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천하제일 거부 (1)
* * *
흡입 장력을 날려 비둘기를 낚아챈 건 광군영, 그리고 지금 돌돌 말린 종이를 펼쳐 읽고 있는 건 제갈윤이었다.
“섬에서 있던 일을 상세히도 적었네요. 역시 민 소저와 제 생각이 맞았네요. 육지성 이자는 혈교의 세작이었어요.”
도망친 위무진 맹주가 어떻게든 화산파와 연락을 취하려 할 거라는 건 혈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 따라서 홍진 장문 주변에 분명 세작을 심었을 거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혈노를 만드는 비술이 있으니 피가 적합한 사람만 찾으면 충성스런 세작으로 만드는 건 쉬운 일.
장문인을 수행하는 대제자 육지성이 거기에 걸려든 것이다.
“글씨는 어때? 잘 흉내 낼 수 있겠어?”
“이런 건 일도 아니라고요.”
제갈윤이 작은 붓을 꺼내더니 새로운 종이에 쓱쓱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체는 육지성의 것과 흡사했는데 내용은 전혀 딴판. 척혈단에 대한 것을 숨기고 적들에게 혼란을 주는 거짓 정보들이었다.
“비둘기야. 고생 좀 해주렴.”
바꿔 치기 한 전서를 매단 비둘기가 힘차게 날아갔다.
거짓 정보가 얼마나 효과를 낼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척혈단 정보가 새는 것을 막은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그나저나 육지성 그자는 어떻게 되는 거야?”
“위 맹주께서 홍 장문에게 귀띔을 하셨을 테니 장문인이 알아서 방법을 찾겠죠. 폐관 수련 핑계로 감금을 시키든가 할 거예요.”
“혈노 비술을 푸는 방법도 빨리 찾아졌으면 좋겠군. 삼황자의 일도 있고 하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이 일도 잘 끝났으니 저희도 빨리 복귀해요. 민 소저가 자리를 비워서 저희가 빨리 본부를 지켜야 한다고요.”
“그래야지. 그런데… 민 소저와 영영, 청보는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간 거야?”
“어? 모르셨어요? 원로 회합 끝나자마자 중요한 일 하러 갔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냐고?”
“돈 구하러 갔어요.”
* * *
소주는 항주와 더불어 중원 최고의 향락의 도시.
최고급 주루와 객잔 등 이름난 요릿집이 넘쳐났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부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니, 허름한 뒷골목 안에도 숨어 있는 맛집들이 있는 것이다.
달랑 탁자 네 개 놓인 작은 식당이지만 송파파의 우육탕집도 그런 곳에 속했다.
붐비는 시간이라면 족히 반 시진은 줄을 서야 뜨끈한 국물 맛을 볼 수 있는 곳.
지금만 해도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식당에 들어서는 초로의 사내는 빈 탁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이것 참, 이 시간에도 자리가 없으니.”
입구에 서서 잠시 고민하던 사내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머리 허연 노인이 홀로 식사하고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실례가 되지 않으면 합석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순간 이미 실례가 된 것이오. 하지만 어쩌겠소, 가게의 손님을 내가 쫓아낼 수도 없으니. 앉으시구려.”
허허, 참 까탈스러운 노인일세. 그냥 앉으라고 하면 될 것을.
“어쨌든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소주까지 와서 송파파의 우육탕을 못 먹고 갈 뻔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당연히 자리가 나는 것을. 그리고 보아하니 세상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먹어 보신 듯한데… 우육탕 한 그릇 못 먹으면 또 어떻고?”
“어디 이게 보통 우육탕입니까? 이래 봬도 천하제일의 거부가 즐겨 먹는 별미인 걸요.”
뭔가 맘에 안 들었던 것일까?
탕국물을 듬뿍 떠서 입으로 가져가던 노인이 숟가락을 멈췄다.
“별미인 것은 맞지만, 그 천하제일의 거부라는 말은 사실과 다르군.”
“그래요? 아니, 천하전장의 주인이신 원보 대인이 천하제일의 거부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제일이란 말입니까?”
“이거 왠지 놀리는 것으로 들리는군. 하오문의 민 문주가 가진 주루와 객잔이 천하 각지에 삼천 개가 넘고 장원과 별장도 셀 수가 없는데 어찌 돈놀이나 하는 천하전장 따위가….”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천하전장만 해도 어마어마하지만 익명으로 소유하고 계신 광산과 소금 유통권도 그 못지않을 텐데요?”
“그렇게 따지자면 세상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하오문에도 어마어마한 사업이 있지 않소?”
“아, 됐습니다. 듣는 귀도 많은데 더 이야기하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허허허.”
천하전장 원 장주가 여차하면 흑시 이야기를 꺼낼 듯하자 하오문주 민택선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상대방이 더 부자일 거라며 우겨대는 것은 이 둘의 오랜 습관이자 유흥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시간을 내어 만났는데, 써도 써도 끝이 없을 억만금을 소유한 거부의 마음을 이해해줄 것은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민 문주, 그런데 무슨 일이오? 지난번 만난 후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급하게 다시 만나자고 하고? 새로운 사업 정보라도 있는 거요?”
“사업은 무슨… 제가 어디 원 장주님 만나서 일 이야기를 하던가요?”
“그러니 더 궁금하군. 이 늙은이의 잘생긴 얼굴이 그리워서 만나자는 것도 아닐 테니.”
“실은 장주님을 소개해달라고 조르는 사람이 있어서요.”
“소개?”
원 장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매우 드문, 아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고로 거부들은 주변에 꼬여 드는 사람들 때문에 항상 골치가 아프고, 그러니 사람을 소개받는 건 청탁 못지않게 싫어하기 마련.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민 문주가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그래, 나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원 장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딸아이입니다.”
“민 문주의 영애? 하오문과 그 흑… 그곳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다는 민 소저? 그동안 꽁꽁 숨겨놓고 있더니 웬일이오?”
“뭐 일이 그리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볼 용의는 있으시고요?”
“하하하, 당연하지 않소. 천하에서 제일 영특한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영광이지.”
* * *
천하전장 원 장주와 민정화가 만나는 자리에 하오문주 민택선은 동석하지 않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모든 일을 딸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선 상황이고, 딸이 하는 일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고 철저히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원 장주가 묶고 있는 장원에 찾아간 것은 민정화, 그리고 소영영과 위청보.
민정화가 이들과 동행한 것은 나름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효과는 장원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나타났다.
“앗! 위청보 소협 아니십니까?”
“하하, 원진탁 공자. 그간 안녕하셨어요?”
민정화는 원 장주가 손자 원진탁과 함께 소주에 왔다는 걸 미리 알았다. 그리고 천하전장 사람들이 은원이 확실하다는 것도. 납치당할 뻔한 원진탁을 구해준 것은 분명 문무대. 강한월이 얼굴을 내밀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위청보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을 거였다.
게다가 이것은 민정화가 강한월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신주의협과도 관계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원 장주가 평생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신주의협이라지 않는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민정화 입장에선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온 셈이었다.
강한월은 잘 지내는지, 진가린은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질문이 끝이 없는 원진탁에게 위청보와 소영영을 맡기고, 민정화는 홀로 원 장주와 면담을 시작했다.
“민 소저, 오랜 전부터 만나보고 싶었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고 영민해 보이시는구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주님. 그리고 말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허허, 그래. 자네 부친과는 오랜 친구이니 말을 놓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나보다 몇 배는 더 바쁠 자네가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건가?”
원 장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향후 중원 상계를 좌지우지할 것이 분명한 젊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위청보까지 데리고 와 밑자락을 까는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장주님께는 일상적인 일이지요. 실은 자금을 융통 받고 싶어서요.”
“돈을 빌리겠다? 나에겐 일상적인 업무가 맞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이기도 하군. 하오문이 가진 부가 천하전장보다 못하지 않은 걸 후계자인 자네가 모르는 건가?”
“하오문도 자산은 좀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 당장 현금화를 할 수 없는 부동산입니다. 해서 장주님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지요. 하오문이 가진 부동산을 담보로 드릴 테니 현금을 융통해주세요.”
“허허, 그런 일이라면 안 될 것 없지. 자금을 융통하는 게 원래 천하전장이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담보는 필요 없다네. 자네의 신용이면 얼마든지….”
“아니요, 담보를 받으셔야 할 거예요. 제가 빌리려는 자금이 좀 크거든요.”
“아주 큰 사업을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도대체 얼마나 필요하길래 그러나?”
원 장주는 담보 없이 돈을 빌려줄 생각이었다.
하오문의 후계자에겐 오억 냥 정도도 그냥 빌려줄 수 있었다. 이번 일을 통해 하오문의 후계자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더불어 손자를 구해줬던 강한월의 은혜도 갚을 수가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민정화의 말에 원 장주는 찻잔을 놓칠 뻔했다.
“천하전장이 가용할 수 있는 자금 전부를 원합니다.”
“뭐, 뭐라고?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천하전장의 고객 중 그 누구도 전체 자금의 일 할 이상을 빌려 간 곳은 없는데… 이십 대의 젊은 여인이 자금 전체를 빌리겠다고?
황당한 배포는 둘째치고 세상에 그 정도로 큰돈이 필요한 사업이 있다는 말인가?
나라를 사려는 게 아닌 이상….
“자네… 지금 말하는 게 얼마나 큰 금액인지는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천하전장의 정확한 자금 규모를 알 수는 없지요. 외부에 드러난 정보로 유추해 볼 때, 석 달 이내에 융통 가능한 현금은 대략 이천오백억 냥 정도가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이것 참… 농담이 아닌가 보군.
민정화가 언급한 액수는 천하전장의 실제 상황에 얼추 근접했다.
분명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했다는 것. 즉, 상대가 진지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사업을 하려는 건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게 천하전장과 장주님을 위해서도 좋으니까요.”
큰 장사꾼은 이런 일로 상대를 속이지 않는다.
지금 민정화가 한 말로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원 장주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럼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 세 가지만 묻겠네. 첫째, 자네 부친 민 문주가 허락한 일인가? 둘째, 신주의협 혹은 그의 제자 강한월과 관계가 있는가? 셋째, 융통한 자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아버님은 모르십니다. 상의를 드리려고 했지만 듣지를 않으시더군요. 저에게 다 일임했으니 알아서 하라고만 하셨습니다.”
딸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민 문주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오문의 모든 자산을 걸고 이렇게 큰 판을 벌이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텐데….
“두 번째 질문의 답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더 상세히는 말할 수 없는 거고?”
“죄송하게도… 그렇습니다.”
부족한 답이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신주의협과 관계된 일이라면 최소한 도의에 어긋나는 사업은 아님이 분명하니까.
“좋아, 그럼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게. 민 문주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천재인 자네이니 분명 사업의 성공 확률은 분석을 했을 것 아닌가?”
“당장은 이 할입니다. 장주님이 자금을 융통해주시면 삼 할로 올라갈 것이고요.”
“자네… 미쳤나?”
오랜 벗의 딸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원 장주의 심경이 딱 그랬다.
미치지 않고서야 성공 확률 삼 할인 사업에 하오문의 모든 것을 걸겠다고?
도대체 무엇일까?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이 여인을 미치게 만든 것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 내일 다시 찾아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