

“이제 알겠나?”

물론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저 목소리는 자신이 아니었다.

미래에서 온 혈승. 회귀 영혼. 모든 일의 원흉.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 할 자였다.

“이제 알겠네. 자네를 왜 없애야 하는지.”

“후후, 아직 이해하지 못했군. 너는 날 죽일 수 없어.”

“잘못 이해하는 건 너다. 신주의협은 이제껏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그리고 신주의협은 바로 나다!”

“역시 이해를 못 하는군. 이건 누가 더 무공이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야. 이 공간을 보고도 아직 모르겠나?”

공간은 여전히 붉었고 혈향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여긴 내 공간이 아니야. 자네 공간도 아니지. 우리 영혼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왜 붉은색일까?”

“무슨… 뜻이지?”

“어렵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다른 질문을 던지지. 어떻게 우리 영혼이 함께 있는 거지?”

“내 알 바 아니다! 싸워서 너를 소멸시키면 그뿐!”

“넌 나를 죽일 수 없다니까. 왜냐하면….”

눈앞에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누군가의 기억이었는데, 과거의 기억은 아니었다.

인생이, 삶이 빠르게 지나갔다.

신주의협은 굳은 얼굴로 지켜봤다.

마치 자신의 생을 돌이켜보는 것처럼 너무도 생생했다.

실제로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주의협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떨 때는 미소가 지어졌고, 또 어떨 때는 가슴이 매어질 듯 아팠다.

마지막 장이 넘어가는 순간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이었군.”

더 이상 들려오는 답변은 없었다.

신주의협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왠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강한월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반 시진쯤 시간이 흘렀다.

신주의협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모습을 기다리고 있던 천사장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깨어나신 겁니까?”

불안한 목소리였다.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천궁의 궁주일지 아니면 신주의협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의심했던 것이냐? 네 믿음이 부족하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궁주님이 돌아오실 것을 한시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둘이 있을 때는 궁주라 부를 필요 없다. 양 혈승.”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 혈승님.”

자 혈승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격렬한 싸움의 여파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간의 돌.

손수 허리를 굽혀 하나씩 집더니 품속에 넣었다.

“돌의 수가 많이 부족하구나.”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부족한 네 개 중 두 개는 위치를 파악하여 현재 옥룡과 옥진이….”

“됐다. 보고는 나중에 듣겠다. 우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천사장, 양 혈승이 절뚝거리며 석실 밖으로 향했다.

“잠깐.”

“하명하십시오.”

“부상을 입었구나.”

“피륙의 상처일 뿐입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래. 심한 부상은 아니군. 하지만 당당한 천궁의 천사장이 수하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서야 쓰겠나?”

자 혈승이 가볍게 손목을 털자 붉은 기운이 날아가 양 혈승을 감쌌다.

잠시 후 꿀렁거리던 붉은 기운은 모두 모공으로 흡수되었는데, 수십 군데의 상처가 씻은 듯 사라졌다.

자 혈승이 돌아왔음을 새삼 느낀 양 혈승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피의 세례를 내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겐 생명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네 나머지 동료들은 어떨지 모르겠구나.”

양 혈승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오늘같이 기쁜 날 굳이 동료들의 이상 행동에 대해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누가 감히 자 혈승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동향에 대해서는 조만간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후후, 만인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는 착각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지. 정점에 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한번 지켜보자꾸나.”

* * *

그 시각, 황궁.

커다란 동경 앞에선 원숭이는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어색한듯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입가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이 관복이 저랑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하하하. 뱀 형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어울리긴 개뿔.

얍삽하고 야비한 원숭이에게 관복이, 그것도 정일품 최고 관료의 관복이 어울릴 리 없었다.

하지만 먼 길 떠나보내는 입장에서 굳이 야박하게 굴 필요도 없으니….

“그렇구나. 의외로 잘 어울리는군. 동창과 황병의 호위까지 받으면 품격이 더 살아날 게다.”

“하하하, 그렇겠지요? 정일품 특명어사라… 정일품이면 병부상서보다도 높은 거 아닙니까?”

“그래. 오군도독부의 좌우 도독과 같은 품계이지.”

황제를 혈노로 부리는 원숭이 입장에선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사실 뱀이 특명어사라는 근사한 자리를 만들어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천마신교로 출발하는 일만 남았네요. 말씀하신 경호 무사들은 준비가 된 건가요? 혹시 동창과 황병들만 동행하는 건 아니겠지요?”

지난번 혈승 회합에서 결정된 일.

원숭이가 천마신교를 염탐하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권위 있는 직책까지 만들어준 것인데, 여전히 불안했는지 원숭이는 자신을 경호할 고수들을 요청했다.

“음혈인과 귀장 둘을 붙여줄 테니 데리고 가라.”

“에게? 겨우 셋이요? 제가 가는 곳이 마교라고요. 말 그대로 마귀들 소굴로 들어가는데 꼴랑 셋을 데리고….”

“너무 많이 데려가면 오히려 마교를 자극할 수 있어. 게다가 음혈인은 위력이 엄청나지. 지난번 소림에서 양혈인이 송목 노괴를 상대한 것을 잊은 게냐?”

“그거야 들어서 알죠. 하지만 양혈인이 자폭까지 했음에도 송목 그 늙은이를 죽이지 못했지 않습니까?”

“흥, 모자란 것! 그렇게 걱정이 되면 네 스스로의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해!”

먼 길 떠나보내는 순간이라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뱀도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걸 눈치챈 원숭이는 일단 꼬리를 내렸고.

“뭐 말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리고 수련은… 이번 여행길에 제대로 성과를 낼 테니 기대하십시오.”

“천인살 수련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그래요. 뱀 형님 덕분에 백팔살 수련은 성공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죠.”

원숭이가 익히고 있는 무공에 있어 천인살 수련은 거의 마지막 단계였고, 이 수련을 마치면 원숙한 절대경의 위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련의 방법이 수월치 않았다.

삼백삼십삼 명의 처녀, 삼백삼십삼 명의 무인, 그리고 삼백삼십삼 명의 어린아이를 살해하고 마지막으로 음과 양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제물을 죽여야 완성되는 수련.

아무리 뱀의 비호를 받는다 하더라도 황실 내에선 절대 불가능했다.

그러니 십만대산까지의 긴 여정은 원숭이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자, 준비는 그만하면 된 것 같으니 어서 출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천마 그 노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마교에 우리 동료가 있는지 잘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원숭이가 출발했다.

호위하는 황병들의 모습까지 시야에서 사라지자 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까부터 안 좋은 느낌이 들었는데 애써 참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혹시… 자 혈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