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36화 (113/210)

136화. 천하제일 거부 (2)

* * *

천하전장 원 장주와 면담을 끝냈을 때, 위청보와 소영영은 뒤뜰에 있었다.

원진탁이 하도 졸라 대서 가볍게 비무를 해주고 있었던 것.

천하전장의 후계자와 친해져서 나쁠 게 없었기에 민정화는 그들을 놔두고 먼저 장원을 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하오문 소유의 객잔.

그곳 별채에 부친이 묶고 있었다.

“아버지. 저 다녀왔어요.”

“우리 딸, 수고 많았다. 그래 원 장주가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고?”

“전혀요.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하지만 워낙 어려운 요청을 드린 터라 즉석에서 답을 하진 못하시더라고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그랬구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봐라. 원 장주는 현명한 사람이니 분명 올바른 판단을 할 거야.”

“네, 기다려야죠. 저도 오늘 당장 결론이 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민 문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피곤할 테니 좀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서려는 문주를 민정화가 불러 세웠다.

“아버지.”

“왜 그러냐?”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거예요?”

“허허, 새삼스럽게. 내가 언제 너 하는 일에 간섭한 적이 있더냐?”

감사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흑시의 일을 맡긴 후에도, 그리고 이후 하오문의 운영까지 넘겨준 후에도 민 문주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맡겼다.

자신을 완전히 믿어주는 부친이 너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이 거대한 조직을 맡겨 놓고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고요. 말씀드렸잖아요. 하오문이 거덜 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그러니 더더욱 너의 판단을 믿는다. 우리 하오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최상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게 바로 너니까. 이런 일일수록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 괜히 고민만 더해질 뿐이니까.”

“그렇지만 상의나 조언 정도는….”

“정화야. 최고 결정권자의 자리는 언제나 힘든 거야. 그 결정에 따라 수만 명의 삶이 좌지우지되니까. 하지만 힘들어도 혼자서 견뎌내야 한다. 한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 그 이후에도 계속 의지하게 되는 거야. 네 할아버지도 나에게 전권을 넘기신 이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단다.”

정말 그랬던가?

아마 그랬을지도… 하지만 부친이 하오문을 맡은 건 삼십 대 중반 이후였다.

지금의 자신과는 나이와 경험에서 차이가 많았고, 게다가 회귀자와 같은 문제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고마워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헷갈려 하는 딸을 남겨두고 민 문주는 방을 나갔다.

이제 정말 일은 거들떠도 보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후계자를 강하게 키우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입가의 미소와는 달리 눈빛이 애잔한 것을 보니, 본인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임시 집무실로 사용하는 응접실에 들어가니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문주님.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누구…?”

“마장(馬場)을 운영하시는 곡 대인이라고… 며칠 전에 약속을 잡은 분입니다.”

“아, 그랬지. 허허, 나이를 먹으니 건망증이 늘어서. 어서 이리로 모시게.”

일체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손님을 맞는 일만은 아직 손을 떼지 않았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법.

딸이 만나볼 필요가 있는 사람인지를 미리 확인하고 걸러내기 위해서였다.

민정화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오지랖을 부리는 것인데, 오늘 약속을 잡은 사람도 그런 부류였다.

향후 사업을 함께할 여지는 있어 보이지만 아직은 확인이 필요한 사람.

퍼벅 퍼벅.

손님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의 고수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민 문주도 하오문의 수장으로서 상당한 무공을 익힌 고수.

저만치서 들려오는 발소리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흠… 나이는 육십 정도? 나와 비슷하겠군.

무공을 익혔나? 이거 좀 특이하군. 발걸음 소리로 볼 때 상당한 수련을 한 것 같은데 공력은 거의 없다라… 주화입마라도 걸려서 공력을 잃은 건가?

민 문주는 좀 더 신경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무공을 익힌 상대라면 위험도가 올라가는 건 당연하기 때문.

그리고 상대가 문 앞 삼 장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문주의 표정이 변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늘 입가를 맴돌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웬만해선 여유를 잃는 적이 없는 그로서는 매우 드문 일.

아니, 근 이십 년 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주님. 곡 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집사가 기척을 넣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저, 문주님…?”

“안으로 모셔라.”

문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한번 고개를 갸웃한 집사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문주님. 여기 이분이 수일 전 약속을 잡으신 곡 대인이십니다.”

“알았으니 자네는 이만 가보게.”

“예. 그런데 차는 어떤 것으로 내올까요? 아니면 혹시 술상을….”

“되었으니 가래도 그러는구나!”

갑작스러운 호통에 집사의 얼굴이 벌게졌다.

손님에게 차 대접도 않겠다는 말씀이신가?

잠시 머뭇거리던 집사가 얼른 문을 닫고 사라졌고, 그제야 손님이 인사를 건넸다.

“초원에서 마장을 운영하는 곡가라 합니다. 하오문의 문주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중한 인사였지만 민 문주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손님 입장에선 제법 민망할 상황.

“하오문의 민 문주께서는 성품이 부드럽고 항상 예를 잃지 않는다 하던데… 소문이 꼭 사실인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것도 상대 나름 아니겠소?”

“상대 나름이라? 나는 예를 차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민 문주는 말없이 곡 노인을 응시했다.

눈빛으로 수백 가지 말을 쏟아붓고 있는 것 같았는데, 곡 노인도 마찬가지 눈빛을 쏘고 있었다.

“당신….”

“말씀하시죠.”

“왜 나를 찾아왔소?”

“내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 텐데요?”

“아직은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일찍….”

“문주님.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정보에 대해선 최고인 하오문의 문주시니 모르실 리 없지 않습니까? 황실, 무림맹, 흑사련… 그들이….”

“그만!”

“뭘 그만하라는 말입니까?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빨리 대응하지 않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시오!”

민 문주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낮지만 매우 단호한 목소리였는데,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걱정하지 않았으면 고함이라도 쳤을 것이었다.

“문주. 이해할 수 없군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저를 쫓아내 보십시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찾아올 테니!”

곡 노인의 목소리도 단호했다.

게다가 목소리가 컸다. 누가 들을까 걱정하는 것 민 문주뿐. 곡 노인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검기를 날리고 장풍을 쏘는 듯한 눈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깊은 한숨과 함께 먼저 입을 연 것은 민 문주.

“휴우. 어째서 지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문주. 이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 드십니까?”

“당신 말이 맞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오. 밖으로 나갑시다.”

* * *

원진탁과의 비무를 끝낸 소영영과 위청보가 객잔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표정이 밝았는데, 부탁을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응해준 것이긴 하지만 나름 즐거웠기 때문이다.

“원 공자도 꽤 자질이 있는 것 같아요. 천하전장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짬짬이 수련한 실력이 이 정도면.”

“그래. 만약 정식으로 무림 문파에 들어갔으면 지금쯤 이름있는 후기지수가 되었을지도 몰라.”

“에이, 천하제일 갑부가 되실 몸이 무림 문파에 왜 들어가겠어요? 그냥 취미활동 정도면 된 거죠.”

“그래. 아까 비무할 때도 검에 전혀 살기가 맺히지 않더라. 오히려 보기 좋았어. 우리 상황을 생각하면 좀 부럽기도 했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객잔에 도착했다.

민정화가 있는 별채로 가려고 후원을 가로지르다가 소영영이 발걸음을 멈췄다.

“소 선배. 왜요?”

위청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갑자기 멈춘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소영영의 안색이 갑자기 하얘지고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던 것.

“이, 이럴 수가. 갑자기 여기에 왜…?”

“무슨 일인데요, 선배? 일단 진정하시고 말을 해주세요.”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정화에게 가야해!”

그냥 걸어가도 얼마 안 걸릴 거리를 경공을 펼쳐 질주했다.

나는 듯이 후원을 건너뛴 소영영이 민정화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민정화!”

“아유 깜짝이야. 영영 언니, 왜 그래요? 무슨 일 났어요?”

책을 읽고 있던 민정화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일단 안심하는 소영영.

아니, 실은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정화야. 별일 없었니?”

“일이요? 보시다시피 아무 일 없는데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영영은 헐레벌떡 뛰어온 위청보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 좀 봐.”

소영영이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 안쪽에서 번쩍이는 선명한 붉은 점이 보였다.

“어? 그 반점은…!”

대번에 알아본 것은 위청보. 하지만 민정화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

“예전에 혈승 두 명이 문무대 수감실에서 탈출한 거는 알고 있지?”

“알지요. 그런데 그게 왜요?”

“내 팔에 생긴 이 반점이 그 일과 관계가 있거든.”

원숭이와 말이 탈출한 것은 실은 반쯤은 묵인된 것이었다.

물론 토끼가 살해되는 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탈출할 테면 해보라고 눈을 감아준 셈.

탈출한 원숭이와 토끼를 통해 숨어있는 나머지 혈승들의 위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고, 따라서 나름의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천천히 비술을 걸어 둔 것인데, 그들이 위치한 곳에 가까이 가면 비술을 건 시전자의 몸에 붉은 점이 나타나 알려주는 것.

비술은 소영영이 직접 건 것이고, 따라서 그녀의 팔에 점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잠깐만요, 언니. 지금 그 말은… 여기 이 객잔에 혈승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 원숭이인지 말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여기에 온 거야.”

“원숭이는 아니에요. 천마신교에 있는 유선 언니랑 계속 교신하고 있어요. 원숭이가 황실의 특사로 왔다가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은 계속 감시하고 있는데, 시간상 도저히 이곳 소주에 나타날 수 없어요.”

“그럼 말이겠군. 다행이긴 한데….”

원숭이가 무공을 회복하고 절대경에 들었다는 건 유선에게서 들었다.

강한월과 광군영이 없는 지금 원숭이와 싸움이 난다면 불리한 것은 이쪽.

말도 무공을 회복했을 수도 있지만, 원래 재물 담당인 말은 아무래도 훨씬 수월한 상대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정화야. 빨리 여기를 수색해야 하는데 우리끼리는 위험해. 하오문 고수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데… 여기 하오문 분들 중 그럴 만한 고수가 있을까?”

“아시다시피 하오문엔 고수가 많지 않아요. 게다가 이곳 소주 분타에는….”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우리끼리 해보는 수밖에.”

“잠깐만요. 소주 분타에는 고수가 없지만… 그래도 하오문 최고 고수가 마침 이곳에 있어요.”

“정말? 그 고수가 누군데?”

“제 아버님이요.”

소영영의 표정이 펴졌다.

당연한 것을 깜박 잊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하오문이 무력으로 이름난 곳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문주 정도면 분명 크게 도움이 될 테니까.

“잘됐네. 빨리 문주님께 가서 도와 달라고 부탁드리자.”

민정화, 소영영, 위청보는 문주가 있는 응접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문주가 없었다.

집사를 불러 물어봤지만, 그도 문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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