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개와 원숭이 (3)
* * *
천마신교의 수뇌부가 참석하지 않은 환영식.
무시당함이 분명했다.
정문에서 천마흑풍대를 면박 준 것은 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게 맞았지만… 원숭이는 꾹 참았다.
이 수모를 되갚아주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앞에 앉아있는 천마의 제자라는 여인은 왠지 말이 통할 것도 같았다.
“뭐 좋아. 무악 여협. 기왕 마련된 자리이니 환담이나 나누도록 하지.”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사 대인.”
“일단 이것부터 좀 물어야 하겠네. 신교의 고인들은 뭐가 그리 바쁜 건가? 명색이 천마가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닐 테고.”
“실은… 천마께선 한 가지 신공을 연성하고 계십니다. 대성을 눈앞에 둔 중요한 시점이라 오늘은 부득이 연공실을 떠나지 못하신 겁니다.”
“천마가 새로운 신공을? 혹시….”
원숭이는 귀가 솔깃했다.
천마는 그 이름 자체로 이미 완성된 무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초월경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또 새로운 신공의 대성을 앞두고 있다고?
“글쎄요? 대인께서 생각하시는 그 무공일 수도 있고… 혹은 기존의 상식을 깨는 완전히 새로운 무공일 수도 있겠지요.”
“이거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 그런데 완전히 새로운 것이 과연 있을까? 모든 것에는 뿌리와 연원이 있는 법.”
“대인의 말씀을 들으니 그도 그렇군요. 천마께서 연성 중인 무공도 실은 천축과 서장의…. 아, 제가 쓸데없는 말을.”
유선은 말실수를 한 듯 급히 입을 막았다.
물론 연기를 한 것인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다.
천축과 서장? 완전히 새로운 무공이라고?
원숭이는 자연스레 자신들 혈교의 무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뿌리는 천축과 서장에서 발견된 혈경에 두고 있다지만 무공 자체는 이백 년 후에 자 혈승이 창안한 것이니까.
“그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군. 나 또한 무공을 익힌 몸으로써 새로운 무공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게다가 천하제일에 근접한 천마가 익히는 무공이라면 더더욱.”
“천마께선 천하제일에 근접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천하제일이십니다.”
“후후, 글쎄?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쪽 교인들뿐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 모두는 신주의협이 천하제일이라고 말하니까.”
“좀 전에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려야겠군요. 세상은 우리 신교에 대해, 특히 천마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답니다.”
여기부터는 이야기가 겉돌았다.
유선이 일부러 유도한 바였다.
천마가 회귀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풍기되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것.
“그건 그렇고… 천마의 제자이니 당연히 무 여협도 고수이겠군?”
“열심히 수련 중입니다만 아직 고수라고는… 앗!”
원숭이가 젓가락을 들어 갑자기 찔러왔다.
공력을 싣진 않았지만 전직이 살수(殺手)이니 만큼 매우 빠르고 은밀했다.
유선이 손가락을 뻗어 쳐내려 하자 젓가락이 뱀처럼 휘어지며 요혈을 노렸다.
휘익.
유선의 손목이 기이하게 꺾이며 젓가락을 낚아챘는데… 원숭이는 순순히 젓가락을 넘겨주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무거운 이야기만 오간 것 같아 분위기도 풀 겸 장난 한번 쳐봤네. 역시 무 여협의 솜씨가 제법이군.”
원숭이는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싱글벙글이었다.
속마음도 실제로 웃고 있었는데, 장난을 가장해 급습을 펼쳐서 중요한 정보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유선이 마지막에 젓가락을 낚아챈 수법.
분명 혈교의 금나수법과 매우 유사했다.
‘후후후, 그렇다는 말이지?’
반면 유선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원숭이에게 농락당한 사실보다는, 그 와중에 노출해서는 안 되는 초식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선의 속마음은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는데….
혈교의 초식 하나를 슬쩍 노출한 건 계획적이라는 뜻.
‘원숭이. 잔머리를 굴려봐라. 그러면 그럴수록 수렁에 빠지게 될 테니.’
* * *
유선과 원숭이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그 시각.
산들바람이 영빈관을 향해 불어왔다.
영빈관 담을 넘는 순간 바람은 담벼락 그림자가 되었고, 정원을 가로지를 때는 밤안개로 변했다.
안개가 향한 곳은 영빈관의 별채.
동창 무사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는 곳이었다.
‘특명 어사와 동창 간부들은 모두 환영식에 가 있는데… 도대체 무슨 중요한 게 있길래 경비를?
저기를 조사해 봐야겠군.’
은형마(隱形魔)는 별채 지붕 위로 스며들었다.
동창 무사들이 한눈을 판 것은 아니지만, 은신술과 잠입술로는 천마신교 내에서 독보적인 은형마를 막을 수는 없었다.
‘누가 거실에서 저렇게…?’
대들보 위에 걸터앉은 은형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별채 거실에는 동창 무사 두 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른 저녁 잠에 든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신경을 자극했다.
방을 놔두고 거실에서 자고 있는 점, 동창의 평무사 복장치고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않는 점….
깃털처럼 가볍게 대들보에서 내려온 은형마는 과감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멀리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가까이 가니 알 수 있었다.
이 둘… 대단한 고수다!
은형마는 솜털이 곤두섰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판단하는 건 잠입술의 기본 중이 기본.
이 정도 고수들이 있는 곳이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물러서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진정한 고수라면 잠든 와중에도 주변의 기와 호응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법인데, 이들은 마치 수혈이라도 짚인 것처럼… 아니, 마치 시체처럼 의식이 없었다.
후후, 그런 것이었군.
대충 감을 잡은 은형마가 시선을 돌렸다.
진짜 확인이 필요한 곳은 거실에 붙어있는 방.
무언가 스산한 기운이 풍기는 저 방 안에 동창 무사들이 경비를 서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스르륵.
극유의 기운을 쏘며 문고리를 잡자,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방 안은 서리라도 내려앉은 듯 싸늘했는데, 그 냉기는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실의 특사가 무엇 때문에 관을?’
은형마는 관 앞에서 망설였다.
못질이 되어있지 않으니 뚜껑을 여는 건 쉬웠지만 웬일인지 손이 떨렸다.
잠입술이 경지에 오르며 생긴 본능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하다고.
어쩐다?
이대로 돌아서려고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똥개도 자신의 집 앞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여기 십만대산은 자신의 집 아닌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판단할 줄 아는 게 잠입술의 기본이니까.
* * *
“하하하, 무 여협과의 대화가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군. 천마가 환영식에 나오지 않은 게 하나도 아쉽지 않을 정도야.”
세 번째 술병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원숭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이었는데, 유선이 실수를 가장하고 두어 가지 정보를 더 흘려줬기 때문.
사실 이런 류의 작전과 기만에 더 정통한 건 원숭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애당초 유선에게 너무 유리한 상황인 것이다.
유선은 그가 원숭이인 걸 알고, 원숭이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저 역시 대인과는 말이 통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황실에서 오신 분이라 매우 권위적일 거라 짐작을 했었답니다.”
“후후, 말했지 않나? 나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일반적인 관료들과는 다르지.”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어떤 무공을 익히셨는지 여쭈어도 될런지요? 아마도 황실의 무공은 아닌 듯한데….”
“황실 무공은 아닌 것 같다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원숭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미끼를 던질 차례.
“아, 그것이… 왠지 저희 천마님이랑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도 해서요. 죄송합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대인께도 예가 아니고 천마님도 화를 내실 수가 있으니.”
이제 원숭이의 확신은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천마는 회귀자일 확률이 다분했다.
다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알려진 천마의 나이가 회귀의 법칙과 맞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가? 그런 말을 들으니 더더욱 천마를 빨리 보고 싶군. 그런데… 천마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이미 구십은 넘었다고 하던데.”
“천마님과 같은 분에게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군. 내 황제 폐하를 대리하는 입장이라 천마라 낮춰 칭하지만, 어찌 보면 그는 무림의 대선배인 격이니까.”
“천마께선 구십이 넘으셨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는 젊으시답니다.”
“무슨 뜻이지? 무공이 고강해서 젊어 보인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신교 내부의 일이라 말씀드리기 뭐하군요. 그냥 알려진 나이보단 한 띠 정도 적다는 것만….”
한 띠? 실제로는 열두 살이 적다고?
원숭이의 심장이 격하게 방망이질 쳤다.
이건 엄청난 정보!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 먼 길을 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 * *
암흑의 길.
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유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창 하나 없고 등불도 없는 철저한 어둠.
그리고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 때문에 더 어둡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스르륵.
답변은 없었지만 문이 저절로 열렸다.
“특명 어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말해봐라.”
천마는 무관심한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정말로 관심이 없었다면 이 시간에 방문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어사는 회귀자입니다. 원숭이라고… 비술에 특화된 자입니다.”
“강한 자는 아니더군.”
“여기서도 그걸 느끼실 수 있는 겁니까?”
“광명정 안에 내가 모르는 일은 없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마신강림의 경지에 오르면서 천마는 점점 인간이 아닌 무엇이 되고 있으니까.
“네. 말씀대로 원숭이는 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요주의 인물이죠. 약삭빠르고 계략에 능한 데다가 무엇보다 원숭이의 뒤에는 진짜 강한 자들이 있으니까요.”
“뱀, 용, 호랑이. 그들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흥, 얄팍한 비술로 인성을 상실한 허수아비나 만드는 것들이 강자는 무슨.”
천마는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냈다.
그 표정이 아주 구체적이었는데, 무언가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가 그 보고를 했는지 유선은 알고 있었다.
은형마에게 잠입을 부탁한 것이 바로 그녀이니까.
“은형마 장로는 뭐라고 하던가요? 황실이 무엇을 딸려 보낸 겁니까?”
“이지를 상실한 허수아비 둘. 극단적인 음기를 품고 있는 시체 하나.”
“귀장과 음혈인입니다. 뱀이 꽤 아끼는 무기들이죠.”
“허수아비일 뿐이다.”
“귀장이야 구마동의 원로들이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만 음혈인은 다릅니다. 하오문이 보내준 정보를 보셨지 않습니까? 소림의 송목대사가 양혈인에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즉, 신교 내에서도 오직 천마님만이 음혈인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죠.”
“유선.”
천마의 목소리에 짜증과 권태가 묻어났다.
기분이 나쁘다는 증거였고, 이럴 때의 천마는 정말 조심해야 했다.
“말씀하세요.”
“이번 일은 너에게 일임했으니 네 계획을 따르고는 있다만… 솔직히 이렇게 복잡하게 신경전을 펼 필요가 있나 싶다. 네가 말하는 강자들. 뱀, 용, 호랑이, 그리고 그들이 만든 괴물들. 내가 강호에 나가 모조리 죽여주면 될 것 같은데?”
과연 천마다운 생각이었고, 유선이 가장 피하고 싶은 방법이었다.
기분 상하지 않도록 잘 설득해야만 하는데….
“천마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뱀이나 용도 일대일로 싸우면 천마님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죠.”
“흥, 일대일? 네가 마신강림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런가요? 그럼 제가 수정하겠습니다. 뱀, 용, 호랑이가 한 번에 덤벼도 천마님의 상대가 안 된다고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전면전은 피해야 합니다.”
“어째서?”
천마의 목소리가 회색으로 들렸다.
안 됐지만 진실을 말해줘야 했다.
마신강림을 완벽하게 이루더라도 당신은 천하제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 혈승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