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천하제일 거부 (5)
* * *
처음에는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했다.
소는 열두 혈승 중 가장 마음이 여리고 폭력을 싫어해서 애당초 살인과는 거리가 머니까.
게다가 친형제나 다름없는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대형, 무슨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농담 아닐세. 자네를 죽이고 나 또한 죽을 거야.”
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저를 죽이려는 이유, 그리고 자살을 하시려는 이유.”
“속죄하기 위해서네. 내가 저지른 잘못을.”
“전생의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분명 우리 혈교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대형은 자금을 관리한 것 외에는….”
“전생의 일 때문이 아니야. 바로 이곳 현생에서의 죄 때문이지.”
점점 더 납득하기 힘들어졌다.
하오문이라는 거대 조직의 수장쯤 되면 세상에 이런저런 소문과 평판이 돌기 마련이고, 말도 여러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머리가 좋고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는 게 대부분이고, 잘못에 대한 소문은 없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그러십니까?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죄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니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부친을 죽였다네.”
허허.
말이 한숨을 내쉬었다.
밑도 끝도 없는 애매한 말이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로 회귀하면서 몸의 원주인의 영혼을 소멸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래의 하오문주, 즉 민정화의 실제 부친의 영혼을.
“대형이 의도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정화 부친의 몸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지. 하지만 하오문으로 회귀하려고 계획을 세운 건 맞아. 하오문의 골동품을 구해서 십이신석 비술이 행해질 때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럼 아예 회귀를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뭐 하자는 겁니까?”
“자네 말이 맞아. 우리는 회귀하지 말았어야 했네. 천 번, 만 번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더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속죄하는 것. 딸아이가 맞서 싸워야 하는 혈승의 수를 하나라도 줄여 줌으로써 말일세.”
“그래서… 저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자신의 친딸도 아닌데… 그렇게 정이 깊다는 말인가?
소가 왜 이러는 것인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말은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말에게 있어 가장 가족 같던 존재는 지금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 바로 이 사람이니까.
“오늘 말, 즉 오(午) 혈승은 무조건 내 손에 죽는다. 하지만 곡 대인도 죽게 될지는 자네의 선택에 달렸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혈령을 소멸시키고 혈승의 임무를 포기하게. 전생을 잊고 먼 곳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하면 자네를 죽이지 않겠네.”
민 문주의 눈빛이 간절했다.
협박처럼 들리는 이 말들은 사실은 간곡한 부탁이었던 것이다.
“저라고 그런 생각 안 해본 줄 아십니까? 세상을 지배하는 것 저도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자 혈승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이해하네. 자 혈승은 정말 무섭지. 나도 그걸 해결해줄 방법은 없네. 그러니 자네가 선택하게. 자 혈승 때문에 평생 불안에 떨겠지만 그래도 멀리 도망을 칠 것인지, 아님 지금 내 손에 죽던지.”
대형이 정말 날 죽일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았다.
비록 마음이 여리지만 소는 한다면 하는 사람. 게다가 자살할 결심을 한 사람이 뭔들 못할까?
대형의 손에 죽기는 싫었다.
그래, 까짓것.
안 그래도 혈승 놈들 중엔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 많으니….
“좋습니다. 대형의 말대로 하지요. 하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민 문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하게 결심을 하긴 했지만 자기 손으로 말을 죽이기는 정말 싫었으니까.
“조건이 뭔가?”
“멀리 도망치기 전에 저도 한 놈은 꼭 죽여야겠습니다.”
“그게 누군데?”
“혈승의 수를 하나라도 줄이겠다고 하셨죠? 저와 함께 원숭이를 죽입시다. 불쌍한 막내… 돼지의 원수를 갚아줍시다.”
“원숭이를…?”
“물론 쉽지 않다는 건 압니다. 원숭이는 원래 우리보다 무공이 강했고 비술에도 능하니까요. 그놈이 가진 잔인한 비술들이라면 분명 지금쯤 공력을 회복했을 것이고요.”
민 문주가 고민하는 것은 원숭이가 두렵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루빨리 자결을 해서 민정화에게 속죄할 계획이었는데, 이러면 그 시점이 늦어지기 때문.
“원숭이를 처치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래요? 대형의 무공이 그 정도로 높아진 겁니까?”
“아니, 내 실력은 전생이나 다를 바 없네. 고작 초절정 수준이지. 하지만 나에겐 이게 있다네.”
민 문주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 자 길이의 시커먼 쇠뭉치였다.
“그거… 혹시 구유탈혼총(九幽脫魂銃)… 입니까?”
삼백 년 전 사천당문의 기인이 만든 무림 역사상 최강의 암기.
한 번 발사가 되면 상대가 절대경이 아니라 초월경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죽게 만든다는 전설의 무기였다.
이 때문에 사천당문은 무림 공적으로 몰려 멸문의 위기에 몰렸었고, 구유탈혼총을 모두 폐기하고 설계했던 기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에야 멸문을 피할 수 있었다.
워낙 대단한 무기라 회귀한 혈승 모두가 관심을 가졌던 것인데, 그게 민 문주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전생에서 가져온 정보는 어느 것도 사용하지 않았네. 하지만 이 구유탈혼총을 찾는 것만은 예외였지. 원래 딸아이에게 호신용으로 주려고 구한 것인데… 원숭이를 잡는 데 써도 좋겠군. 그 또한 딸아이를 돕는 일이니까.”
“좋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요. 그것만 있으면 분명 원숭이를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또 무슨…?”
“저 혼자 도망치고 대형은 자살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건 안 됩니다. 원숭이를 죽인 후 저와 함께 떠납시다.”
“그건 안 되네!”
“왜 안 됩니까? 정 그렇게 속죄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절을 짓고 민 소저 친부의 영혼을 위해 매일 불공을 드리십시오! 그게 더 맞는 방법 아닙니까? 대형이 죽어서 좋아질 일이 뭐가 있다고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잘못한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네. 그게 천리인 것을.”
“하지만….”
“됐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낼 필요 없어. 당장은 원숭이를 잡는 것만 생각해.”
민 문주의 표정이 하도 단호해서 말은 더 이상 설득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원숭이를 죽일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앞으로도 이야기할 기회는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일단은 소주를 벗어나기로 하고 민 문주와 말이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 무언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하오문 소유의 모든 객관과 주루 입구에 내걸린 현수막.
수백 명의 문도를 동원해 소주를 뒤졌음에도 부친을 찾지 못하자, 민정화가 서둘러 만들어서 걸어 둔 것이었다.
【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면 안 된다 】
그 글을 보는 순간 민 문주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안 된다… 이 글의 의미는 분명했다.
민 문주의 잘못은 민정화의 친부의 영혼을 죽인 것. 만약 민 문주가 자살을 한다면 민정화를 키워준 부친마저 죽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두 번 반복하면 안 된다… 즉, 자결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
“대형, 보셨죠? 대형만 정이 깊은 건 아닌가 봅니다.”
“하지만… 난… 나는….”
민 문주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민정화에 대한 고마움, 그럴수록 더 커지는 미안함. 그런 것이 복합되어 감정이 북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대형의 딸이 이렇게 나와준다면 어쩌면 설득이 가능할지도….
말 혈승은 민 문주의 눈물에서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지금은 몰아붙일 때는 아니었다.
“대형 말씀대로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도록 하시죠. 일단은 원숭이를 잡읍시다. 여차하면 다른 놈들도.”
* * *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높은 산.
매서운 칼바람과 눈보라를 해치며 한 노인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몹시 추운 날씨에 공기마저 희박했지만 노인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은 무림맹의 원로원주 직을 맡았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이니까.
민정화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신주의협을 찾아 나선 사마염.
하오문 정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은 덕에 신주의협의 흔적이 천룡사 인근까지 이어진 것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답답하던 차에 하오문 정보 전문가들이 한 인물을 찾아냈다.
반년쯤 전에 어떤 조직의 무사 채용에 도전한 적이 있는 천석이라는 무사였다.
그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사마염은 천석과 함께 시험을 치렀던 신월이라는 자가 신주의협임을 확신했다.
나이나 무공 수준 등 많은 것이 달랐지만, 그 정도 꾸미는 것은 신주의협에겐 쉬운 일.
거기서부터 다시 정보를 모으고 추적한 끝에 결국 이곳 옥룡설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경공을 발휘해 나는 새처럼 달리기를 몇 시진.
구름마저 발밑으로 깔릴 높이로 산을 오르자 더 이상 눈보라는 치지 않았고, 저 멀리 대단한 규모의 성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구나.
산 인근 주민들에게서 들은 소문을 종합해보면 바로 저곳이 천궁이라는 곳일 터였다.
신월이라는 가명을 쓴 신주의협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
여기서부터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사마염은 속도를 확 늦추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저 정도 규모의 조직이라면 분명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있을 것이고,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굳이 부딪칠 필요 없으니까.
과연, 성을 향해 좀 더 접근하자 일단의 무사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도 거리낌 없는 경쾌한 발걸음, 안정된 기도… 대단히 잘 훈련된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사마염은 즉시 가까운 얼음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경비 무사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고? 낙양 무림맹 본부보다 오히려 나은데?
감탄과 더불어 의혹이 치솟았다.
명색이 무림맹의 고위직으로서 수많은 정보와 소식들을 접해왔지만, 이런 조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던 것이다.
자고로 비밀이 많은 집단치고 떳떳한 곳은 드문 법.
게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세운 조직이기에 이런 규모를 만들고도 비밀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엄청난 장악력이고, 조직원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마염은 은밀히 경비 무사들의 뒤를 쫓았다.
성벽 주변을 한차례 순찰한 그들이 성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사마염은 경비가 허술한 한쪽 벽면을 타기 시작했다.
벽에는 얼음이 끼어 있어 미끄러웠지만, 절정의 벽호공을 발휘한 사마염은 수월하게 벽을 넘어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사제가 있을까?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곳 같으니 신주의협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살짝 불안하기도 했는데, 할 일 많은 그가 수개월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해가 져 어둠이 내려앉았다.
은밀히 탐색을 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
성은 넓었지만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성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전각. 기감을 펼쳐보니 그곳에서 강력한 기운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월하지는 않겠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은신술을 제대로 배워 놓을 걸.
단단히 마음먹은 사마염이 스르륵 짙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은신의 비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과연 고수는 고수였다. 소리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전각으로 스며드는 솜씨는 은신술의 대가가 봤더라면 칭찬을 마다치 않았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솜씨가 훌륭하다고 결과까지 그런 것은 아닌 모양.
전각 내부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사마염 원로원주님. 천궁을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