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개와 원숭이 (4)
* * *
영빈관의 푹신한 침상에 누운 원숭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러 정보를 조합하여 가설을 짜느라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일단 천마신교에 동료 혈승이 있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과연 동료 중 과연 누구인가?
돼지, 닭, 토끼는 이미 죽었고, 미친개는 배신해서 강한월한테 붙었고, 말은 자신과 함께 탈출했으니 천마일 리가 없다.
뱀, 용, 호랑이도 분명 아니니… 남은 것은 양, 소, 그리고 쥐.
소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소는 재물의 담당하는 혈승들의 수좌. 현명하고 상재에 밝지만 무공의 재능은 평범한 그가 천마신교로 회귀해서 천마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 무리.
그렇다면 양과 쥐만 남는데….
그래, 양일지도 몰라.
양은 무공을 담당했던 혈승이고, 수좌인 호랑이와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는 강자. 게다가 자 혈승과의 관계도 특별히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원숭이의 속마음은 쥐, 즉 자 혈승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도저히 자취를 찾을 수 없던 자 혈승을 자신이 찾아낸다면, 그리고 자 혈승과의 교신을 직접 담당하게 된다면… 황제를 혈노로 부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인정을 받게 되는 거였다.
며칠 안에는 천마를 만나게 될 테고,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이제 잠이나 자자.
원숭이는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감았지만,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라 다시 눈을 떴다.
잠깐만….
천마신교도 동료 혈승이 장악하고 있다면, 어째서 강한월의 대원들 중에 마인들이 있는 거지?
그저 그런 마인이었다면 깊게 고민하지 않을 테지만, 흑철기린 광군영이나 신녀후보 소영영이 교를 배신하고 강한월에게 붙었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갑자기 골치가 아파졌다.
강한월을 포함한 문무대 대원들의 정보를 뱀에게 비밀로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정보는 독점하려 한 건데… 자칫하면 동료를 속였다는 문책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엔… 돼지와 토끼를 죽이고 혈령을 빼앗은 것까지.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게 방치하면 안 된다.
광군영, 소영영의 비밀을 풀기 전엔 천마가 다른 혈승들과 소통하도록 연결할 수 없었다.
이거 이거… 골치 아픈 숙제가 생겼군.
어디부터 확인해야 할까?
* * *
다음 날 점심 무렵, 유선이 찾아왔다.
약속이 된 것은 아니지만 손님 접대를 맡고 있기에 자연스레 찾아온 것인데.
“무악 여협. 잘 왔네. 그래 천마와의 면담 일정은 잡혔나?”
“죄송하지만 며칠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이것 참. 본 어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군. 나를 언제까지 붙잡아 놓을 생각인가? 이런 무례한 행동은 황실에 대한 불충이며, 자칫 역모로 의심될 수 있음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원숭이가 ‘역모’라는 단어까지 쓰는 걸 보니 뭔가 요청할 게 있는 듯했다.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유선은 조금 겁을 먹은 연기를 해줬다.
“역모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어사 대인을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지요.”
“흠… 오늘은 무 여협의 얼굴을 봐서 참겠네. 대신 멍하니 있을 수는 없으니 광명정 안내를 좀 해주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이곳이 척박한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 군데 장관을 이루는 곳이….”
“우선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네.”
“아, 어디입니까, 그곳이?”
“신녀궁.”
이 원숭이 놈이 진짜!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칠 뻔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 표정까지 관리가 된 건 아니었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유선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원숭이는 놓치지 않았다.
신녀궁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대인. 십만대산 어디라도 대인을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만, 딱 두 곳은 불가합니다. 천마동과 신녀궁이 바로 그 두 곳이지요.”
“흥, 지금 그런 일반적인 규칙을 황실의 특사인 나에게 적용하겠다는 건가?”
“어사 대인이 아니라 황제 본인이 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유선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원숭이의 의심도 깊어졌다.
“왜? 남자는 못 들어가는 금지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성지? 뭐, 좋아. 그렇다면 신녀를 밖에서 따로 만나도록 하지. 신녀는 천마와 동급이고 신통력이 방대하다는데 여기까지 와서 안 만나고 갈 수는 없지.”
비록 흥분했다고 하지만, 원숭이가 왜 이러는지 유선이 모를 리 없었다.
잔혼반 비술을 펼친 소영영의 뒤를 캐려고 신녀궁을 기웃거리는 것이고, 나아가 천마와 문무대가 관계가 있지는 않을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신녀를 만나게 해주고 의심을 풀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신녀.
최근에야 겨우 회복되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
그런 분을 원숭이 같은 놈과 만나게 하기 싫었고, 거짓말을 해달라고 말하기는 더욱 싫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원숭이가 계속 의심을 한다면… 그래, 천마의 말대로 누가 이기는지 한판 붙으면 그만.
“대인.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뵙지요.”
유선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휙 떠나버렸다.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원숭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흥, 그런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 * *
그려 놓은 눈썹처럼 얇은 초승달이 걸렸다.
밤공기를 흠뻑 들이마신 원숭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기가 충만한 밤.
활동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천인살 수련이 절정으로 치 닿고 있는 자신도 그렇고,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이 여인도 그렇고.
뱀에게서 배운 기동 주문을 중얼중얼 외운 후, 검지 끝에서 피 한 방울을 뽑아 음혈인의 이마에 떨어뜨렸다.
거리가 너무 멀어 뱀의 혈령 교신은 불가능했기에 원숭이가 임시로 명령권을 행사하는 것.
“가자.”
둘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원숭이는 이름난 살수였으니 당연히 은신술이 뛰어났고, 최근에 공력이 폭증하면서 더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음혈인은 은신 전문가는 아니지만 소림사 방장을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음기(陰氣)를 가졌고, 음기라는 것이 원래부터 은신에 적합한 기운인지라 원숭이 못지않은 실력을 보였다.
음습한 향기가 퍼지듯 스멀스멀 전진한 그들은 어느새 신녀궁 담장 앞에 도착.
여기구나.
의외로 경비는 심하지 않았다.
하긴. 외부의 침입자가 광명정까지 접근하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하니, 광명정 내부에 있는 신녀궁을 굳이 방비할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경비가 허술하다고 분위기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레 풍겨나는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 때문에 원숭이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겠지?
하지만 음혈인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 * *
이 원숭이 새끼가 진짜!
유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 신녀가 없었으면 손에 든 찻잔이라도 부숴버렸을 것이다.
“어머, 정말 네 예상대로 침입자가 있구나.”
거울 위에 떠 오른 검은 점 두 개를 보며 신녀가 말했다.
원숭이의 생각과 달리 신녀궁은 경비가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경비무사가 아닌 온갖 신물들이 침입자를 탐지하고 있을 뿐.
천년 역사 동안 천마신교가 확보한 기이한 비술 도구들은 대부분 신녀궁에 있었고, 그중 경비에 활용할 수 있는 것만 수십 개가 넘으니까.
“신녀님은 여기 계세요. 제가 다녀올게요.”
“너 혼자서? 위험하지 않을까?”
“호호호, 저 유선이에요. 원숭이 따위에게 당할 리 없어요.”
“하지만 여기 이 사람이 좀 걱정스럽구나.”
신녀가 두 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선명한 다른 점과는 달리 몹시 흐릿했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물의 탐색 능력이 잘 안 통할 정도로 매우 강력하다는 뜻.
그러니 더더욱 유선이 가봐야 했다.
신녀를 지키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다녀올게요.”
* * *
신녀궁은 매우 넓은 데 비해 인적이 드물었다.
벌써 몇몇 구역을 돌아봤지만 신녀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지 못했다.
확실히 신비한 곳.
절대경에 돌입한 자신의 기감이면 웬만한 곳은 탐색이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그게 먹히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니 발품을 팔아가며 한 곳 한 곳 뒤질 수밖에 없었는데….
“겁도 없이 성지에 침입한 도둑놈이 누군가 했는데… 바로 대인이셨군요.”
컴컴한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원숭이가 걸음을 멈췄다.
“하하, 무악 여협도 여기 소속이었나? 의외인걸. 같은 신교라지만 천마와 신녀는 서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유선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고, 더 이상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뭐라고? 지금 제정신인가? 감히 황실의 특사인 나에게 그따위 말투로…!”
“신녀궁에 발을 들인 이상 특사 아니라 황제 할아비라도 상관없어! 당장 꺼져!”
“네가 정녕 미친 게로구나!”
원숭이는 참지 않았다.
원래가 포악한 성격인 데다 최근 자존심마저 하늘을 찌르니 참고 넘길 리 없었다.
쌔애액~
제천대살 시절 명성을 날렸던 쾌검이 날았다. 공력이 급상승한 덕에 그야말로 섬전 같은 빠르기.
타앙!
하지만 유선도 만만치 않았다.
허리춤에서 둥그런 마륜(魔輪)을 꺼내어 검을 쳐냈다.
“역시 천마의 제자라 이거냐? 젊은 것이 제법이구나.”
단 한 번 부딪힌 것이지만 서로를 파악하는 데 충분했다.
공력은 원숭이가 월등했지만 검을 쳐낸 유선의 실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부딪히는 순간 륜의 회전을 이용해 힘을 분산시켜 공력의 차이를 극복한 것인데, 말이 쉽지 사량발천근과 이화접목의 묘리가 집약된 놀라운 솜씨였다.
재미난 것은 유선과 원숭이 모두 새로 공력을 쌓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황실에서 영약을 밥 먹듯 복용하고, 천일살 비술로 수백 명의 혈정을 흡수한 효과였다.
반면 유선은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마가 지극정성 키워준 결과.
물론 두 번의 삶을 살면서 두 번이나 절대경에 올랐던 경험이 제일 크게 작용했지만 말이다.
“제법인 줄 알았으면 빨리 돌아가시지.”
“하하하, 겨우 검 한번 막아 놓고 기고만장이구나.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원숭이가 다시 쇄도했다.
오른손으로는 극음의 기운이 담긴 쾌검을, 그리고 왼손으로는 극양의 철사장.
문무대에 체포될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 위력이 쏟아졌다.
탕탕탕~
유선의 마륜도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공력에서 밀렸기에 초식에서 우위를 점해야 했고, 원숭이가 한 번 움직일 때 유선은 두 번 세 번을 움직여야 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유선은 그것을 해냈다.
자신이 늘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는 무공의 천재인 것이다.
“이… 이것이!”
원숭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혈교의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혈교의 무공이라면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꿰차고 있는 유선 앞에서 그 무공을 쓰다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
휘익, 샤악, 타타탕~
원숭이의 초식을 훤히 읽은 유선이 거침없이 치고 들어왔다.
공력의 차이 그딴 것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순식간에 원숭이의 몸에 서너 개의 혈선이 그어졌고, 급기야 쥐고 있던 검마저 놓치고 말았다.
“너! 천마에게 이 무공도 배운 것이구나!”
단단히 착각한 것이고, 또 이미 늦은 후회.
기왕 이리된 것… 끝장을 낸다는 생각으로 유선이 마륜을 던졌다.
휘리리릭.
공중에서 대여섯 번의 변화를 보인 마륜이 갑자기 두 개로 갈라지더니, 각각 원숭이의 천령개와 심장을 향해 폭주했다.
“막아!”
이미 전의를 상실한 원숭이가 할 수 있는 건 절박한 외침뿐.
하지만 그 짧은 외침으로 충분했다.
내리꽂는 마륜보다 더 빠른 속도의 무언가가 쏘아져 온 것이다.
쾅, 콰앙!
원숭이의 몸에 꽂히기 직전, 마륜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여태껏 석상처럼 미동도 않던 음혈인이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