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천하제일 거부 (4)
* * *
두 시진쯤 흐른 후 민 문주는 객잔으로 돌아왔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어휴 냄새.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하하하, 우리 딸. 간만에 옛 친구를 만나서 한잔했다.”
민 문주는 마중 나온 딸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표정이 어떤 지 볼 수 없었지만, 덕분에 그녀의 표정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드신 것 같네요. 친한 친구분이셨나 봐요?”
“친했지. 가까웠던 친구란다. 하지만 너만큼 가깝지는 않아. 하하하, 우리 딸.”
민 문주는 다시 한번 딸을 꼬옥 끌어안았다.
민정화는 그런 아버지를 부축해서 침실로 모셨다.
겉옷을 벗기고 이불까지 잘 덮어드린 후에도 한동안 침상 앞에 앉아있었다.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자주 곁에 있어드릴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밖으로만 돌아다녔는지.
* * *
다음 날 아침, 민정화는 천하전장 원 장주를 찾아갔다.
소영영은 말 혈승의 위치를 탐색하겠다고 해서 오늘은 위청보만 동행했다.
역시나 오늘도 원진탁이 먼저 위청보를 낚아채 비무를 하러 갔기에 민정화는 홀가분하게 원 장주를 만날 수 있었다.
“약속대로 찾아뵙습니다, 장주님.”
“어서 오게, 민 소저. 솔직히 자네가 안 왔으면 했다네. 보통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말이지. 허허허.”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어서요. 언젠가는…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자네가 하오문의 모든 것을 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네.”
일단 시작은 좋았다.
원 장주의 표정이나 말을 들어보니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정화의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지도 않을 텐데, 명색이 천하제일의 사업가인 그에게 협상과 조정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
“제가 올린 제안에 대해서는 결정을 하셨는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네. 단, 조건은 좀 수정을 해야겠어.”
“어떻게 조정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가용 자금 전체를 줄 수는 없네. 모양새가 너무 안 좋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물론 민정화도 알았다.
무슨 일인지도 밝히지 않고 돈을 빌리겠다는 건 이 일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이고, 혹여 잘못되었을 경우 돈을 융통해준 천하전장에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
그러니 눈치 덜 보이도록 금액을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얼마까지 생각하시는 건지요?”
“가용 자금의 오 할을 주겠네.”
“그건 너무 적습니다.”
“아니, 적지 않아. 솔직히 자네 이 돈을 가져다가 쓸 데도 없지 않나? 현금이라면 하오문도 하오문이지만 자네가 흑시에서 주무르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테니.”
원 장주의 말이 맞았다.
솔직히 민정화가 천하전장의 돈을 모두 끌어오려는 것은 이 돈이 혈교의 전쟁 자금으로 사용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가 컸으니까.
그걸 원 장주가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자네 의도는 대충 짐작이 가네. 자네에게 오 할만 빌려주는 대신에 다른 상단들에게 신속하게 사 할을 투자하겠네. 그럼 천하전장에는 일 할의 자금만 남을 뿐이지. 이러면 되는 것 아닌가?”
늙은 생강이 맵다고, 역시 이 분야에서 원 장주는 노련한 천재가 맞았다.
조건을 대폭 조정하면서도 결국 민정화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방안을 찾아낸 것이다.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필요하지도 않은 사업에 신속하게 투자하시려면 장주님이 손해를 보실 수도 있을 텐데요?”
“손해? 허허허,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제가 어찌 감히.”
원 장주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매우 피곤한 표정이었다.
눈빛도 약간 멍하고 피부도 푸석푸석한 것이 얼마나 고민이 컸는지 알 수 있었다.
“자네가 하오문의 모든 것을 걸었듯이 나도 천하전장을 전부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손해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게다가 자네 입으로 승률이 고작 삼 할이라고 했으니….”
“많이 부담되신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나중에 후회하실 일을 만드는 것보다는….”
“아니, 실은 그 반대일세. 자네 부친과의 친분이고 뭐고 딱 잘라 거절하고 싶지만… 평생 후회하게 될까 봐 거래에 응하는 걸세.”
역시 천하제일 부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인가?
민정화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음에도 세상에 큰 화가 닥친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자네 부친의 신용, 하오문의 부동산 담보, 그리고 내 느낌… 게다가 일전에 신주의협이 내게 했던 부탁까지.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 때 이번 거래는 성사시켜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일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장주님의 용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건 자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군. 누구와 싸우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꼭 승리하게. 적어도 자금 때문에 지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돈으로는 자네를 이기지 못할 거야.”
* * *
한편 민정화가 원 장주를 만나고 있던 그 시각.
하오문의 민 문주는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제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그로서는 매우 드문 일.
어쨌든 간만에 긴 잠을 잤기 때문일까, 표정이 느긋하고 밝았다.
간단히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늦은 아침까지 먹었다.
좋아하는 용정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던 민 문주가 정원 쪽을 향해 외쳤다.
“밖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서 차 한잔하시게.”
꽃구경을 하는 척 아침 내내 정원을 어슬렁거리던 소영영에게 한 말이었다.
“호호, 문주님.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엿듣거나 염탐하려는 건 아니었고 정원이 예뻐서….”
소영영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염탐은 아니라는 말도 후회스러워 얼굴까지 조금 빨개진 채.
“딸아이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야. 왜냐면 정화가 친구를 데리고 온 게 처음이거든. 하하하.”
또르르 차를 따르며 민 문주가 말했다.
염탐을 하다 들킨 것일 뿐인데, 그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저는 민 소저의 동료입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조금….”
“친구가 뭐 별 건가. 뜻이 맞아 같은 길을 걸어가면 그게 친구지 뭐. 앞으로 우리 정화 좀 많이 도와주게.”
자식의 친구에게 부모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영영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들렸다.
“문주님. 혹시…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것 없네. 정화가 최근에 좋은 친구들을 사귄 것 같아서 기뻐서 하는 이야기일세. 정화는 불쌍하게도 아비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친구 사귈 시간이 없었지. 하지만 이제 아비보다는 또래들과 지내는 게 더 재밌을 나이가 되지 않았나.”
이후에도 차 몇 잔을 더 마셔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민정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정이 듬뿍 느껴지는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였는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소영영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혈승임이 분명한 사람과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는 게 어색해서는 아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꿈틀거렸는데,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허허, 이거 젊은 친구를 너무 오래 붙들어 놓았군. 노인네랑 이야기하는 게 재미없었을 텐데.”
“어머, 문주님. 무슨 그런 말씀을.”
“재미없었지 뭘. 나도 곧 외출을 나가야 하니 이야기는 이만하도록 하고… 여기 이것 좀 우리 정화에게 전해주겠나?”
민 문주가 탁자 아래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내어 소영영에게 건넸다.
“직접 주시지 않고 왜 저에게…?”
“허허, 나는 외출을 나간다니까. 부탁 좀 하세.”
별것 아닌 부탁이었지만 상자에 손이 가지를 않았다.
문주가 외출을 나가도록 놔두고 싶지도 않았고.
잠시 머뭇거리던 소영영이 마지못해 상자를 받았다.
“고맙네. 그럼 난 이만.”
무엇이 그리 급한지 민 문주가 급히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에 대고 소영영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문주님. 잘 다녀오세요. 꼭 다시 봬요!”
* * *
민정화는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객잔으로 돌아왔다.
원 장주와 합의를 본 후 내친김에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온 것이었다.
민정화가 별채에 들어설 때 소영영은 나무 상자를 품에 안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정화… 왔니?”
“네, 언니. 쉬고 계신 걸 보니 별일은 없었나 보네요.”
“별일 없었어. 아니… 실은 별일이 있었어.”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거.”
소영영이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문주님이 너한테 전해달라고 하신 거야. 나도 열어보진 않았어.”
불길한 느낌이 치솟아서 민정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둘러 나무 상자를 열었는데, 안에는 편지 한 장과 비취로 만든 도장이 들어있었다.
민정화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들었다.
내용은 짧았지만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고, 결국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언니는 알고 있었죠? 어째서… 어째서 말리지 않았어요?”
“나는… 뭘 어찌해야 하는지 몰랐어.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고.”
“하지만….”
소영영을 원망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민정화도 잘 알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배려심에 감사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전 아버님 찾으러 가야겠어요.”
민정화가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무작정 뛰었다.
바보처럼 아무 말 못 하고 있던 위청보가 탁자 위에 남겨진 편지를 집어 들었다.
“소 선배. 이게 도대체 뭔 데 그래요?”
편지의 내용은 단 몇 줄이었다.
사랑하는 정화야.
너를 만난 것이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일이었다.
네가 밝게 잘 자라주는 걸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어.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고 항상 행복해라.
네가 추진하는 일… 꼭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편지를 읽는 소영영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였다.
역시 민 문주는 민정화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민정화도 부친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슬프네. 편지 어디에도 딸이라는 말은 쓰지 않으셨구나.”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요? 저도 좀 알자고요.”
“정화의 아버님. 민 문주님이 실은… 회귀자야. 재물 담당 중 수장인 소 혈승이시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위청보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소영영의 표정을 보니 분명 농담은 아니었다.
“어? 정말인 거예요? 그럼… 문주님은 정체를 들켜서 도망간 건가요?”
“도망은 무슨. 문주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럼 어디로 간 건데요? 민 소저는 왜 급히 뛰쳐나간 거고요?”
“걱정이 되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문주님은 아마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
“아니 왜요?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전생의 잘못 때문에 그런 거예요? 현생에서는 세상에 해악을 끼친 게 없잖아요.”
“세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하지만 정화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
* * *
소호 변두리의 허름한 뒷골목.
말을 만나러 가는 중인 민 문주가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이 거리에도 하오문 소유의 주점이 있고 문도들이 곳곳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문주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삼십 대 초반의 한량으로 변신한 모습이 너무 완벽하였기 때문.
하지만 물론 아직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있었다.
“대형, 변장술이 대단하십니다. 혈령의 느낌으로 겨우 알아챘지 하마터면 저도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내 별호가 명색이 천면호리 아닌가. 무공은 많이 처지지만 변장술 하나만은 내가 천하제일이 맞을 걸세.”
“인정합니다. 그런데… 저를 만나러 오시면서 어째서 변장을?”
“변장한 이유야 뻔하지. 일을 비밀스럽게 처리하려는 것이지.”
“무슨 일을 말입니까?”
“사람을 죽이려고. 바로… 자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