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24화 (101/210)

124화. 투전장의 맹인무사 (1)

* * *

투전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어디에나 있었다.

싸움 구경과 도박을 동시에 즐길 수 있으니, 사람들의 흥미와 본능을 자극하기엔 이만한 게 또 없었다.

길림성 장춘에서 가장 유명한 투전장.

오늘은 경기가 없는 날이지만 경기장 주변에는 여전히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박꾼들, 구걸하는 자들, 투전장의 영웅을 꿈꾸는 싸움꾼들….

투전장에 붙어먹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이야기꾼도 있고 말이다.

“커어, 시원하다.”

이야기꾼 중에서도 제법 실력자로 통하는 규태 노인이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야 술 얻어먹는 게 일도 아니지만, 오늘같이 파리 날리는 날 술을 대접받는 건 흔치 않은 일.

“후후, 그러니까 댁들도 맹전사(盲戰士)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어르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다들 추천을….”

노인 앞에 앉아 술과 안주를 챙겨주고 있는 건 일남일녀였다.

여인은 제법 자태가 고운 데 반해 남자는 껄렁껄렁한 것이 남매는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연인으로 보이지도 않는 애매한 남녀.

“그래. 나만큼 맹전사에 대해 꿰고 있는 사람은 없지. 그가 이곳 장춘에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경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역시 그러시군요. 자세히 좀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나? 대충 들으려는 게 아니고? 만약 자세히 듣고 싶다면….”

사내는 얼른 비어 있는 노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고, 여인은 값비싼 안주를 더 주문했다.

그에 더해 동전 스무 개를 슬며시 들이미니 그제야 노인의 입에 발동이 걸렸다.

“푸하하하, 이거 아주 경우가 바른 젊은이들이셨군. 좋아. 내 자세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지. 맹전사의 봇짐 안에 속옷과 발싸개가 몇 개 들었는지까지 말이야. 하하하.”

규태 노인의 말에 따르면 맹전사가 장춘에 온 것은 달포 전.

어디서 얻어맞고 온 건지 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옷도 다 찢어져 완전 거지꼴이었다.

꼴이 그랬으니 처음 싸우겠다고 나섰을 때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그런데 첫날 내리 열 판을 이겨버리지 뭐야. 사람들이 환호했지. 개방의 고수가 몰래 출전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어.”

더 대단했던 건 둘째 날이었다.

이날은 투전장의 상급 선수들이 출전하는 날이었는데, 맹전사는 전날 십 연승을 거둔 덕분에 출전권을 얻었다.

“맹전사의 전설이 이날 만들어졌다네. 글쎄 비무대에 오르더니 두툼한 천을 꺼내 눈을 가려버린 거야. 스스로 맹인이 된 거지.”

상대 선수는 자기를 무시하는 거냐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관중들과 도박사들을 열광했다.

그리고 그 열광은 맹전사가 오십여 합 만에 상대를 쓰러뜨리자 절정에 달했다.

“난 한눈에 알아봤다네. 아, 이자는 승부사이자 흥행사로구나! 구태를 벗지 못해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잃어가던 투전계에 새바람을 몰고 올 혁신의 상징! 감격에 겨운 나는 즉석에서 멋진 이름을 생각해냈지. 맹전사. 바로 그것이었네.”

“오~ 맹전사라는 별칭은 어르신이 만드신 거군요?”

“하하하, 바로 그렇다네. 그러니 자네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정말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거지.”

노인은 스스로도 뿌듯했는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찌 되었나요?”

“젊은 사람들이 급하기는. 안주도 좀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어쨌든… 그다음은….”

맹전사는 둘째 날도 십 연승을 거뒀다.

몇몇 경기는 특히 명승부였다.

맨손 박투로는 길림성 투전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생사박을 때려눕힌 것, 공동파의 파문제자라는 소문이 흉흉한 독고팔검을 꺾은 것.

“맹전사의 무공은 어땠는데요? 내공이 강하다던가, 아니면 독랄한 초식이라도…?”

“그게 또 요상한 일이었어. 투전장에 나서는 선수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의 절기를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맹전사는 그런 게 없었어. 심지어 내공도 전혀 없는 것 같았지. 그러니 관중들이 더욱 열광할 수밖에.”

“정말 이상한 사내군요. 장님도 아니면서 눈을 가리고 싸우고, 연전연승을 하는데 딱히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고.”

“맞아. 그는 한 마리 야수와 같다네. 동물적인 감각과 맨몸뚱이가 그가 가진 전부이지.”

“정말 그러네요. 야수와 같은 맹전사. 다른 말로 하자면 눈먼 짐승이네요. 이 인간이 진짜….”

예쁘장한 여인이 갑자기 흥분했다.

뭔가 대단히 마음에 안 들고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엥? 갑자기 왜 그러나? 내 이야기 중에 뭐 기분 나쁜 거라도…?”

“아, 아니에요. 호호호, 기분이 나쁘긴요. 그런데 그 맹전사의 다음 경기는 언제인가요?”

“그건 미리 알고 온 거 아니었나? 언제기는 언제야… 바로 내일이지.”

“아! 내일이군요.”

“그래. 이번이 진짜 큰 경기이네. 일 년에 한 번 있는 길림성 투전계의 최대 행사지. 저 멀리 흑룡강성과 요녕성의 대단한 고수들도 참가한다는 말이야.”

남녀는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무언가를 상의했다.

그러더니 남자가 대뜸 부탁을 해왔는데….

“어르신. 분명 대회 관계자들과도 친분이 있으시겠죠? 내일 경기… 저도 참가하게 해주십시오.”

“뭐라? 자네 지금 미쳤나? 인상을 보아하니 동네에서 쌈질 좀 해본 모양인데, 정신 차리게. 내일 경기는 진짜 고수들을 위한 대회라고. 괜한 객기 부리다가 피똥 싸지 말고.”

“죽어도 어르신을 원망하지 않을 테니 참가만 시켜주십시오.”

“어허 이 사람이 정말.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엇?”

화를 내던 노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젊은 여인이 슬쩍 꺼내 놓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천하전장의 전표.

금액은 오백냥.

“이건 어르신 거고요. 대회 관계자를 위해선 별도로 준비할 게요.”

“흐흐흐. 이렇게나 예의가 바르니 내 돕지 않을 수가 없군. 따라오게. 출전권을 받아 줄 테니.”

* * *

투전장 관리소.

확실히 규태 노인은 발이 넓었다.

출전자를 결정하는 총관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더니 일단 실력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답을 얻어냈다.

“실력을 증명하라고요? 그게… 어떻게 하면 되죠?”

“뭐라도 보여줘 봐. 경기 시작하자마자 송장 치우지는 않겠다는 확신은 있어야 자네를 명단에 넣어줄 것 아닌가.”

“그건 그렇네요. 그럼… 이런 거라도?”

사내가 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머리가 석가래에 닿을 정도로 높이 뛴 사내의 발차기가 시작됐다.

휙휙휙휙휙~

한 번 도약에 무려 서른 여섯 번의 현란한 발차기를 선보인 후 가볍게 착지.

“오호~ 대단하군! 실제 위력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관중들에게 좋은 볼거리는 되겠어!”

“다른 것도 좀 보여드릴까요?”

“아니, 충분해. 흑도 냄새 팍팍 풍기는 자네 인상과 그 빠른 발차기면 충분하네. 좋아. 출전을 허가하지.”

규태 노인과 젊은 남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물론 총관도 만족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실력 있는 싸움꾼을 받아주면서 뒷돈도 두둑하게 챙겼으니까.

오늘만 벌써 두 명째.

게다가… 이 새내기들의 대진표를 잘 짜기만 하면 짭짤한 도박 배당금까지 기대할 수 있는 거였다.

어디 보자. 이자를 누구랑 붙여볼까?

흑선풍 삼규? 아니야, 그놈은 너무 강해.

동영 인자술을 쓰는 덕천신수 정도면 딱 일 것 같은데. 꽤 괜찮은 그림이….

대진표를 들여다보며 환상의 조합을 찾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이 쾅 열렸다.

“어느 놈이 감히 총관실 문을…!”

열린 문을 향해 고함을 치던 총관은 불청객의 모습을 보고 급히 입을 닫았다.

검은 삿갓을 깊이 눌러쓴 흑의인.

투전장에서만 삼십 년을 구른 총관의 직감이 비상종을 두드렸다.

이자는 절대 상종하면 안 되는 몹시 위험한 자라고.

“여기가 출전자를 정하는 곳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나도 출전한다. 명단에 넣도록.”

삿갓 사내는 마치 자기가 투전장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명령했다.

우선 실력을 확인해야겠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삿갓 사내의 검이 자신의 목을 벨 것만 같았으니까.

“저… 대협… 성함을 말씀해 주셔야 명단에….”

“흑견치.”

흑견치? 검은 송곳니?

스벌…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총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었다.

“잠깐. 대진표도 네가 짜는 건가?”

“네? 그… 그렇습니다만….”

“나는 맹전사와 싸우겠다. 첫판에 바로 붙을 필요는 없어. 대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관중들의 관심이 최대로 고조되었을 때. 그때 맹전사의 심장에 검을 찔러주지.”

* * *

규태 노인의 도움으로 출전권을 따낸 남녀는 객잔으로 돌아왔다.

사내의 손에는 작은 보퉁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오라버니. 대충 입고 싸우면 되지 옷은 뭐 하러 샀어요?”

“후후. 관중들이 지켜보는데 이런 낡은 옷을 입고 출전할 수는 없잖아?”

“알아볼 사람도 없고 어차피 이름도 가짜인데요 뭘. 그리고 살 거면 활동하기 편한 걸 사야지, 그렇게 비싸기만 하고 걸리적거리는 옷을….”

“걱정도 팔자다. 옷 따위가 내 실력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몰라요. 그리고 그 옷은 오라버니 사비로 처리해야 해요. 공금을 막 쓸 순 없다고요.”

“그건 맘대로 해. 여하튼 먼지 하나 묻지 않게 잘 입고 있다가 벗어줄 생각이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말아라.”

“네? 그럴 생각으로 산 거예요?”

“다 찢어진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있다잖아. 그런 옷을 입고 다니게 할 수는 없지. 명색이… 우리 대장인데.”

그랬구나.

곽철이 왜 비싼 비단옷을 골랐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먼저 챙기지 못한 게 미안했고, 동시에 짜증이 확 일었다.

“하여간 이놈의 대장, 내 가만두나 봐라! 대장이란 사람이 대원들을 이렇게 고생시키고!”

“참아 가린아. 대장도 사정이 있었잖아. 어쨌든 내일이면 만날 수 있으니….”

곽철과 진가린은 장백산에서부터 강한월을 추적했다.

처음엔 아무런 단서가 없어 고생했지만 보름쯤 지난 후부터는 그가 거쳐간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신 나간 싸움꾼에 대한 소문이 속속 들려왔기 때문이다.

장백산 인근의 투전장이란 투전장은 모두 찾아가 닥치는 대로 싸우는 사내.

내공도 없고 무공을 배운 것 같지도 않지만 결국 승리하는 건 그 사내라고 했다.

그러더니 또 다른 소문이 들려왔는데, 길림성의 이름난 산적 소굴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투전장의 사내와 이 일을 연관 지을 근거는 전혀 없었지만, 곽철과 진가린은 이 역시 강한월이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의 장소들을 일일이 찾아가 확인했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지만… 당연히 강한월은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그렇게 뒷북을 치는 추적은 계속되었고, 최근 또다른 소문이 들려왔다.

이전의 것들과는 규모가 다른 대형 사건이었는데, 혈랑대의 돌격대 이백 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혈랑대는 흑룡강 일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마적대. 관군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그들을 도대체 누가?

당연히 이 또한 강한월이라 생각했고, 곽철과 진가린은 마음이 급해졌다.

강한월이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붙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오늘 꼬리를 잡았다.

혹시나 하고 찾아와본 장춘의 투전장에서 맹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왜 눈을 가리고 싸우는지는 몰라도, 정황상 강한월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대장이 우릴 못 알아보면 어쩌지? 아직 기억을 못 찾았을 텐데.”

곽철이 현실적인 고민을 말했다.

지금까지는 뒤를 쫓느라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장 내일이면 현실로 닥칠 문제인 것이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꽁꽁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야죠.”

“하지만 대장은 수행 중인 거잖아. 초월경의 벽을 깨려는 건데 우리가 방해하는 건 아닌지….”

“흥, 초월경이고 뭐고 이번엔 무조건 잡아가는 거예요! 싸움질하는 걸로 초월경에 오늘 수 있다면 곽철 오라버니나 광 선배랑 싸워도 되잖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