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투전장의 맹인무사 (3)
* * *
괴물 같은 놈. 발에도 눈이 달렸나?
흑선풍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지쳤고 도끼를 휘두를 힘도 없었다.
그 순간 맹전사의 주먹이 날아왔다.
흑선풍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퍼억!
“맹전사, 승!”
관중들은 환호했고 규태 노인도 펄쩍펄쩍 뛰었다.
곽철의 발차기처럼 화려하지 않았고, 흑견치의 검처럼 압도적이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맹전사는 비무대 가운데 우뚝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을 테지만, 마치 모든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다 곽철, 진가린이 앉은 곳에서 잠시 멈칫했다.
알아보는 건가?
하지만 진가린의 기대와는 다르게 맹전사는 그대로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 * *
대회의 오전 행사가 끝난 후 휴식 시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투전장 밖으로 나온 흑견치는 누군가와 만났다.
상대는 두툼한 바람막이로 전신을 가린 중년인.
“흑견치. 역시 실력이 좋더군. 무난히 본선에 올라갔어.”
“장난하시오? 이런 시골 투전장에 내 적수가 있을 리 없지 않소.”
“그렇긴 하지. 하지만 흑신성이란 자도 실력이 좋던데?”
“흥, 그는 체술에 능한 싸움꾼일 뿐이오. 그런 어설픈 건달과 나를 비교하지 마시오.”
흑견치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고, 중년인도 아차 싶었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가 실언을 했군. 그래, 자네는 그곳에서 파견해준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니까. 그나저나 직접 보니 어떻던가? 맹전사라는 그놈.”
“맹전사… 보통 놈이 아니더군.”
“역시 그렇던가? 과연 비무대에서는 실력을 숨긴 거군. 하긴 우리 혈랑대 이백을 혼자서 박살 낸 놈이니 보통일 리가 없지.”
“후후, 실력을 숨겼다? 당신 눈에는 그렇게 보였소?”
흑견치의 목소리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이런 변방의 마적 떼 주제에 알긴 뭘 알겠냐는 표정.
“흑견치. 아마 내 눈엔 안 보이는 걸 본 모양이군. 자네가 나보다 고수라는 건 인정하네. 하지만 너무 건방은 떨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특히 우리 두령과 오대혈랑 형님들 앞에선.”
“건방? 이보시오, 혈랑대 총관!”
“진정하라고. 자네가 싸워야 할 건 맹전사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 정도 건방을 떨었으면 반드시 승리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오백 명의 늑대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혈랑대 총관은 그 말을 마치고 휙 사라졌다.
하마터면 검을 뽑을 뻔했던 흑견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고 보자. 이번 일만 끝나면….
그랬다. 굳이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혈랑대는 험한 꼴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사실 흑견치는 흑사련 본단에서 파견된 특임대의 고수였다.
흑사련과 혈랑대는 모종의 계약을 맺었는데, 흑사련주가 혈랑대의 두목을 동북지방 사파의 우두머리로 인정해주는 대신 혈랑대는 이백 명의 정예 무사를 흑사련 본부에 파견한다는 것.
본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지만, 파견되는 혈랑들은 비술 괴인들로 제련될 예정이었다.
흑견치의 임무는 이백의 혈랑대를 본부로 인도하는 것이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신나게 약탈질을 하겠다고 나갔던 그들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당해서.
머저리 같은 놈들….
흑견치는 분노했지만 뒷수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흉수를 찾아 원수를 갚아주면 새로운 이백 명을 보내주겠다는 혈랑대 두목의 요청을 받아들여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맹전사 그놈.
투전장 싸움꾼 놈 실력이야 뻔하다고 생각했다.
혈랑대 이백을 해치운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당시 혈랑들은 전원 과음으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좀 전의 그 모습은 왠지 찜찜했는데….
흑선풍이란 자의 도끼질이야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철질려는 어떻게 피해 다닌 걸까?
역시 눈을 가린 천 조각에 속임수가 있는 거겠지?
뭐가 되었던 단 일 검에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어르신! 빨리 오세요. 이제 시작한다고요.”
진가린은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는 규태 노인을 재촉했다.
곽철의 경기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도 빨리 오고 싶었는데, 돈 거는 줄이 워낙 길어야 말이지.”
“이번엔 제대로 거신 거죠?”
“내가 언제 잘못 걸었다고? 난 항상 정확한 예측을 바탕으로 돈을….”
“됐네요. 여기 앉아서 구경이나 하세요. 이번에도 금방 끝날 테니 한눈팔지 마시고요.”
“미안하지만 이번엔 네 오라비도 쉽지 않을 거다.”
“왜요? 이번 상대가 그렇게 강한가요? 아까 이 조 경기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던데…?”
“아까는 비도(飛刀)를 안 썼거든.”
“비도요?”
“그래. 변장을 하고 가짜 이름을 썼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저자는 길림성 흑도의 일인자 비왕도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이런 투전장은 거들떠도 안 보는 진짜 고수라고.”
길림성 흑도의 일인자라고?
재밌어 죽겠다는 듯 진가린의 눈이 반달이 되었다.
“어르신은 이번엔 저 비왕도라는 사람에게 거셨겠네요?”
“어, 어쩔 수 없었다. 난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투자를 하거든. 절정 고수로 알려진 비왕도가 출전한 걸 안 이상….”
“휴우. 그래요. 그게 다 어르신 복이죠 뭐.”
쇄애액~
그러는 사이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렸다.
비왕도가 날린 비도가 곽철을 향해 쏘아졌다.
곽철이 얼른 몸을 틀어 피하자, 비도가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하더니 다시 곽철을 향해 날았다.
“아앗! 저건 이기어검이다!”
누군가 놀라서 소리쳤다.
관중들이 착각할 만했다.
비왕도의 비도에는 거미줄처럼 얇고 투명한 천잠사가 매어져 있었는데, 눈에 보이질 않으니 이기어검이라 오해한 것.
물론 곽철의 눈에는 천잠사가 똑똑히 보였다.
쌔애액~
탁!
마침 귀 옆을 스쳐 가는 비도를 거침없이 낚아챘다.
비왕도가 얼른 회수하려 했지만, 곽철이 천잠사를 끊어버리는 게 더 빨랐다.
“끈은 뭐하러 달았어? 연도 아니고. 그냥 던지는 게 더 위력적일 텐데.”
“뭐? 이 시부럴 넘이.”
비왕도가 이번엔 비도 두 자루를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곽철이 던진 비도가 벼락처럼 눈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으악!”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 박히려던 비도는 머리카락 두께 차이로 콧잔등 앞에서 멈췄다.
같은 속도로 날아든 곽철이 아슬아슬하게 비도를 낚아챘기 때문.
바지춤이 축축해진 비왕도는 즉시 패배를 인정했다.
우와아아~
관중들의 환호, 그리고 규태 노인의 좌절.
“어쩌죠 어르신? 손해 좀 보셨겠네요?”
손해 정도가 아니었다.
오전의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남은 돈 전부를 비왕도에게 걸었는데….
아니, 괜찮아.
아직 마지막 희망이 있으니까.
맹전사. 그가 승리한다면 배당을 받을 수 있다.
비록 낮은 배수이지만 한 달 치 생활비와 술값으론 충분했다.
“맹전사! 당신만 믿소!”
규태 노인의,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많은 관중들의 희망을 어깨에 얹고 맹전사가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상대는 오전 몇 번의 대결에서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준 흑견치.
누구를 상대하던 두 번의 칼질을 한 적이 없었고, 이제는 꽤 많은 인기까지 얻었다.
곽철은 서운하겠지만 관중들의 입장에선 사실상의 결승전.
“후후, 맹전사. 드디어 만났군. 싸우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 맹전사라는 이름은 투전장에서 붙여준 별명이지 않나?”
맹전사는 답이 없었다.
두꺼운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표정 또한 읽을 수 없었다.
“알려주기 싫은가? 겁이 나나 보군. 쯧쯧, 시작도 하기 전에 쫄면 어쩌려고….”
흑견치가 자존심을 살살 긁었음에도 맹전사는 여전히 묵묵부답.
—맹전사. 흑랑대 이백에 대해선 어떻게 책임질 건가?
설마 이것도 모른척하진 않겠지?
상대가 뜨끔하길 바라며 비장의 전음을 보냈는데… 이 역시도 효과는 없었다.
이쯤 되니 오히려 당황한 것은 흑견치.
혹시 저놈은 백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후후후, 뭐 좋아. 정체를 알아야 보고하기가 편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어. 어쨌든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둬라. 방금 목숨을 구걸할 마지막 기회를 날렸다는 걸.
흑견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제 검으로 대화를 나눠야 할 시간.
고개를 돌려 확인하진 않았지만, 수백 개의 강렬한 눈빛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관중들 사이에 섞여서 대기 중인 혈랑대.
그들에게 흑사련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샤악.
대단한 쾌검.
발검을 하는 순간 이미 십 장의 거리를 좁혀 맹전사의 심장을 노렸다.
장춘의 촌것들은 평생 구경도 못 했을 차원이 다른 빠름.
끝났다!
검날에 옷이 걸리는 촉감을 느끼며 흑견치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촌각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즉시 이어져야 할 살을 찌르는 느낌이 없었다.
맹전사는 반의반 촌 간격으로 물러서며 검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어림없다!
흑견치의 검에서 선명한 빛이 뿜어졌다.
초절정을 상징하는 농밀한 검기.
검의 길이가 한 자나 더 길어졌으니 맹전사의 심장이 두 동강 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래야 했는데….
“어, 어떻게…?”
놀란 흑견치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믿을 수가 없었다.
검기가 발출되는 속도는 화살보다도 백 배는 빠르고 소리도 없는데… 어떻게 반 치 앞에 있던 저놈이 피한 거지?
“사술을 쓰는 거냐?”
흑견치의 상상력의 한계가 드러났다.
사술. 그래 그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흑견치는 어금니를 질끈 물며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다.
한편 관중들은 혼란스러웠다.
너무 빠른 속도라 제대로 볼 수가 없었으니 누가 이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흑견치의 외침만이 상황을 짐작해볼 단서가 되었는데….
“쯧쯧. 흑사련 본부에서 온 특사라서 기대를 했건만… 꼴을 보니 영 아닌 것 같군.”
부유한 상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리자, 곁을 둘러싸고 있던 보부상들의 몸이 들썩거렸다.
“형제들의 원수는 갚아야 합니다. 준비를 할까요?”
“당연한 소리. 하지만 일단 좀 지켜본다. 흑견치도 아직 포기한 건 아닌 듯하니.”
쌔애액, 쉬익.
흑견치가 쉴 새 없이 검기를 날리며 맹전사를 몰아붙였다.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이 금지된 필살기, 흑련십삼식까지 꺼내 들었다.
강력한 검기가 휩쓸고 간 비무대는 이미 난장판이 되었다.
온통 땅이 파헤쳐지고 흙먼지가 자욱했다.
하지만 여전히 맹전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놈… 발은 빠르지만 공격은 못 하는구나!
그러면 먼저 지치는 쪽이 진다는 말인데…?
흑견치는 자신이 있었다.
특수 임무를 맡으면 하나씩 지급되는 귀한 영단, 흑활단(黑活丹)!
비록 부작용이 있어 복용 후 몇 달 고생하게 되지만, 적어도 반 시진 동안은 끊임없이 내력을 샘솟게 해주니까.
흑견치가 슬쩍 입에 단약을 넣었다.
일반 관중들은 그 모습을 못 봤지만, 곽철과 진가린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뭘 처먹는 걸까? 내공을 증폭시키는 약이겠지?”
땅콩을 까서 입에 넣으며 곽철이 말했다.
초반엔 여차하면 구하러 가려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느긋한 표정.
“그러겠죠. 그나저나 저 사람 꽤 하는데요? 반년 전에 만났으면 저도 상대가 안 되었을 정도예요. 누굴까요? 저 나이에 저 실력이면 강력한 조직 소속일 텐데…?”
“흑사련일거야. 인상에서부터 사파 냄새가 물씬 나잖아.”
“혹시… 알고 온 걸까요?”
“그럴 리가. 알았으면 겨우 저런 애 하나 보냈겠어? 맘 편히 구경이나 하자고. 대장이 슬슬 끝내려는 것 같으니.”
곽철의 말 대로 비무대 위의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흑활단을 먹은 흑견치가 맹렬히 검을 휘둘렀지만, 검기의 폭풍을 뚫고 맹전사가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에잇 스벌! 제발 좀 맞으라고!”
위기를 느낀 흑견치의 발악.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맹전사의 손가락 사이에 검이 잡히고, 가볍게 뻗은 주먹에 맞아 쓰러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