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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32화 (109/210)

132화. 개와 원숭이 (5)

* * *

이것 참… 진짜 괴물이군.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유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륜이 폭파되는 순간 그녀에게까지 여파가 미친 것이었다.

“야! 이 미친 것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네가 지금 누구를 죽이려고 한 건지 아느냐?”

“몰라. 안 죽었으면 된 거지. 아쉽게도 말이야.”

“마교는 노인이나 어린애까지 다 미쳤다더니 사실이었군. 좋다. 막 나가기로는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진 않아! 음혈인. 저년을 죽여!”

‘죽여’라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얼음장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음혈인의 손이 가슴에 막 닿으려는 찰나, 죽을힘을 다해 몸을 눕혔다.

휘익.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는 냉기.

미추공을 써서 뒤로 미끄러지는데 다시 한번 음혈인이 손을 뻗었다.

치잇.

유선은 물러서는 걸 포기하고 오른발을 쿵 디뎠다.

다행히 천마군림보는 효과가 있었고, 음혈인이 휘청거리며 공력이 흩어졌다.

공격이 먹힌 것이지만 유선의 표정은 어두웠다.

천마군림보에 기대했던 것이 꽤 컸던 것이다. 최소한 바닥에 쓰러지거나 한동안 몸을 못 펼 줄 알았는데… 효과는 고작 한순간.

역시 소림 방장을 압도했다는 건 헛소문이 아니었다.

소림 방장도 못 이긴 괴물을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예전 무공을 잃기 전에도 자신은 소림 방장에 한참 못 미쳤으니까.

하지만… 싸움은 공력만 갖고 하는 게 아니다.

난 더 이상 혈교의 미친개가 아니지만, 천마신교도 미친 걸로는 뒤지지 않아!

유선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온몸으로 검은 아지랑이를 흩뿌리며 돌진했다.

극음의 냉기가 얼음 창처럼 날아왔지만 살이 얼어 터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펑, 펑, 펑!

이성을 상실한 음혈인이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공력의 열세를 현란한 초식과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극복하려는 유선.

냉기 덩어리 하나가 그녀의 허벅지를 스칠 때, 음혈인은 무려 십여 차례 마기 덩어리에 강타당했다.

저… 저년 전투 감각이 엄청나구나!

원숭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예전 동료 중에도 저런 미친 싸움꾼이 있다는 걸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무식하게 공격해서 어쩌자는 거야? 붙잡아서 움직임을 봉쇄해! 손목이든 옷깃이든 뭐든 잡으라고!”

원숭이의 명령은 매우 적절했다.

음혈인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금나수를 펼쳤다.

휘리릭, 탁.

막 음혈인의 하단을 파고들던 유선의 소매가 잡혔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어깨까지 옷을 뜯어내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심장이 철렁했던 순간.

이제는 작전을 바꿔야 했다.

슈우욱~

갑자기 유선의 주변에서 바람이 이는 것 같더니, 눈동자가 짙은 회색으로 변했다.

그에 따라 지금껏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아지랑이도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탈색되었다.

허무.

여타의 마공과 천마신공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허무’였는데, 천마신공이 사 단계 이상에 진입해야 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유선은 사 단계를 연마하지 못했는데… 그저 천마가 구결을 뇌에 새겨 넣었을 뿐.

“저년이 요상한 수를 쓰려고 한다. 어서 공격해!”

이상한 낌새를 느낀 원숭이가 음혈인을 재촉했다.

뼛속까지 얼릴 듯한 음기가 뿜어졌고 유선을 감싸고 있는 회색 마기와 충돌했다.

“허억!”

신음은 유선의 입이 아닌 원숭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강력한 음혈인의 공격이 회색 마기에 닿은 순간 성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놀라든 말든 유선은 용수철이 튕기듯 음혈인을 공격했다.

휘익, 퍽, 타악, 콰아앙!

장력과 장력이 맞부딪치고 주먹이 서로의 몸을 가격했다.

극음의 성질이 발현되지 못하자 음혈인과 유선은 동수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고, 오히려 유효한 공격을 더 많이 가하는 건 유선이었다.

원숭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째서 점점 더 강해지는 거지?

이대로 두면 안 되겠는데… 내가 끼어들 수 있을까?

잔뜩 긴장하고 빈틈을 노리던 중, 무언가를 본 원숭이의 눈이 반짝였다.

후후, 그럼 그렇지.

제대로 무리를 하고 있는 거구나!

유선의 입가로 핏물이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도 피가 쏟아졌다.

이러면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채 삼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과연, 십여 초가 흐르자 음혈인이 뿌리는 장력에 냉기가 흐리기 시작했다.

유선의 천마신공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증거.

“음혈인, 지금이다. 밀어붙여! 저년도 이제 끝이다!”

파자자작.

사방 바닥에 온통 살얼음이 끼었다.

음혈인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력한 음기를 뿜었다.

유선의 코에서 흐르던 피도 얼어붙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입술도 얼어붙을 거라 생각한 유선이 마지막 힘을 짜내 외쳤다.

“언제까지 지켜만 볼 겁니까!”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원숭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흥, 죽음이 코앞이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대로 놀려주려고 막 입을 벌리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수천 장 깊이의 지하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

천천히 고개를 돌린 원숭이의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거구의 누군가가 음혈인 등 뒤에 서 있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명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고 있다고!”

“네가 내 말을 귀담아들었다니… 의외구나.”

“쓸데없는 소리 마시고 그거나 처리해주세요. 전…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후후, 약해 빠진 것.”

천마는 음혈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모든 것을 얼리는 음기마저 천마에겐 영향을 못 미쳤다.

자, 잠깐. 이거 잘못하면….

원숭이의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려 했다.

음혈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원래도 붉던 눈이 점점 더 시뻘게졌다.

극도의 위기를 느끼고 자폭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안 돼! 멈춰!”

원숭이는 음혈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동료가 분명한 천마와 싸우면서 아까운 음혈인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데다, 폭발에 잘못 휘말리면 자신도 죽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원숭이는 임시 명령자에 불과했고, 이런 초비상 상황에선 말이 먹히지 않았다.

“천마! 당신이 먼저 멈추시오. 잘못하면 우리 다 죽어!”

음혈인에게도 먹히지 않는 말이 천마에게 먹힐까?

천마는 들은 척도 않고 어깨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줄 뿐이었다.

파르르르르르르.

사시나무 떨듯 발작을 하던 음혈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후, 결국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신녀궁이 통째로 무너질 정도의 큰 폭발이어야 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열기가, 아니 음혈인이니 냉기일지도 모르지만, 사방을 휩쓸어야 했다.

하지만 소리만 거대할 뿐 별다른 충격이 없자 원숭이는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그리고는 보았다.

음혈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면 거대하고 파괴적인 폭발의 힘이 천마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거대한 바다를 빨아들이는 용오름같이… 폭발의 열기가 소용돌이치다 사라졌다.

이… 이럴 수가!

원숭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압도적인 느낌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딱 한 명… 자 혈승에게서만 느꼈던 것이데.

역시… 천마는 자 혈승인 건가?

“처, 천마. 다… 당신은…?”

“원숭이. 어째서 벌써 나타난 거냐?”

“어… 어째서라니… 무슨 말씀을…?”

“우리가 약속한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너희는 어째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지?”

“아, 아니… 그것은….”

“돌아가서 전하라.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엔 만남을 허락하지 않겠노라고.”

천마의 몸이 짙은 회색으로 물들더니 어둠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멍하니 지켜보던 원숭이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모습은 짙은 회색 속에서 홀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였다.

* * *

원숭이가 음혈인의 시체를 안고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유선은 천마동으로 향했다.

온몸이 부상투성이에 무리하게 천마신공을 시전한 여파로 죽을 것만 같았지만, 그럼에도 쉴 수가 없었다.

천마에게 감사를 표해야만 했다.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의 요청대로 연기를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 천마는 거대한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지금은 특히나 고독해 보였는데….

“감사드리러 왔어요.”

“무엇에 대한 감사 말이냐?”

“신녀궁에 와 주신 거요.”

“널 구하러 간 게 아니다. 신녀를 지키는 건 천마의 의무. 지난번과 같은 일이 또 생기게 할 순 없으니.”

지난번 일이란 유선이 신녀를 죽일 뻔했던 일.

비꼬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원숭이를 속여 주신 것도 감사해요.”

“흥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서… 효과는 있을 것 같으냐?”

“분명히 있을 거예요. 원숭이를 알아본 것,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 압도적인 강함… 자 혈승 외에는 이것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혈승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 아니냐?”

“자 혈승은 예외입니다. 그의 혈령은 누구도 감지할 수 없어요. 아마도 격의 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겠죠. 마지막에 눈동자를 붉게 빛내 주셨던 것, 그걸로 충분했을 겁니다.”

천마는 말없이 의자 손잡이만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장난질이 성공해서 그들이 나를 자 혈승으로 오해했다 치자.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시간을 버는 거죠.”

“시간을?”

“네. 황실, 무림맹, 흑사련을 장악한 후 그들의 눈길은 자연스레 본교로 쏠렸어요. 만약 여기에 혈승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즉각 침공해올 겁니다. 하지만 천마신교에도 혈승이, 그것도 자 혈승이 있다고 믿는 순간 어떻게든 이곳과 거리를 두려고 할 겁니다.”

“그들의 침공이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저는 천마가 아니니까요.”

“흥, 못난 것. 어쨌든… 시간을 벌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결국 싸움은 피할 수 없을 텐데.”

“싸워야죠. 하지만 준비를 갖추고 싸우면 더 좋잖아요? 싸우기 전 몇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주의협은 어디 있는가? 자 혈승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리고?”

“강한월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죠.”

“흥, 그 어린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순간 천마의 표정에 생기가 돈 걸 유선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활약에 대한 기대인지 아니면 그냥 개인적인 호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건 강한월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건 이로써 더 분명해졌다.

천마의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은 정말로 드무니까.

“지금까지 혈교에 맞서 온 것이 바로 그 어린 강한월입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약해.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또다시 태사의 손잡이를 두드리던 천마가 슬며시 덧붙였다.

“언젠가 그와 연락이 닿게 되면 전하라. 강해지고 싶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한 유선이 몸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 쓰러져서 자고 싶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좀 쉬어야겠어요. 부상을 입었다고 수련을 빼 주실 것 같지도 않으니.”

유선이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천마동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천마가 결국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내 제자라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거야.”

유선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아무 말 없이 다시 걷는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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