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예행 연습 (3)
* * *
강한월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로울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척혈단의 단장이라도 대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혼자서 사라졌다 복귀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 대원들이 자신을 혼자 보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이해되기도 했다.
“사백님. 힘든 부탁을 드리게 된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마다. 오랫동안 뒷방 늙은이 신세였는데, 이렇게 젊은 친구들과 현장에서 뛸 수 있다면 나야 기쁜 일이지. 임무는 제대로 수행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하하.”
정말로 신이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마염은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원로 고수가 이렇게 의지를 불태우니 젊은 대원들의 사기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다들 마음을 정하신 것 같으니 이제 작전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음… 실은 상세한 계획 같은 건 없어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 적들의 비밀 기지 깊숙이 침투해 괴인을 만들고 있는 시설을 폭파하고 무사히 빠져나오면 됩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계획이 너무 단순했는지 민정화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원들은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단어에 꽂혀버렸기 때문.
“네? 폭파요? 아니 뭘로 폭파를 시켜요?”
“혹시 천뢰가 남아있는 거예요? 그건 전에 단장이 북경에서 써버린 거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폭발물은 황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물건. 오직 황군만이 보유할 수 있었는데, 황실이 혈승에 장악된 이상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으니.
“천뢰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 비슷한 게 있어요.”
제갈윤의 답변이었고, 대원들의 눈빛이 쏟아지자 이어서 설명을 해야 했다.
“전에 천뢰를 확보했을 때 내용을 좀 덜어내서 분석을 했어요. 대략 어떻게 만들고 어떤 원리로 폭발하는지 알아냈죠.”
“하지만 방법을 안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재료를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사마염마저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졌다.
명색이 무림맹의 원로원주였던 그는 재료인 화약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죠. 그런데 하늘이 도우시는지 화약의 주재료인 염초와 유황을 하오문에서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최상급으로. 민 소저가 그 귀한 걸 아낌없이 제공해줘서 폭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군. 좋아, 그럼 화끈하게 한번 사용해보도록 하지. 폭탄을 사용하면 황법으로 처벌받지만, 어차피 황실의 기지를 습격하러 가는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하하하.”
“네. 아무렴 어때요. 어차피 이번 습격 이후로 우리 모두는 역적에 무림공적이 될 텐데.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죠.”
제갈윤이 끔찍한 이야기를 농담처럼 내뱉었다.
다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얼굴과는 달리 속이 편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죽거나 물러설 그들이 아니었다.
* * *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기에 다들 일찍 숙소에 들었다.
그건 강한월도 마찬가지.
작은 보퉁이에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있을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들어오십시오, 민 소저.”
“쉬셔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별말씀을. 저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 소저가 어제도 거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저도 피곤하지 않아요. 내일 다들 출발하시는 거 본 후에 쉬면 되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한월은 그녀가 찾아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온 목적은 그가 생각하던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폭탄을 만든 거요. 하오문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료를 확보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염초와 유황은 하오문의 사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까요. 흑시에서 확보했다고 보기도 뭐하고. 귀한 물건인 건 맞지만 보물로 분류되는 것들은 아니니까요.”
“맞아요. 하오문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죠. 게다가 보관하고 있는 걸 누가 알았다면 멸문을 당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째서?”
“저도 몰랐는데… 아버님이 오래전부터 조금씩 구해서 모아 놓으셨더라고요. 아마도 십 년 넘게 준비하셨던 것 같아요.”
“민 문주님이 혜안이 있으셨군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실은 좀 전에 제갈윤 대원이 했던 말,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었어요. 천뢰를 분석해서 제조법을 연구한 것은 맞지만 그걸로는 고성능의 폭탄을 완성하지 못했죠. 결국 천뢰를 능가하는 폭탄을 만들게 된 것은… 정확한 천뢰의 제조법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그것도 민 문주님이 주신 겁니까?”
“맞아요.”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든 것 같았다.
민정화는 의자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고, 강한월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 정도 말씀드렸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셨겠죠?”
강한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신다니 바로 말씀드릴게요. 제 아버님, 하오문의 문주님은… 회귀자세요.”
얼마나 하기 힘든 말이었을까?
입 밖으로 꺼내기, 아니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기도 싫은 말이었을 것이다.
민정화는 독하게 마음먹고 진실을 밝힌 것인데, 의외로 강한월은 크게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혹시… 알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요,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언제부터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의심이라기보다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혈교에는 자금을 담당하는 자들이 있고, 다른 혈승들이 황실과 무림맹 등을 노렸듯 자금 담당은 천하의 거부들을 노렸을 테니까요. 그러니 천하전장, 하오문, 흑시… 이 세 곳 중 한두 곳엔 분명 혈승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흑시의 주인이라는 걸 안 후에는 후보가 천하전장과 하오문 두 곳으로 좁혀졌겠네요.”
“맞습니다. 유선이 민 소저를 본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즉 민 소저는 회귀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천하전장과 하오문 중에서는… 솔직히 하오문주님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봤습니다.”
“천하전장 원진탁 공자가 납치될 뻔했던 일 때문이겠군요.”
“네. 당시엔 혈승끼리 교류가 없었으니 모르고 원진탁을 납치하려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원 장주가 별다른 대응이 없는 걸 보고 혈승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정화는 맥이 풀렸다.
며칠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상대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어째서 잠자코 계셨던 거예요? 혈승의 딸일지도 모르는 저에게 온갖 중요한 정보를 다 맡겨 놓으시고….”
“글쎄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솔직히 강한월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으니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민 소저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운 것을 보고 민 문주는 위험한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풉. 무슨 그런 어설픈 이유가….”
민정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기는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민 소저가 잘 대처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죠.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민 소저도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죠?”
“저… 저는….”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민 소저가 못했을 리가 없죠. 분석과 추론에는 저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나시니까요. 처음엔 모르셨겠지만 회귀자에 대한 정보를 얻으신 후에는 분명 짐작하셨을 겁니다.”
“휴우. 모르겠어요. 제가 짐작을 했는지 아닌지. 어쩌면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민정화는 강한월이 무슨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고, 강한월은 그녀가 스스로 매듭을 짓기를 바랐다.
결국 참지 못한 민정화가 먼저 입을 열었는데….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아버님이 혈승인 것이 밝혀졌잖아요. 어떡하실 거예요? 체포할 건가요?”
“지금으로선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만.”
“어째서죠? 회귀자는 존재 자체가 악이잖아요.”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유선의 일을 겪으면서, 그리고 장학송 문주의 사연을 들으면서 강한월의 생각이 바뀌었다.
하늘의 이치가 중요하듯 사람의 마음도 중요한 법.
미래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이라 낙인찍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선이 천마신교에 잘 정착했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준 거죠. 회귀자 모두가 나쁘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회귀자가 아닌 우리가 그렇듯, 회귀자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죠. 저는 나쁜 회귀자하고만 싸울 겁니다.”
“그럼… 아버지를 용서하신다는 건가요?”
민정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 큰 기대를 안 했던 것이다. 강한월이 회귀자에 대해서는 얼마나 단호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만 예외를 둘 것 같지는 않았고, 그럴 경우 무릎이라도 꿇을 작정이었는데….
“애당초 저에게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 할 권한은 없습니다. 만약 문주님에게 누군가의 용서가 필요하다면… 그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민 소저뿐일 겁니다.”
“회귀할 당시… 제 원래 부친의 영혼이 소멸된 것 때문에요?”
“그렇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민 문주님은 민 소저의 부친을 죽인 원수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매우 어려운 말이었고, 강한월도 언급하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한 번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이 문제에 대해 민정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떠난 원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타깝죠. 하지만… 전 원래 아버지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민정화의 표정이 편안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있다는 증거였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지는 단장도 아실 거예요. 지금도 저를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계신다고 확신하고요. 이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막말로 자신이 영혼을 죽이고 육체를 빼앗은 사람의 딸에게 이렇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가능할까요?”
민정화는 확신하고 있었다.
확인할 방법은 없고,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원 부친의 마음이 아직도 남아 민 문주의 영혼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이다.
“하루 속히 민 문주를 찾아야겠습니다. 혈승의 체포가 아니라 부녀 상봉을 위해서요. 저는 민 소저의 생각이 맞다고 믿으니까요.”
* * *
“대형, 주무시지 않고 뭔 생각을 그리하고 계십니까?”
야산의 공터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숙하던 중 말 혈승이 민 문주에게 물었다.
“생각은 무슨… 그냥 별을 보고 있었네. 오늘따라 별이 참 밝구나.”
말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민 문주의 말 대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무리는 정말로 아름다웠는데, 그걸 보며 민 문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따님이 보고 싶으시죠?”
“흠… 보고야 싶지. 그걸 말이라고.”
“대형. 거사를 치르기 전에 따님을 한번 보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이 사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말이 안 됩니까? 원숭이를 잡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대형이 구유탈혼총을 가지고 있다 한들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다시는 따님을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 내 결심은 변함이 없네!”
민 문주는 몸을 돌려 누웠다.
더 이야기를 하다가는 자신의 결심이 흔들릴까 두려웠다.
너무도 딸이 보고 싶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정화는 자신의 친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