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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27화 (104/210)

127화. 투전장의 맹인무사 (4)

* * *

“우와아! 맹전사! 맹전사!”

관중들의 환호는 당연했다.

장춘 투전장의 자랑 맹전사가 외지에서 온 냉혹한 싸움꾼을 꺾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관중들 속에는 필요 이상으로 날뛰는 자들도 있었다.

“형제들의 원수를 갚아라!”

농부, 상인, 거지… 각양각색의 복장으로 숨어있던 오백 명 혈랑대가 비무대를 향해 달렸다.

밀쳐 넘어지는 관중들.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그들이 혈랑대라는 걸 알아챘다.

“혀, 혈랑대다. 모두 도망쳐! 아악. 살려줘요.”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 속에서 태연한 것은 비무대 위의 맹전사, 그리고 곽철과 진가린 정도.

“자네들 뭐 하나? 얼른 도망쳐. 혈랑대는 물불 안 가리는 살인마들이라고!”

규태 노인이 도망치다 말고 뒤돌아 외쳤다.

“저희는 마저 구경할게요. 걱정 마시고 어르신이나 어서 피하세요.”

“구경? 자네들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아나? 어서 빨리…!”

짧은 대화였지만 여파는 컸다.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 혈랑대가 들이닥쳐 비무대 주변을 에워싼 것이다.

규태 노인을 포함한 수십 명이 그 안에 갇혔다.

몇몇 투전장 싸움꾼들이 저항해봤지만 떼로 달려드는 혈랑대에게 맞아 피 곤죽이 되었다.

“관련 없는 자들은 모두 조용하라! 허튼짓만 하지 않으면 해치지 않을 테니. 우리는 맹전사에게 빚을 받으러 왔다!”

혈랑대 두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맹전사! 천을 뒤집어쓰고 용모를 감춘다고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우리 혈랑은 형제들의 피 값을 받기 위해선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간다!”

식상한 대사지만 오백의 거한들이 칼을 겨누고 있으니 충분히 위압적.

하지만 맹전사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왜 아무 말을 못 하나? 겁을 먹은 게냐?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다! 얘들아, 쳐라!”

혈랑대 돌격대 스무 명이 비무대 위로 쇄도했다.

마적단의 돌격대에 불과했지만 자신들 스물이면 초절정 고수라도 육젓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들.

맹전사에게 동료 이백이 당했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분명 술에 독을 탔거나 하는 비겁한 수작질이….

휘익. 퍽. 우당탕~

돌격대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뛰어 올라간 순서 그대로 비무대 밖으로 내던져지는 그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 어’ 하는 순간 이미 개구리처럼 뻗었다.

“저놈이 사술을 쓴다! 혈랑 제일·이대, 그리고 오대혈랑이 함께 공격하라!”

밀물이 밀어닥치듯 이백 명의 혈랑대가 돌진했다.

그리고 혈랑들의 머리 위를 타 넘으며 쾌속으로 돌진하는 다섯 고수.

이들이 바로 혈랑대를 흑룡강 최대 조직으로 키워낸 오대혈랑이었다.

샤아악. 휘익~

다섯 줄기 검기가 바둑판처럼 엮이며 날아왔다.

무식하게 돌진하는 일반 대원들과는 달리 오대혈랑은 검기 발현의 고수이자 백전의 노장.

아무리 맹전사가 날고 기어도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콰콰콰쾅!

검기가 쏟아져 내린 자리.

흙먼지만 자욱하게 날릴 뿐 맹전사는 그곳에 없었다.

어디 있지?

당황한 오대혈량이 고개를 돌렸다. 맹전사는 어느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혈랑대를 휘젓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빠른 놈이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늑대 무리를 질타하는 호랑이. 그게 솔직한 느낌이었다.

혈랑대 두목은 가슴이 서늘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싸움을 겪었다.

천이 넘는 국경 수비대와도, 흑룡강 사파의 지존 자리를 놓고 목림방과도 겨뤘다.

하지만 지금처럼 오금이 저리는 느낌은 처음.

나도 늙은 것인가….

그 순간 두목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맹전사가 한 마리 맹수처럼 날뛰고 있지만, 정작 죽어 나가는 대원은 없었다.

혹시… 살인을 기피하는 건가?

“혈랑 제삼대는 인질을 잡아라!”

짧은 명령이었지만 제삼대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건 그들에겐 흔한 작전이었기 때문.

비무대 주변에서 떨고 있던 관중들의 목에 칼이 들이밀어졌다.

물론 곽철과 진가린도 포함해서.

“맹전사!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 셈이냐?”

과연 효과가 있었다.

지금껏 혈랑대의 말은 들은 척도 않던 맹전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후후, 이제 봤더니 꼴에 협객이셨군. 당장 무릎을 꿇고 포박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영감부터 한 명씩 저승길로 보내줄 테니.”

두목에 손에 잡히는 대로 한 명을 끌고 왔는데, 마침 규태 노인이었다.

비열하게 웃는 두목과 바들바들 떠는 규태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는 맹전사.

천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을 게 분명했다.

“뭐 하느냐? 아직도 무릎을 꿇지 않고! 정녕 이 영감의 피를 보고 싶은 게냐?”

“굳이… 이럴 필요가 있겠소?”

맹전사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안 했던 건지 목소리가 건조했다.

하지만 아무리 갈라진 소리라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대장.

진가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울컥했다.

“형제 이백을 죽여 놓고 이럴 필요가 있냐고? 복수를 위해선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살인, 강간, 방화, 약탈… 그들이 그날 밤 저지른 일이오. 물론… 나도 좀 심했다는 건 인정하지.”

“닥쳐라! 네가 뭔데 우리를 심판한다는 말이냐? 네가 신주의협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어서 항복해라. 네놈 혼자서 인질들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으니!”

“당신의 말은 두 가지가 틀렸소.”

“뭐라고?”

“첫 번째는… 아니, 그건 되었소. 말해줘도 이해를 못 할 테니. 두 번째 것만 말해 주지. 나는… 혼자가 아니오.”

그래요. 대장은 혼자가 아니죠.

이 단순한 말이 진가린에겐 그렇게 기쁘게 들릴 수 없었다.

곽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둘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차크라의 기운을 폭사하며 곽철이 동시에 넷을 처리했다.

무영보가 경지에 오른 진가린은 순간 이동하듯 움직여 규태 노인을 빼내 물러섰다.

다시 곽철이 대여섯 명을 쓰러트렸을 때, 백학을 빼든 진가린이 혈랑 삼조 사이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챙그랑….

수십 개의 병장기 떨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고, 뒤이어 혈랑들의 비명이 울렸다.

“이… 이럴 수가!”

두목은 넋이 나갔다.

진가린이 규태 노인을 빼 가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감히 맞설 엄두도 안 났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히는 건 비무대 위의 상황.

무슨 봉인이라도 해제된 걸까? 맹전사 아니 강한월이 태산 같은 경력을 일으키며 일 장에 수십 명씩 날려버리고 있었다.

“괴, 괴물이다! 도… 도망쳐라!

* * *

투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객잔.

목욕을 하고 곽철이 준 옷으로 갈아입은 강한월이 나타났다.

“어? 눈은 안 가렸네요? 이제 맹전사는 그만하기로 한 거예요?”

농담이었고, 그간의 서운함이 묻어 있는 말이기도 했다.

“당분간은. 하지만 또 모르지. 조만간 다시 눈을 가리고 수련할지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기억은 언제 돌아온 거고요?”

“소림에서 있었던 일은 알고 있겠지? 장학송 문주님께도 들었을 거고. 그 이후의 일은….”

“아, 잠깐만요. 그 전에 간단한 것부터 말해 주세요. 아까 혈랑대의 두목에게 틀렸다고 한 것. 이야기하려다가 만 첫 번째 것이 뭐예요?”

“아, 그거. 별것 아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군. 혈랑대 오백 명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인질들을 안전하게 구하는 거. 그거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치, 뭐예요. 잘난 척하는 말이었네요.”

“그래. 그러니까 이야기하려다 만 거야. 너와 곽철이 있는데 나 혼자 할 이유도 없었고. 너희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믿으니까.”

별것 아닌 말이지만 진가린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호호호,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제대로 보셨네요. 좋아요. 이제 청송문 이후의 일을 설명해주세요.”

“음… 그러니까 장학송 문주께서 기억을 봉인하신 이후에….”

동방선도의 기억 봉인술은 신비했다.

최근 몇 년간의 기억과 더불어 무공에 대한 기억을 봉해버린 것이다.

강한월이 미안해할까 봐 제대로 말은 안 했지만, 이를 위해 꽤 많은 양의 영선기를 희생하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암시를 걸었는데,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 찾아가 쉬지 말고 싸우라는 것이었다.

강한월은 무의식에 이끌려 투전장을 찾아갔다.

첫날은 많이도 얻어맞았다.

내공을 일으키고 근육을 쓰는 기억들이 뇌 속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니까.

며칠이 지난 후, 더 이상 구타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동작들. 그 움직임으로 얼추 맞상대를 하게 된 것이다.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었지만, 그래도 이것이 수련이라는 건 알았다.

강한월은 좀 더 강한 싸움꾼들이 모이는 투전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얻어맞고, 버티고, 이기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강한월의 몸은 무공이 아닌 본능으로 무장되기 시작했다.

그날은 장춘으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길림성 최고의 투전장이 있는 곳.

지금까지 거쳐온 곳들과는 다르게, 장춘에서는 꽤 오랫동안 싸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산을 넘다가 마을을 약탈 중인 혈랑대와 마주쳤다.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못 본 척 외면할 순 없었다.

악행을 막아야 한다는 건 기억이 아닌 본성의 문제이니까.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고, 십여 명을 때려눕혔다.

하지만 적들은 너무 많았고, 혈랑들은 투전장 싸움꾼들보다 더 강했다.

강한월은 얼마 못 가 위기에 처했다.

혈랑들이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면, 강한월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혈랑들은 잔인했고, 천천히 그를 가지고 놀다 죽일 생각이었다.

쉬지 않고 날아드는 주먹과 발길질, 그리고 곤봉에 초주검이 되었을 때,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장학송이 봉쇄한 기억이 아닌, 무엇인지 모를 다른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뇌 속에서 폭발하는 무공들.

수천수만 가지 초식들이 머릿속을 하얗게 채우는 순간… 강한월은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자 또 다른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몸의 주인은 무아에 빠져 정신줄을 놓았고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뇌를 채우자, 영선기가 눈을 떴다.

인간의 영혼과는 엄연히 다르지만 영선기에도 분명 영성이 있었다.

영선기는 단전에 웅크리고 있는 역근경을 일으켜 누군가의 기억이 채워 놓은 무공과 결합시켰다.

강한월의 의식이 배제된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결합.

그 순간, 이백 명의 혈랑대에게 지옥문이 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월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니, 의식이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상단전에서 기억을 봉하고 있던 영선기가 누군가의 기억과 역근경을 한데 묶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강한월은 자신의 움직임에 놀랐다.

분명 자신의 것이되 자신의 것이 아닌 무공.

중간중간 마불진경의 무공도 뿜어져 나왔지만, 또한 마불진경이 아니었다.

“초월경… 맞죠?”

“아니. 장학송 문주님이 알려주시려고 했던 초월경은 아니었어.”

기존의 틀을 버리고 무아를 얻어 초월하라는 것.

그것이 장학송이 기대한 이 수련의 성과였다.

하지만 강한월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기억을 얻었다.

“그렇지만 지난 경지를 초월하게 된 것은 맞는 것 같아. 역근경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고.”

“대장.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되었소. 강해지면 된 거지 뭐.”

곽철이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한월도 실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가지 고민만 빼면….

“그런데 장춘 투전장에는 왜 가신 거예요? 눈을 가리고 싸운 이유는 뭐고요?”

“힘을 빼는 연습이 필요했다. 무아상태에서 싸우는 건 어떤 걸까 궁금해서 시력을 포함한 여러 감각들을 봉한 거고.”

“그럼 앞으로도…?”

“아니. 연습은 이제 충분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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