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예행 연습 (1)
* * *
사마염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이미 들켰으니 숨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은신술이 형편없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들킬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이름까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계셨나 보오?”
“운남성 전체가 우리의 본거지라 할 수 있으니까요. 특히나 청룡사 주변과 이곳 옥룡설산에는 곳곳에 우리의 눈과 귀가 있지요.”
“하지만 내 신분까지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허허, 사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마염 원로원주님은 저희와 남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남이 아니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이자는 도대체 누굴까?
나이는 칠십 정도로 자신과 비슷했고, 정명한 기도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이름 없는 작자는 아닌 듯한데….
“이것 참… 무단으로 침입한 나를 반겨주는 것은 고마운데, 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구려.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이런, 소개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제가 성급했군요. 저는 천궁에서 좌호법을 맡고 있는 황우치라고 합니다.”
황우치라고?
모를 수가 없었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만검산장의 이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니까.
“위명이 쟁쟁하신 만검산장의 장주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소. 그런데… 내 평소 장주를 존경하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남이 아니라고 할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허허허, 직접적인 관계가 없던 것은 맞지요. 하지만 제가 모시는 천궁의 궁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도대체 궁주가 뉘시길래?”
“원로원주님과는 가족과 다름없는 분이시죠.”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묻지 않소?”
사마염은 슬슬 짜증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이름을 말해주면 될 것을 이리도 뜸을 들이다니. 게다가 계속 싱글거리며 친한 척하는 저 모습은 또 무엇이고?
“천궁의 궁주님은 신주의협이십니다. 원주님과 사형제 관계이시니 남이 아니라고 한 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요.”
* * *
사마염이 황우치를 만나고 있던 그 시각.
신주의협은 전각의 꼭대기 층에서 천사장 양 혈승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직접 만나볼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그럴 필요 없다. 사마염은 쓰고 버릴 도구일 뿐. 굳이 내가 만나야 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자 혈승께서 얼굴을 비치시면 목적을 이루기 더 쉬워질 텐데요?”
“용은 구름 속에 숨어있을 때에 신비로움이 더해지는 법. 신주의협 또한 마찬가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렵게 확보한 정보를 이렇게 넘겨줘도 괜찮은 걸까요?”
양 혈승은 원래 말이 많지 않았다.
자 혈승이 하는 일에 토를 달거나 질문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지금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그만큼 이 건에 대해서는 불만 혹은 의문이 있다는 뜻이었다.
“후후, 너는 동료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되는 것이냐?”
“그런 건 아니옵고… 어쨌든 그들이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것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모든 것은 결국 자 혈승님의 자산인 건데….”
“뱀, 용, 호랑이… 그들이 나를 위해 그것들을 준비했다고 믿나?”
“물론 다른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자 혈승님이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신다면 그걸 거부하진 못할 겁니다.”
“필요 없다. 그런 것을 바라고 그들을 회귀시킨 건 아니야.”
양 혈승은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현재로 회귀하기 전부터, 실은 혈교가 척혈단에게 밀려 후퇴하던 그때부터 의문을 품었다.
자 혈승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척혈단을 비롯한 무림의 연합군에 혈교의 교도들이 죽어 나갈 때 자 혈승이 직접 나서 싸우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 혈승이 나서 줬다면… 자신들이 척혈단에 패하고 과거로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뱀, 용, 호랑이 그들의 조직이 필요 없으시다고요? 그럼… 저희를 회귀시키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혼란을 바란다. 정점에 올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천하 곳곳에 동시다발적인 혼란을 일으키는 건 여럿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지.”
역시나 자신들을 동료로 인정해서 함께 회귀시킨 것이 아니었다.
배신감, 아니 최소한 서운한 생각이라도 들어야 맞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 혈승에게 인간적인 정이나 도리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맞지 않으니까.
그나마 양 자신은 수하로 인정받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오늘 사마염에게 정보를 주시는 것은…?”
“그래. 판을 조금 흔들어 놓기 위함이다. 현재는 뱀, 용, 호랑이가 너무 강해. 특히나 황실을 장악한 것은 매우 크다. 저울추가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는 혼란이 일어나기 힘들지.”
“하지만 사마염, 아니 강한월이 의도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그는 아직 약한 데다 조직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나는 변수를 만들 뿐. 강한월이 성공한다면 혼란이 초래될 것이고, 만약 실패하면 그 또한 또 다른 혼란의 단초가 될 테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양 혈승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 혈승이 결정하면 따를 뿐.
“저희 천궁은 어떤 준비를 갖추면 되겠는지요?”
“지금까지와 달라질 것은 없다. 묵묵히 때를 기다려라.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그때 우리가 세상에 나설 것이니.”
양 혈승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이 정도 문답도 매우 특별한 것이었고, 이 이상 자 혈승을 방해할 용기는 없었다.
아무 말없이 서로 차만 마시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궁주님. 잠시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마염과의 만남을 끝내고 올라온 황우치였다.
방문이 열리고 황우치가 들어오는 순간 자 혈승의 표정과 목소리는 신주의협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좌호법. 수고가 많았소. 사마염 사형께는 잘 말씀드리셨소?”
“네. 궁주님이 알려주신 대로 설명하고 정보를 넘겨드렸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고?”
“전혀요. 궁주님이 친필로 작성하신 서신까지 보여드렸는데 의심할 리가 없지요. 궁주님이 홀로 애쓰신 것에 매우 감격하셨고, 당장 만나지 못하는 것만 그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좌호법은 내가 왜 사형을 만나주지 않는지 궁금하시겠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의아하긴 합니다.”
조금 전, 황우치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같은 건물 안에 멀쩡히 잘 있는 걸 앎에도, 신주의협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주로 외부에서 활동하고 천궁에 머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거기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 좌호법께서 널리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호의 동료들도 이제는 나를 너무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힘을 키울 필요도 있고요.”
“궁주님께서 어련히 잘 판단하셨으려고요. 저희는 궁주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허허허.”
황우치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사형인 사마염까지 만나주지 않는 신주의협을 이렇게 맞대면하고 있자니, 무척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받은 기분,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황우치 혼자만은 아니었다.
천궁의 구성원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것이 천궁이 비밀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좌호법의 호의에는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사마염 사형께서는…?”
“설명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가셨습니다. 사제가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자신이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면서요. 아마 지금 최고의 속도로 산을 내려가고 계실 겁니다.”
* * *
장강의 섬에 위치한 척혈단의 임시 본부.
화산파 장문인이 원로들과 회합을 가질 때 노를 저어 안내했던 사공이 다시 섬을 향해 배를 몰고 있었다.
이번에 배에 태운 사람은 허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나이답지 않게 풍채가 당당하고 기력이 넘치는 노인이지만, 지금은 눈가가 거무죽죽한 것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먼 운남 옥룡설산에서부터 거의 쉬지도 않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사마염 원로원주님. 먼 길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선착장에 마중을 나온 것은 민정화였다.
원로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고, 가장 먼저 정보를 확인하는 게 그녀의 임무이기도 했으니까.
“수고는 무슨. 민 소저가 정확한 정보를 준 덕분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 역시 하오문의 정보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민정화의 표정이 예전과 다르게 달라 보였다.
설마 자신이 복귀했다고 저렇게 기뻐하는 건 아닐 텐데….
“좋은 일은 원로원주님이 이렇게 무사히 복귀하신 것이죠.”
“허허, 빈말이라도 듣기는 좋군. 그리고 또다른 좋은 일은?”
“호호, 실은 원로원주님도 크게 반기실 사람이 며칠 전 이곳에 왔어요?”
“내가 반길 사람? 혹시…?”
“네, 맞아요. 강한월 소협… 그러니까 척혈단의 단장이 드디어 왔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기쁜 일이! 마침 잘되었군. 내가 가지고 온 일을 처리하려면 한월이의 도움이 꼭 필요하니까. 그래, 한월이는 어디 있나? 당장 가보세.”
사마염은 민정화의 안내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 달렸다.
정말로 기뻤던 지, 어느새 피곤함은 사라지고 안색에도 활기가 넘쳤다.
정원을 지나 대전 가까이 가자 저 멀리 강한월의 모습이 보였다.
사마염이 오는 것을 알고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월아!”
“사백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괜찮다. 괜찮아. 이렇게 무사하면 된 거지. 너도 그렇고 사제도 그렇고 무사한 것을 알았으니 오늘 밤에는 드디어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하하하.”
“사부님을… 만나신 겁니까?”
“아니,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만난 것이나 진배없지.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 꾸나.”
대전에 사람들이 모였다.
강한월과 함께 곽철과 진가린도 복귀해서 정말 오랜만에 척혈단 모두가 함께하고 있었다.
우군을 모집하러 외부를 돌고 있는 위무진 등 원로들은 이 자리에 없었지만 말이다.
사마염은 강한월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듣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듣게 할 수는 없으니까.
우선은 자신이 가지고 온 보따리를 푸는 게 맞았다.
“원로원주님. 장도에 피곤하시겠지만 가지고 오신 정보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주의협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 있다고만 전서를 보내셔서 다들 궁금해하고 있거든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네, 민 소저. 철저하게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 전서에 길게 쓸 수도 없었고.”
“그러셨겠죠. 운남 천룡사 인근을 탐색하시다가 옥룡설산으로 출발하신 것까지는 하오문 정보원들을 통해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사마염이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마염이 천궁에 머문 시간은 고작 한 시진 정도밖에 안 되니까.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감탄사를 터뜨렸다.
신주의협이 암암리에 그런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희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강호 무림 최고수, 천하제일인의 존재감은 그만큼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