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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29화 (106/210)

129화. 개와 원숭이 (2)

* * *

다음 날, 수련실.

천마는 전날 약속한 대로 다음 단계 가르침을 내리려고 했지만 유선은 더 급한 게 있었다.

“저에게 황실 특사를 맞으라 하셨다고요?”

“그렇다.”

“싫습니다.”

“너에겐 결정권이 없다.”

“그럼 천마께서 결정을 번복해주세요. 전 싫습니다. 분명 대사형이 적임자인데 저에게 시키시는 이유도 모르겠구요. 설마 황실 특사가 젊은 여자를 좋아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천마를 상대로 이 정도면 막말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유선이 강하게 나간 건 그만큼 외부인을 만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모르겠다라… 정말이냐?”

천마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유선의 뇌 속을,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시는 것처럼 저는 수련실에 처박혀 살고 있습니다. 황실 특사가 왜 오는지 알 길이 없지요.”

“흥, 거짓말을 하는군.”

거짓말이라고?

아니,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외부인을 만나기 싫다는 건 진실… 하지만 천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은 거짓.

“제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천마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왜 접니까?”

또박또박 따져 묻는 것. 혹은 말대꾸.

만마의 종주 천마로서는 몹시 불편한 일이었다.

그리고 천마는 불편한 감정마저 공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자.

크으윽.

천마는 그저 언짢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유선이 목줄기를 움켜잡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고통이 몰려왔고, 어제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이유는… 특사를 보내는 자가 회귀한 혈승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황제와 흑사련주가 죽고 무림맹주가 실종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황실의 특사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크… 으윽… 결국… 제… 제가 회귀자이기 때문입니까?”

“아니, 넌 내 제자다. 아쉽게도 나와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제자.”

제자라고? 제길. 이렇게 말하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잖아.

“지금의 그 고통을 잘 기억해라. 그것이 천마신공 제사 단계의 요체이다.”

정말 가르치는 방법 한번 화끈하군.

유선은 기절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머릿속에는 천마신공의 법문이 한 자 한 자 새겨지고 있었다.

* * *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차와 여러 필의 말, 그리고 짐수레가 마을로 들어섰다.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지만 그럼에도 척박하고 황량했다.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황실의 복장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행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특명 어사 대인. 이곳이 천마신교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마을입니다.”

“마교의 소굴과 가까워서 그런가? 분위기 한번 을씨년스럽네. 변변한 객잔이나 있을까 몰라?”

“대인의 격에 맞는 객잔이나 장원은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선발대가 집을 하나 빌려 깨끗이 청소를 해 놓았으니….”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목욕은 할 수 있겠지? 명색이 황실의 특사인데 먼지를 뒤집어쓴 꼴로 천마를 만날 수는 없잖아?”

말을 하면서도 원숭이의 눈길은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야수처럼.

그러니 목욕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뻔했다. 먼지가 아니라 피를 씻으려는 것.

“대인.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이곳은 천마신교의 앞마당입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천마신교의 교인이고, 광명정 근무자의 가족들이 사는….”

“뭐야? 종 백호는 내가 여기서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되는 건가? 사람 참… 나를 뭘로 보고.”

원숭이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천인살 수련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으니 굳이 마교의 코앞에서 무리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럼에도 주민들을 보고 입맛을 다셨던 것은 피 맛을 보고 싶은 본능이 끓어올랐기 때문.

천인살이 경지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자, 숙소로 가자고. 풀어야 할 짐들이 많으니.”

일행이 찾아간 곳은 적당한 크기의 저택이었다.

신장과 청해를 오가는 상단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방이 많고 마당이 넓은 데다 무엇보다 담장이 높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동창 대원들이 짐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사방이 막힌 짐수레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거대했고 다른 하나는 작은 크기였다.

“귀장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라. 특명 어사의 번듯한 호위로 보이도록 말이다.”

커다란 수레의 문이 열렸다.

그 안은 마치 작은 수감실 같았고, 두 명의 장발 괴인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뱀의 비술로 탄생한 귀장(鬼將).

옷을 갈아입힌다고 번듯한 무사로 보일 것 같진 않았지만, 동창 대원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저건… 어떡할까요?”

종 백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산한 귀기와 싸늘한 음기가 수레의 벽을 뚫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속에 든 것은 관.

그리고 관 안에 누운 것은 시체가 아닌 음혈인이었다.

“어쩌긴 뭘 어째?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라면 그럴 용기는 있고?”

종 백호와 대원들이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여성의 몸을 씻기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잘 때 악몽을 꿀 것 같으니 꺼려졌던 것이다.

“흥, 못난 것들. 저건 그냥 놔둬. 어차피 땀도 안 나는 몸이니 더럽지도 않을 거야. 광명정에 들어가기 직전에 바람막이만 걸쳐주면 된다.”

명령을 마친 원숭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운기행공을 할 테니 내일까지 아무도 날 방해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도 푹 쉬면서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고. 잊지 마라. 내일 우리가 마귀들의 소굴로 들어간다는 걸.”

* * *

유선은 동경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도 못 알아보겠지?’

삼십 대 중반의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 동경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유선 본인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나이도 다른 데다가, 인상까지 다르니 무엇 하나 자신과 연결시킬 부분이 없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유선이 천변만화술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면마(千面魔) 장로에게 부탁해 급하게 익힌 변신술이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성과.

천마의 강압으로 인해 특사를 맞는 임무를 맡았지만, 자신의 용모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특사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 혹시라도 혈승이 직접 오는 것이라면…?

혈령 때문에 정체가 들통날 걱정은 안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혈령은 고(蠱)에 흡수되어 강한월에게 빼앗겼으니까.

얼굴만 숨기면 되는데….

자신이 혈승인지 아는 건 호랑이, 원숭이, 그리고 말.

하오문 민정화가 보내준 정보에 따르면 호랑이는 무림맹주가 되었다니 여기 올 리 없고, 문무대를 탈출했다는 원숭이와 말이 마음에 걸렸다.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저 새 삶을 시작했으니 더 이상 그들과 엮이기 싫을 뿐.

하지만 천마의 생각도 이해가 되었다.

이건 숨거나 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새 인생을 살고 싶다면… 싸우는 게 맞다. 혈승 무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기왕 싸울 거면… 이겨야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선은 나름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천변만화술을 익힌 것도 그중 하나.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은 작지만, 그럼에도 부교주와 장로들에게 부탁해 대비를 했다.

가장 곤란했던 건 천마의 협조를 얻는 것이었는데, 예상외로 천마는 그녀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줬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

너희가 황실, 무림맹, 흑사련은 쉽게 삼켰을지 몰라도 이곳은 마음대로 안 될 거야.

여기엔 천마가 있고, 너희 못지않은 괴물들인 마인들이 있고… 또 내가 있으니까.

* * *

화려한 관복을 차려 입은 일행이 광명정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한 건 천마흑풍대.

마신의 형상을 한 황금색 견장이 달린 검은 무복의 대원들이 일렬도 도열했다.

소림의 백팔나한과 더불어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전대가 마중을 나온 걸 보니 천마신교에서도 나름 의전에 신경을 쓴 것이다.

“황실 특명 어사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천마흑풍대 대주 관길상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리오. 본 관은 특명 어사님을 모시고 온 동창의 종취랑….”

관길상과 종취랑이 예를 갖춘 인사말을 주고받는데, 마차 안에서 콧방귀 소리가 흘러나왔다.

“흥, 황제 폐하의 대리인 본 어사가 먼 길을 왔는데 고작 대주 따위가 맞이한다? 원래 신교의 예법이 이런 건가?”

“아, 그건 오해십니다. 저희 천마흑풍대는 그저 안으로 모시는 임무만 맡았을 뿐입니다. 정식 환영 행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천마는… 왜 나오지 않은 거지?”

순간 천마흑풍대 전원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동창 무사들이 급히 호흡을 멈춰야 할 정도로 험악한 마기.

천마의 직속 근위대인 이들이게 천마는 곧 신(神) 그 자체였으니, 이런 막말은 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상대가 황실 특사라 하더라도.

“특명 어사 대인. 이곳은… 십만대산임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관길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사실 원숭이도 여기서 더 나갈 생각은 없었다.

기 싸움의 맛보기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번 방문에서는 치열한 기 싸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고, 기선을 제압할 상대로는 천마흑풍대 정도가 딱 적당했을 뿐이니까.

“후후후, 역시 천마흑풍대의 충성심은 대단하군. 실은 모든 충성심은 궁극적으로 황제 폐하를 향해야 함에도 말이야. 하지만 뭐… 일단 들어가자고.”

천마흑풍대의 안내를 받으며 정문을 통과하자 동창 무사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나자마자 실랑이가 있었지만 이 정도면 걱정했던 것보다는 양호했으니.

하지만 그들의 안심은 너무 성급했다.

환영식이 열리는 연회장에 도착하는 순간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여보시오, 천마흑풍대 대주!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요?”

먼저 화를 낸 건 원숭이도 아닌 종취랑 백호였다.

충성심은 천마흑풍대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동창에겐 충성심보다도 훨씬 큰 자부심과 자존심이 있었다.

일반 대원이라 하더라도 어딜 가나 대접을 받았고, 웬만한 관리들은 고개조차 못 드는데….

“천마께서 참석 못 하시는 건 그렇다 쳐도 부교주나 총군사도 환영식에 참석을 안 하다니! 지금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거요?”

“진정하시지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성대한 공식 환영식은 따로 열릴 것입니다. 이건 그저 첫날의 사전 행사 성격일 뿐이니….”

“닥치시오! 천마신교도 엄연한 대명제국의 신민.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도….”

“그만.”

종취랑의 거친 항의를 듣고만 있던 원숭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기분이 나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궁금증이 더 컸다.

무슨 꿍꿍이일까?

그저 나처럼 기선을 제압하려는 건가?

“대주. 본 어사는 심히 기분이 안 좋지만 손님 된 입장에서 한 번 더 참을성을 발휘하도록 하지. 그래서 도대체 누가 나온다는 건가? 천마도 아니고 부교주도 아니면… 설마 신녀가 이 행사를 주최하는 건가?”

“신녀님도 아니십니다. 오늘 황실의 귀빈들을 맞이할 분은….”

관길상이 말을 멈췄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관길상 입장에선 열 받게도,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지금에야 나타나는 행사의 주인공.

“안녕하세요? 제가 조금 늦었군요. 인사드립니다. 천마님의 제자인 무악이라 합니다.”

궁장을 차려 입은 유선이 연회장에 들어왔다.

시선이 쏠렸고, 유선과 원숭이의 눈빛이 마주쳤다.

유선은 급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원숭이. 네가 왔구나!

우려했던 대로 혈승 중 한 명이 직접 온 것이다.

다행이라면 호랑이 같은 강자는 아니라는 것.

하지만 한편 걱정도 되었다.

머리를 굴리고 꾀를 내는 데는 원숭이는 최강자 중 하나이니까.

“천마의 제자? 천마에게는 두 명의 제자만 있다고 들었는데? 둘 다 남자이고.”

“본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황실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문 것과 같지요.”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원숭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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