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원로 회합 (1)
* * *
장강 위를 떠가는 작은 조각배.
사공은 열심히 노를 저었고, 뱃머리에 앉은 노인과 중년인은 흐르는 강물을 감상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노인의 눈썹 사이에 그려진 내 천(川) 자가 사라질 줄 모르자 중년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좋을 리가 있겠느냐? 이런 회합이 영 마땅치 않구나. 솔직히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릴까 고민 중이었다.”
노인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당한 화산파 장문인이 신분을 숨기고 몰래 잠행을 하는 것도 기가 찰 일인데, 더군다나 회합의 정확한 목적과 구성원도 미리 알려주지 않으니.
“그럼 뱃머리를 돌리라고 할까요?”
중년인이 뱃사공을 부르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흥, 고얀 놈. 네가 사부를 놀리는구나. 마땅치 않아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노인이 중년인을 향해 눈을 흘겼다.
때로는 얄밉기도 했지만, 그래도 화산 장문인 홍진은 제자 육지성을 가장 신임했다.
지금의 장난도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노력일 테고 말이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한다는 말이냐? 허허, 목적지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해서 원.”
“아마도 저기 보이는 저 섬이 아닐까 싶습니다.”
육지성의 예감이 맞았다.
뱃사공은 저만치 떨어진 작은 섬을 향해 배를 몰아갔다.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답게 가꿔진 섬.
아마도 어느 부자가 별장으로 이용하는 개인 소유의 섬 같았다.
잠시 후 배가 섬에 닿았고, 기다리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인사를 올렸다.
“대화산의 장문 어른께 인사 올립니다. 소녀는 민정화라 합니다.”
“흠흠, 내 흔쾌히 인사를 받기엔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군. 소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화산의 존장을 이렇게 모시게 된 점은 사과드립니다.”
“글쎄… 경우에 따라서는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닐 수 있네. 물론 다른 경우에는 내가 소저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거고.”
“제가 어찌 감히 어르신의 감사를 기대하겠습니까. 다만 후회하실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홍진 장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웬 젊은 여자가 나왔길래 언짢기도 하고 무시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정중하면서도 당당히 이야기하는 걸 보니 만만치 않은 여인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하지만 이 여인의 정체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자, 소저의 요청대로 내가 한달음에 달려왔으니 이제 말해보게. 내 사형… 위무진 맹주가 있는 곳을 안다는 게 사실인가?”
“물론 사실입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홍진 장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격동, 걱정 그런 것을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위문진과 홍진 사형제는 정이 깊었다. 정파 무림의 맹주가 되어 잘나가던 사형이 갑자기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자 홍진 장문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사형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는데, 무림맹이 위무진을 무림 공적으로 발표한 것도 모자라 동창까지 나서서 역모의 죄를 씌운 것이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민정화가 즉답을 피하자 발끈한 것은 육지성이었다.
“이보시오, 민 소저! 어서 장문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겠소? 그 답을 듣기 위해 화산에서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거라는 말이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이미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신 터라….”
“그자들이 한 달을 기다렸든 일 년을 기다렸든 내 알 바 아니오! 그들도 대화산의 장문인을 기다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고.”
육지성의 말은 확실히 지나친 감이 있었다.
민망해진 홍진 장문이 육지성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지성, 말이 지나치구나. 일단 들어가 보겠다. 누군지는 모르나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홍진 장문 입장에선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속는 셈 치고 따라 들어가겠지만, 만약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위무진 사형을 찾는 것과 관련 없다면 크게 호통을 치고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정화를 따라 정원의 오솔길을 걷자 작지만 아름다운 집이 나타났다.
누군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얼핏 보니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아, 곤륜일검 대선배 아니십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강호에 나오셨으면 연락을 주시지 않고요.”
홍진 장문은 얼른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자신이 대화산의 장문이더라도 전대에 천하오대검수로 이름을 날린 곤륜일검 앞에선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었다.
“쉿! 말조심하게. 함부로 대선배라는 호칭을 쓰다니.”
혹시 누가 듣진 않았을까 당황하는 곤륜일검.
“하하하, 선배가 대선배가 아니면 도대체 누굴 대선배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런데 왜 문 앞에서…?”
“음… 자네가 언제 오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하셔서 선착장에 가 보려던 참이네.”
“아니 누가 감히 대선배님께 그런 심부름을…?”
곤륜일검이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홍진 장문과 육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몇 걸음 못 가 얼음처럼 굳어버렸는데….
“뭐 하나? 왔으면 어서 들어오지 않고.”
이 목소리는 곤륜일검보다도 한참 선배인 천산 백응신장의 것이었고.
“홍진. 재기 넘치는 아이라 생각했더니 결국 장문인이 되었구나. 늦었지만 축하한다. 호호호.”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주름이 자글자글한 저 여승은 전전대 아미파 장문 수월 사태.
“그런데 같이 온 아이는 누군가? 믿을 만한 아이인가?”
중년의 육지성을 아이라고 부르는 노인은 삼십 년 전 천하제일도객으로 추앙받던 혼천도였다.
곤륜일검이 왜 ‘대선배’라는 호칭에 경기를 일으켰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기서는 곤륜일검이 막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기 상석에 앉은 사람은…?
“무림 말학 홍진이 소요자 대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홍진 장문의 머리가 절로 숙어졌다.
대선배라는 호칭으로도 부족한 사람.
소림의 송목 대사와 더불어 강호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무당의 소요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장문인께선 일파를 대표하는 분인데 그렇게 과한 예를 차릴 필요 없소. 먼 길 피곤하실 텐데 우선 편히 앉으시오.”
이렇게 황송할 수가.
홍진 장문은 얼른 탁자의 말석으로 가 앉았고, 육지성은 감히 앉을 생각은 못 하고 뒤로 가서 시립했다.
“자 이제 다 모이셨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민정화가 앞으로 나섰다.
소요자를 비롯한 원로들이 잠자코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인정을 받은 모양.
“홍 장문인 외의 다른 분들께는 대략의 상황은 이미 설명을 드렸으니 곧바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뭐라고? 나한테도 설명을 해줘야지!
홍진 장문이 항의를 하려고 했지만 기라성같은 선배들 앞에선 어림도 없는 일.
“최근의 여러 사태에 대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해서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선 소림 혈사에 대해 소요자 어른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소요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소림을 방문했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송목 선배와 방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니 믿어도 좋을 거요.”
황태자가 도움을 요청한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삼황자를 비술의 노예로 만들려는 시도, 황태자와 장준검이 소림으로 피신한 것, 그리고 동창과 흑사련이 괴인들을 데리고 쳐들어온 것까지 제법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중간중간 원로들의 입에서 침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황실과 소림. 국가와 무림을 상징하는 두 곳이 이렇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특별히 관심이 끌리는 것은 강한월에 관한 것이었다.
중요한 고비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
게다가 홍진 장문을 제외한 모두는 신주의협의 부탁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이다.
“신주의협이 제자 강한월을 도와주라고 부탁했던 것. 바로 이 일이었군요.”
“그럴 거요. 아직 젊은 후배가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니… 무림의 선배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소요자가 설명을 끝냈다.
이로써 황실과 흑사련이 괴조직에 장악됐다는 건 분명해졌다.
하지만 정작 원로들이 더 궁금한 것은 황실과 흑사련이 아니었다.
여기 모두는 정파의 인물들이니까.
“여러 선배님들이 진정으로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궁금하시겠죠?”
“잠깐, 민 소저. 지금 무림맹도 괴조직에 장악됐다는 말인가? 무슨 그런 억측이. 신임 맹주는 정파의 기둥인 남궁세가 태상가주 아닌가. 위무진 전임 맹주는 누명을 썼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남궁세가를 의심하는 건 좀 심한 것 같은데?”
“혼천도 선배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강호인들은 남궁세가를 철석같이 믿고 있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남궁의 이름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 수백 년간 강호를 위해 헌신하며 얻어진 것이지.”
“맞습니다. 제 입으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요. 그래서 본인을 직접 모셨습니다.”
본인?
홍진 장문의 귀가 번쩍 뜨였다.
무림맹 사건의 당사자라면… 설마?
그 ‘설마’가 맞았다.
스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실종되었던 자신의 사형, 무림맹주 위무진이었다.
“사형!”
홍진 장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 옆에 서 있던 육지성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위무진은 살짝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선배들이 계시니 사적인 회포는 나중에 풀자는 뜻.
“여러 선배 고인들께 인사 올립니다. 한때 무림 맹주였던 위무진입니다.”
“위 맹주.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그간 고초가 많았죠?”
수월 사태를 시작으로 다들 한마디씩 건네며 따뜻하게 맞아주었는데, 위무진은 웃으면서 응대하지 못했다.
“명색이 맹주라는 자가 맹을 보호하지 못하고 못난 꼴을 보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맹주의 잘못은 아닐 것 같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반란이 일어났고 저는 죽을 뻔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지요. 그러고 나니 저는 무림 공적이 되어 있었고요.”
“그 반란을 일으킨 게 누군가? 정말로 그….”
“네, 맞습니다. 남궁세가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남궁세가 태상가주인 남궁윤이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는 황제가 암살당하고 꼭두각시가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보다 이것이 더 충격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남궁세가는 간혹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대의는 지키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맹주. 내가 맹주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소. 남궁윤 그자가 고수이긴 하지만 맹주를 위협할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로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말이오? 다수가 공격했던 것이오? 아니면… 독이라도…?”
곤륜일검의 질문은 타당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정파 무림인 중 위무진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신주의협의 뒤를 이어 맹주가 된 것이고.
소림의 방장 대사도 반 수가 밀리는 마당에 남궁윤이? 어림도 없을 텐데….
“남궁윤 혼자였습니다. 기습도 아니었고 독 같은 비겁한 술수를 쓴 것도 아니고요. 정면 대결에서 밀렸습니다. 그것도 형편없이 일방적으로.”
“하지만 어떻게? 남궁윤 그자는….”
“아마도 지금껏 실력을 감추고 있던 걸 테지요.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위무진의 표정이 심각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한 명 한 명을 돌아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궁윤은 사실… 남궁윤이 아니었던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