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천하제일 거부 (3)
* * *
“아니 문주님이 어디 계신지 집사님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평소와 다르게 민정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부친이 걱정되니 흥분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런다고 집사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리는 없었다.
“정화야, 너무 걱정하지 마. 최소한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으니까.”
소영영의 말이 맞았다.
응접실에는 어질러진 물건은 없었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싸우는 소리 같은 건 듣지 못했다.
“아버님을 찾아온 손님이 누구라고 하셨죠?”
“곡 대인이라는 분이십니다. 약속이 잡힌 건 삼 일 전이고요.”
“원래 아버님과 알던 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처음 만나는 분이었습니다.”
손님에게 차도 권하지 않고 문주가 어딘지 이상했다고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집사는 그냥 입을 닫았다.
확실치 않은 이야기 꺼내서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곡 대인의 거처가 어딘지는…?”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외지분인 건 확실하니 아마도 근처 객잔 어딘가에 묶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집사님은 하오문 조직을 총동원하여 문주님을 찾으세요. 문주님을 못 찾겠으면 곡 대인의 거처라도 찾아요. 어서요!”
집사가 급히 뛰어나가자 민정화가 털썩 주저앉았다.
걱정이 밀려왔고, 평소 그렇게 잘 돌아가던 머리가 멍하니 굳어버렸다.
“정화야, 제발 진정해. 아버님을 찾고 혈승도 추적해야지.”
“언니의 그 비술… 혈승이 움직인 방향을 찾을 수 있어요?”
“좀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능은 할 거야.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반점의 붉은 색이 짙어지는 방향을 찾으면 돼. 하지만 서둘러야 해. 시간이 지나면 비술의 흔적도 사라지니까.”
* * *
소주 외곽의 이름 없는 산 중턱.
역시나 이름 없는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민 문주가 소주에 올 때면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
이곳으로 곡 노인을 데리고 왔다.
암자의 노승은 민 문주를 보자 말없이 자리를 피해줬다.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는 완벽한 둘만의 공간.
그제서야 민 문주의 불안했던 표정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하오문의 지존께서 너무 눈치를 보시는 것 아닙니까? 소주 번화가에도 문주가 소유한 주루, 객잔이 열 개는 될 텐데 굳이 이런 곳까지….”
“쓸데없는 소리는 관두게.”
“후후, 이제야 말을 놓으시는군요. 끝까지 외면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려던 참이었습니다.”
민 문주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곡 노인을 노려봤다.
외면할 수만 있다면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분명했다.
외면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눈앞의 상대를 죽이는 것.
어쩌면 그러기에는 이 조용한 암자는 최적의 장소였다.
“자네가 서운했다면 사과하겠네. 너무 급작스러워서… 우리가 다시 모이기로 한 것은 아직 일 년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제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이십 년의 시간이 흘렀고 외모와 목소리가 바뀌었다고 한들 함께 재물을 담당했던 자네를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이 순간만큼은 민 문주도 그리고 곡 노인도 마음이 울컥했다.
혈교에서 재물을 담당했던 셋은 관계가 돈독했었다.
제사장들과 비술 담당은 성격이 잔혹했고 무술 담당은 폭력적이었던데 반해 이들은 상대적으로 무난한 성격들인 것도 한 이유였지만, 소 혈승이 합리적이고 인격적으로 수장 역할을 수행한 이유가 컸다.
그러니 지금 민 문주를 바라보는 곡 노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돼지가 먼저 죽은 마당에 믿을 것은 소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형.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 아우가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 지냈네. 보다시피 호의호식하고 있지.”
“재물을 쌓고 돈 걱정 없이 산 것으로는 저도 남부럽지 않아요. 하지만…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대형도 마찬가지겠지요.”
“천리를 거스른 우리 아닌가. 맘 편히 살 생각은 애당초 말아야지.”
“후후, 대형 말이 맞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말의 표정과 목소리에 그간의 고난과 역경이 묻어났다.
소… 즉 민 문주는 안 그래도 궁금했던 차였다. 어떤 힘든 일을 겪은 건지. 공력은 어쩌다가 잃게 된 건지.
보따리를 풀어 술병을 꺼냈다.
급하고 조용하게 객잔을 빠져나오면서도 술 몇 병 챙겨오는 건 잊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많은 일이 있었지요. 죽을 뻔했습니다. 그것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고? 도대체 누구에게? 정체를 들킨 건가?”
“첫 번째는 적들에게. 하지만 그건 차라리 나았습니다. 말 그대로 적이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는… 동료에게 당할 뻔했지요. 돼지는 실제로 당했고요.”
“돼지가 당했다고? 도대체 왜? 동료 누구에게?”
민 문주가 술병을 탁 놓았다.
동료 중 누군가 죽었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그게 돼지인 줄은 몰랐다.
돼지가 비록 모난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정을 나눈 형제. 비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숭이였습니다.”
말이 설명을 시작했다.
보물을 찾으러 형산에 갔다가 강한월에게 잡힌 것부터 문무대를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제법 긴 이야기였고, 중간중간 술병을 기울였기에 더 긴 이야기가 되었다.
민 문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하오문의 문주로서 그가 가지고 있던 정보들과 조각을 맞춰가며 들었다.
역시나 우리를 추적하는 조직이 있었던 거구나.
그로서는 정말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저보다 대형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황제가 바뀌고, 무림맹주와 흑사련주가 바뀌었지요.”
“그랬지. 최근에 많은 일이 일어났지. 짐작은 하고 있었네만… 우리가 저지른 일이었군.”
“황궁에 누가 있고 무림맹과 흑사련은 누가 집어삼킨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요, 분명 우리 동료들일 겁니다. 그래서 급하게 대형을 찾아온 겁니다.”
“내가 하오문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안 건가?”
“몰랐습니다. 그저 추측했을 뿐이지요. 대형의 능력이라면 분명 엄청난 재물을 쌓으셨을 거고… 그런 거대한 부를 가졌다고 알려진 것은 셋뿐이니까요. 하오문, 천하전장, 아니면 흑시. 그중 하오문을 가장 먼저 찾은 건데 운이 좋았지요.”
“그랬군. 그래서… 나를 찾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들이 움직였지 않습니까? 대형은 어떡하실 겁니까? 준비가 되신 겁니까?”
“나는… 준비가 안 되었네. 우리가 약속한 시간도 지금이 아니고.”
“그렇게 안일한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요. 제가 추측한 걸 그들이라고 못할까요? 특히나 동창이라는 최고의 정보조직을 장악한 그들이? 조만간 대형께 연락이 올 겁니다. 자금을 내놓으라고요.”
“흥.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지? 난 그들의 수하가 아니다.”
“대형…?”
무언가 이상했다.
소는 설사 불만이 있더라도 혈교의 일에 반기를 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람이 변한 건가?
“아직은… 아직은 모르지 않나? 그들이 진정 교를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욕을 채우려는 것인지. 막말로 자 혈승이 등장한 것도 아니고….”
“제가 알던 대형이 아니시군요. 왜 그렇게 변하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난 변하지 않았네.”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오문주에게 똑똑하고 아름다운 딸이 있다고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정이 깊으시다고….”
“그 아이는 상관없네!”
“그렇지요? 상관이 없는 게 맞지요. 솔직히… 나이를 따져보면 진짜 딸도 아니지 않습니까?”
“닥쳐라!”
민 문주가 들고 있던 술병이 퍽 하고 터졌다.
머리카락과 수염까지 한 올 한 올 떨리는 것으로 보아 분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말 입장에선 혹시나 하고 떠본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격한 반응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딸 때문이라는 것을.
“대형. 전생을 함께했던 동료들보다 실제 자식도 아닌 딸이 더 소중한 겁니까?”
“닥치라고 했다!”
“화내실 필요 없어요.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대형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해서요. 휴우… 술이나 마십시다.”
말은 탁자 위에 널려 있는 깨진 술병 조각들을 치우고 자신의 술병을 내밀었다.
그 순간, 지붕 위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림자가 스르륵 멀어져갔다.
* * *
지붕에서 내려온 소영영은 나무 그늘 속에 주저앉았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이 상태로 민정화를 만날 수는 없으니까.
비술의 흔적을 추적한 그녀는 마침내 이 암자를 발견했다.
경공이 약한 위청보와 민정화는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그녀 혼자 암자를 염탐하게 된 것이었다.
혼자서 나서기엔 위험한 일이었지만, 민 문주를 보호해야 했고 말 혈승은 공력을 잃었었기에 용기를 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공과 사는 구분되어야 하지만, 특히나 천하의 안위가 걸린 이런 중요한 일에서는….
하지만 민정화에게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민 문주는 나쁜 혈승도 아니었다.
뱀이나 용의 편에 서지도 않았고, 여차하면 그들과의 약속을 깰 분위기였으니까.
제길… 왜 하필 내가 먼저 알아가지고.
머리를 쓰거나 판단을 하는 일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닌데.
대장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녀가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참고할 만한 사례가 떠올랐다.
자기 자신도 깊이 관여되어 있는 사례. 바로 유선이었다.
그제서야 소영영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대장이 유선이 새 삶을 살 기회를 허용했다면 민 문주에 대해서도 분명 그럴 것이었다.
말도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 않으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선 소영영이 산 아래를 향했다.
* * *
“언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아버님은 찾았어요?”
보자마자 불이 나게 달려오는 민정화를 보고 소영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아버님에 대해서만 묻고 있으니까. 혈승을 찾았는지는 관심도 없고.
“문주님은 무사하셔. 암자에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어.”
“아, 다행이에요. 그런데 누구랑 이야기를…?”
“그게… 말 혈승이었어.”
“네? 그걸 그냥 보고만 오셨다는 말이에요?”
민정화가 펄쩍 뛰었다.
위청보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위험하지 않더라고. 말 혈승은 공력을 회복하지 못해서 전혀 위협이 못 돼. 만약 싸움이 일어나면 문주님의 한 초식도 감당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냥…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무작정 뛰어들 수가 없었어. 그럴 필요도 없었고. 문주님은 혈승에 대해 모르시는데 뭐라고 핑계 댈 것도 없잖아.”
“그럼 이대로 돌아가자는 말이에요? 혈승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괜찮아. 소주에 있는 한 비술로 언제든지 추적할 수 있으니까.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소영영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게 서로를 돌아본 민정화와 위청보도 결국 그녀를 뒤따랐다.
앞서 걷고 있어 표정을 들키지는 않았지만, 소영영은 지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히 별 의심을 받지 않고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소영영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맨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민정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번 떠오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작은 조각들이 모양을 맞춰가면서 점점 형태가 갖춰졌다.
확실히 그녀는 천재였고, 자신의 비상한 두뇌가 지금처럼 저주스러운 적이 없었다.
누구도 알려준 것이 없지만… 그녀 스스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