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예행 연습 (4)
* * *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몇 척의 조각배가 동시에 섬을 출발했다.
장강을 붉게 적시며 해가 떠오를 무렵, 배들은 선착장에 닿았다.
“사백님.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보다는 단 둘이 가는 한월이 네가 더 걱정이구나. 절대 무리하지 말거라.”
“걱정 마십시오. 여차하면 무조건 도망치겠습니다.”
“그래.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나자. 무운을 빈다.”
부유한 상인 일행으로 변장한 사마염 조가 먼저 출발했다.
진가린도 하오문도들이 미리 준비해둔 말에 올랐다.
“단장, 우리도 출발할까요?”
“그래야지. 그런데… 그 전에 하고 싶은 말부터 해봐.”
“하고 싶은 말이요? 무슨…?”
“얼굴에 쓰여 있는데 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거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풀고 가는 것이 좋아.”
그렇게 티가 났나?
아마 그렇진 않을 거였다. 티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신경 썼으니까.
강한월이 지레짐작한 것이었고, 그 짐작이 맞았다.
“뭐 좋아요. 중요한 건 아니지만 단장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뭐 하나만 묻겠어요.”
“대리 천룡사에 관한 거지?”
“맞아요. 그리고 단장 그거 안 좋은 버릇이예요. 남의 속 마음 들여다보고 혼자 다 짐작하는 거.”
“쓸데없는 소리는 빼고.”
“진짜라고요. 어쨌든… 천룡사라면 저희 청송문을 쳐들어왔던 옥룡이 속한 문파 맞죠?”
“그가 현재 속해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 하지만… 그가 천룡사의 무공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
“절대로 의심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상하지 않아요? 천룡사가 신주의협을 따르고 있는데, 천룡사의 무공을 쓰는 고수가 시간의 돌을 빼앗으러 왔다는 거.”
진가린은 일부터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자칫 강한월의 사부를 의심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 걱정되었다.
사실 뭐 딱히 의심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신주의협이 나쁜 일에 연루되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저 궁금할 뿐이지만, 찜찜한 것은 풀고 가는 게 좋다고 강한월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
“그래, 이상하다. 솔직히 나도 좀 놀랐어. 하지만 무언가 음모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부님을 뵙고 직접 여쭙거나 아니면 옥룡을 찾아 확인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뭐 그렇기는 해요. 저도 단장의 사부님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니,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커.”
“네…?”
도대체 뭔 소리야?
신주의협이 그 일의 주범이란 소리야 뭐야?
어안이 벙벙한 진가린의 표정을 재밌다고 바라보던 강한월이 설명을 곁들였다.
“난 그 옥룡 대사가 천룡사의 인물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천궁이라는 조직에 속해 있을 거라고 봐. 하지만 사부님이 그런 무도한 방법으로 시간의 돌을 약탈해오라고 주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그럼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아마도 사부님은 시간의 돌이 혈승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보호하려 하신 것 같아. 그래서 천궁의 인물들에게 시간을 돌을 찾아 달라 부탁하셨겠지. 이후의 일은 천궁 사람들이 알아서 저지른 것이고.”
“아! 신주의협의 부탁을 과하게 해석한 거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생각일 뿐이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가장 적절한 추론이라고 생각해. 사마염 사백에 의하면 사부님은 비록 천궁을 조직하셨지만 홀로 외부의 일을 보시고 천궁에 머무시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으니까. 조직원들이 사부님의 뜻을 곡해하고 멋대로 움직였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지.”
“우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단장은 역시 대단해요. 그렇게 합리적인 분석을 순식간에 해내다니!”
강한월은 그냥 웃고 말았다.
순식간에 생각한 거라고? 절대 그렇지 않았다.
실은 어제 밤잠을 설쳐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이다.
사부, 천궁, 천룡사, 옥룡, 시간의 돌… 수백 가지 가정을 세웠다 엎었다 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민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바로 이것.
그 스스로가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진가린의 의문은 풀어준 것 같으니 당분간은 이것으로 되었다.
“마음이 좀 편해졌으면 이제 우리도 출발해볼까?”
“어머, 전 마음 불편했던 적 없다니까요!”
* * *
강서성 유월산 계곡.
산이 험하고 제대로 된 길이 없어 찾는 이가 없는 곳.
그렇기에 약초꾼과 심마니에게는 최상의 장소였다.
험한 비탈을 기어서 다녀야 했지만 언제나 보퉁이 가득 약초를 캘 수 있었고, 심심치 않게 귀하고 비싼 약초도 발견되는 것이다.
대대로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지만, 언젠가부터 약초꾼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몇 명의 실종, 귀신과 악귀가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
약초꾼 우두머리가 용한 무당을 불러 굿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계곡 안은 혈향을 풍기는 짙은 안개가 더욱 짙어졌고, 결국 산짐승들마저 떠나버린 흉지가 되었다.
달빛이 어스름한 밤.
이제는 유령계곡이라 불리는 그곳을 누군가 거닐고 있었다.
썩은 낙엽들이 쌓여 매우 미끄러웠지만 꽤 고강한 무공을 익혔는지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십삼 호, 이 자식이 어디 있는 거지?
어디 숨어서 자고 있는 건가? 아무리 졸려도 교대 시간에 사라지면 어떡하라고!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저 멀리 무언가 희끗거리는 게 보였다.
저건 뭐지?
안력을 집중해서 제대로 보려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공간을 건너뛴 그것이 손가락을 찔러 왔다.
헉. 진짜 유령이 있구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사내가 정신을 잃었고, 진가린은 얼른 쓰러지는 사내의 몸을 붙들어 조용히 눕혔다.
“제법이구나. 경공이 정말 많이 늘었어.”
뒤에서 지켜보던 강한월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삼십 장을 가로질러 경비 무사의 혼혈을 짚는 진가린의 속도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헤헤, 천마께서 주신 경공이 저한테 딱 맞는 것 같더라고요. 수련을 할수록 재미도 붙고….”
물론 천마가 하사한 무영보가 보기 드문 초상승의 절기인 것은 맞다.
하지만 대단한 절기일수록 익히기는 더 어려운 법.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평생을 걸쳐 연마해도 부족할 수 있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오의를 터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그녀의 검도 경공만큼이나 발전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강호는 조만간 역사에 길이 남을 여고수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녀의 사부인 장학송 문주의 수준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일수도….
“방심하지 말고 계속 연마하도록 해. 앞으로는 무영보의 색깔을 버리고 동방선도의 선기와 융화하는 데 집중해야 할 거야. 그래야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을 테니.”
“알아요.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마침 적당한 사례도 찾았거든요. 유심히 관찰하고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무슨 사례?”
“단장의 경공이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방금 전에도… 진가린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마치 유령을 뒤에 달고 다니는 느낌이랄까?
자신이 아무리 전속력으로 무영보를 펼쳐도 강한월은 딱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따라왔다.
그것까지는 이상할 게 없었는데, 원래 강한월이 자신보다 훨씬 더 고수이니까, 그렇게 폭발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와중에도 아무런 기(氣)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 단둘이 움직이면서 일부러 기척을 숨기려 노력했을 리도 없고.
예전에 마불진경의 무공을 펼칠 때면 불가의 장엄한 기운이던 마교의 짙은 어둠이든 혹은 금검문의 찬연한 예기든 어쨌든 뭐든 느껴지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아예 없었다.
황당했던 건 단 한 번 어떤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마치 자신이 익숙한 동방선도의 선기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경공이 더 높은 경지에 오르면 강한월이 펼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 무공이 어떤 건지 나도 모르겠어.”
“모른다고요?”
“그래. 그래서 이곳에 온 거야. 여기 온 목적 중 하나가 내 무공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니까.”
* * *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여러 채의 건물들.
무언가 썩는 냄새를 풍기는 안개가 자욱한 바깥쪽과는 달리 건물들이 들어선 이곳은 나름 쾌적했다.
밖의 안개가 진법과 기관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증거.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고요와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밖에선 안 들릴 뿐,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한창 격론이 오가고 있었는데.
“형님! 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본가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허, 율성이 자네 어린애처럼 뭐 하는 건가? 이건 단순히 우리 남궁세가를 위한 일이 아닐 세. 정파 무림맹, 나아가 천하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천하를 위한 일이냐고요? 솔직히 형님도 모르지 않습니까?”
“자네… 지금 태상가주, 아니 맹주님의 말씀을 못 믿겠다는 뜻인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은 사촌지간인 남궁율적과 남궁율성이었다.
둘 다 남궁세가의 직계로서 현 가주가 그들의 오촌 당숙이니, 태상가주에게는 육촌 손자들인 셈. 충성심도 높고 실력도 뛰어난 편이라 세가의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맡아왔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맡은 임무가 남궁율성의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당연히 태상가주님을 믿지요.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투성이지 않습니까? 그 복면을 쓰고 있는 기술자들. 풍기는 기운이 딱 사교의 술사들 같던데, 그런 자들이 만드는 괴물들로 무슨 무림맹과 천하를 지키겠다고….”
“율성!”
“저는 솔직히 무섭다는 말입니다! 형님도 어제 보셨지 않습니까? 아직 미완성인데도 그 괴인들이 어떤 위력을 보이는지. 만약 제대로 완성이 된다면 우리 남궁세가의 고수들도 감당치 못할 무적의….”
“흥, 턱도 없는 소리. 우리가 만드는 무기를 왜 우리가 걱정한다는 말이냐?”
“뭘 알아야 걱정을 멈추죠.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을 상대하려고 제조되고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태상가주님께 직접 여쭙기 힘들면, 장로를 맡고 계신 당숙들 중 한 분께라도 여쭈어야….”
“휴우. 장로님들도 모르신다.”
“네?”
“이미 몇 분께 여쭤봤어. 그분들은 우리만큼도 모르시더군.”
“아니, 그런데도 아무도 태상가주님께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쩌자고 우리 남궁세가가 이렇게 비밀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는지….”
남궁율적이 사촌 동생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달래 줄 방법이 이런 것밖에 없는 걸 한탄하면서.
“그래도 태상가주님을 원망해서는 안 돼. 그분도 원해서 하시는 일은 아니라고 하니까.”
“원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래. 무림맹의 맹주 자리에 앉으셨으니 책임감 때문에 하시는 일이라고 하더군.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서.”
“왜 꼭 해야 하는데요?”
“그것이… 명을 받았다고 하더군.”
“아니 누가 감히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아니 무림맹의 맹주님께 명을 내린다는 말입니까?”
“누구기는 누구겠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한 명뿐이지.”
“혹시… 그… 북경의?”
“쉿! 목소리가 크다. 어쨌든 맞아. 이건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더구나.”
“황제가 도대체 왜요?”
“그것까진 나도 듣지 못했다. 둘 중 하나겠지. 이 무기들을 국경으로 보내 이민족 오랑캐들을 싹 정리하려는 것이거나, 혹은….”
“혹은… 천마신교를 멸하려고요?”
남궁율성의 머릿속에 갑자기 마교가 떠올랐다.
싸우는 데 이 정도 무서운 무기가 필요한 집단은 오직 그들밖에 없으니까.
“내 생각도 그렇다. 마교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그래서 나도 기분 나쁘지만 꾹 참고 이 임무를….”
남궁율적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밖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졌기 때문이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