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예행 연습 (6)
* * *
진가린이 곁에서 호위를 해주자 강한월은 비로소 투명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는데, 실은 이것이 매우 중요했다.
마음이 관건이기 때문.
만약 마음과 심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면 투명검은 그저 이기어검의 변형일 뿐이고, 그것은 절대 심검으로 나아가는 방편이 되지 못할 테니까.
한편, 혈주들이라고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한데 모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서 그들에게 무기를 줘라!”
남궁율적이 명령을 내리자 오대세가의 무사들이 검과 도를 던져줬다.
무기를 짚는 사이 다시 한 명의 목이 날아갔지만, 결국 남은 열넷의 혈적은 도검으로 무장하고 진용을 재편할 수 있었다.
우우웅.
진법 비슷한 것을 이룬 혈적들의 몸에서 거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한 명 한 명이 초절정 이상의 기운을 뿜어냈는데, 당연한 것이 이들은 사실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던 악인들이었던 것이다.
무림맹이 나서서 잡아들일 정도면 꽤나 대단했던 고수들. 게다가 비술을 통해 공력이 수 배로 강화되었으니 지금 이 열넷은 소림사 십팔나한과 붙어도 이겨낼 강자임이 분명했다.
강한월도 물론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위압감이 풍겨왔다.
그래서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적은 강할수록 좋으니까.
“우리도 함께 싸운다!”
마침내 남궁율적도 검을 뽑았다.
괴인들의 모습에 눈이 찌푸려지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이기고 볼 일.
남궁율적 형제가 검기를 쭉 뽑아내며 전면에 서자 오대세가의 무사들도 이를 악물고 뒤를 받쳤다.
“가자! 침입자를…. 어?”
막 기세를 올리던 남궁율적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할 경우 사고가 정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공중을 비행하던 투명검이 혈주 하나의 목을 노렸는데, 혈주가 강한 검기를 뿜어내며 투명검을 강타한 순간 십여 개의 작은 투명검으로 분해되더니 나머지 혈주 모두의 몸에 틀어박힌 것이다.
혈주들이 이루고 있던 진세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절반은 즉시 목이 날아갔고, 나머지도 팔다리에 커다란 검상을 입었다.
“이… 이럴 수가!”
남궁율적과 바람막이 술사의 입에서 동시에 한탄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알고 있던 것이다. 혈주들의 몸이 얼마나 강한지.
수많은 비술과 약물로 강화시킨 뼈와 살은 가히 금강불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두가 죽거나 부상을 입다니.
“이게 도대체 뭐요? 마교의 최강자들도 쓰러트릴 수 있는 무기라더니… 단 한 명을 막지 못하고!”
“흥, 이게 어찌 내 잘못이오? 비술 제련이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출동시킨 당신 잘못이지 않소! 오대세가의 정예 무사들이 경비를 서 준다고 하여 내 믿었건만… 쯧쯧.”
“뭣이라? 감히!”
“당신이 여기 책임자이니 빨리 결정이나 내리시오. 계속 맞서 싸울 거요 아님 후퇴요?”
바람막이 술사의 말이 맞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는 일. 당장 어찌해야 하나 결정하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이 역시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는데…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강한월과 진가린이 쇄도해온 것이다.
“단장, 그 무공 연습은 더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남은 혈주들과 무사들을 향해 뛰다가 진가린이 슬쩍 물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되었어. 진이 빠져서 더 할 수도 없고.”
강한월은 매우 피곤해 보였고, 실제로도 당장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공력을 소진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닌데, 심력을 모두 소모했던 것.
투명검을 만들고 조종하는 모든 것에 온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너는 제조실을 처리해.”
팔 한쪽이 덜렁거리는 혈주에게 주먹을 뻗으며 강한월이 말했다.
“알겠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혈주들이 몰려나왔던 건물로 방향을 돌리며 진가린이 답했다.
그 순간 강한월이 대충 뻗은 주먹에 맞은 혈주의 머리가 퍽 터졌다.
헤헤, 내가 괜한 걱정을….
그의 피곤한 표정이 맘에 걸렸던 진가린은 밝게 웃으며 달려갔다.
퍽, 퍼억, 퍽.
강한월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어김없이 혈주의 머리가 하나씩 날아갔다.
아무리 투명검에 베여 부상을 입었다고 한들, 보고도 믿기 힘든 무위.
게다가 더 놀라운 건 권강을 두르고 휘두르는 지고한 권법도 아닌, 그냥 대충 휘두르는 주먹 같아 보인다는 것.
퍽.
마지막 혈주의 머리가 터져버리자 남궁율적을 비롯한 오대세가의 무사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의 차례이기 때문.
“자, 잠깐. 뉘신지는 모르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우리는 사실 무림맹 소속의….”
“오해는 없소. 당신들이 무림맹 소속인 것도 알고 있고. 그리고 혈교의 괴인을 제조하고 있다는 것도.”
“그게 오해라는 겁니다! 혈교라는 이름은 당최 들어본 적도 없소!”
남궁율적은 사력을 다해 오해라고 외쳤다.
혈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렸다고 믿는 것 같았다.
강한월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대세가의 무인들을 죽일 생각은 애당초 없었으니까.
하지만… 붉은 바람막이를 걸친 저 사내는 예외였다.
“거기 당신. 당신도 혈교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소?”
갑자기 지목받자 바람막이 사내의 몸이 흠칫 굳었다.
남궁율적을 비롯한 무사들의 눈길이 쏟아졌다.
혹시 그가 혈교를 안다고 말할까 걱정하는 눈빛, 제발 모른다고 말하라는 무언의 압력.
“나… 나는….”
“설마 모른다고 하려는 거요? 혈교를 모른다면 혈주 괴인을 만드는 비술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요?”
바람막이 사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혈교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혈주라는 이름도 정확히 알고 있다니!
혹시 교와 관련된 사람인가?
막 혈교를 모른다고 부정하려던 사내가 갈등에 휩싸였다.
도저히 앞뒤가 안 맞기는 하지만, 혹시 이자가 교에서 파견된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교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자살행위가 될 터.
“당신 뭘 망설이는 거요? 어서 혈교를 모른다고 말하지 않고?”
바람막이 사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하자 남궁율적이 호통을 쳤다.
정말로 열 받는 것은, 혹시라도 혈교라는 이름부터 사이한 곳과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던 것.
그건 모든 오대세가 무사들이 마찬가지였다.
강한월의 입장에선 잘된 일이었다.
무림맹과 오대세가 내부에서 현 맹주에 대한 의심이 싹트면 조직력이 약화될 테니까.
남은 건 이 술법사를 어떡하냐는 것뿐인데….
사실 예전의 강한월이라면 고민 없이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이다.
아무리 뇌옥에 수감되어 있던 악질 죄인이라고 한들 인간의 몸에 비술을 걸어 혈주로 만든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금지된 비술을 익히고 있으니 살려 두면 세상에 해만 될 뿐.
하지만 강한월은 망설였다.
갑자기 연민이 생겼다거나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심상으로 검을 다루는 연습을 하면서 마음속에 자꾸 살심이 생겨났다.
심장에 검을 하나 키우고 있는 것 같았고, 마치 살기가 그 검을 키우는 자양분인 듯했다.
그렇기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설사 이것이 심검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 한들, 강한월은 살기에 물들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콰아아앙! 콰아아앙!
그 순간, 건물 지하에서 연달아 두 번의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사방 수십 장의 땅이 들썩거릴 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지하에서 괴인 제조시설을 찾아낸 진가린이 천뢰 두 발을 던져 넣은 결과였다.
“어휴, 이거 전의 것보다 더 센 것 같아요. 하마터면 폭발에 휘말릴 뻔했네.”
시커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진가린이 툴툴거리며 돌아왔다.
“수고했다. 이만 가자.”
시설을 폭파시켰으니 이것으로 임무는 끝.
더 이상 바람막이 술법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정말로 가는 걸까?
강한월과 진가린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남궁율적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누구였을까?”
“마교 놈들 아닐까요? 나이도 어린데 저런 실력이라니… 정파에는 이 정도 후기지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네요.”
역시 반쯤 혼이 나가 있던 남궁율성이 대답했다.
“마교? 흠… 어쩌면 그럴지도.”
마인이라 의심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지만 남궁 형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합리적 의심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상부에 어찌 보고해야 할지 적당한 핑곗거리가 필요할 뿐.
뭐라고 보고를 하던 엄청난 문책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갑자기 골치가 아파 와 남궁율적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 이게 다 저 기분 나쁜 자들 때문이지.
“거기 당신! 도대체 지금까지 뭘 숨긴 거요? 혈교는 뭐고 혈주는 또 뭐지?”
슬금슬금 뒷걸음치고 있던 바람막이 술사가 남궁율적의 눈에 딱 들어왔다.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는데, 이제 보니 남궁율적뿐만 아니라 모든 오대세가 무사들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당장 전서구를 날려야 한단 말이외다.”
“전서구? 보고를 해도 내가 할 테니 당신은 가만히 있어! 그리고 보고를 위해서는 우선 당신을 심문해야 할 것 같은데.”
“다,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 조금이라도 책임을 줄이려면 지금 당장 전서구를 날려야 한다는 말이오!”
“헛소리!”
남궁율적과 바람막이 술사가 서로를 향해 호통을 쳤다.
한참을 기 싸움을 벌였고, 어찌어찌하여 결국 바람막이 술사는 전서구를 날릴 수 있었다.
이것은 강한월에게는 뼈아픈 일이 되었다.
살육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술사를 살려준 것을 스스로 대견하다 생각했지만, 사실 그러면 안 되었던 것이다.
* * *
타닥타닥.
모닥불 장작 타는 소리가 꽤 정겹게 들려왔다.
계곡을 벗어나 한참을 달린 강한월과 진가린은 이름 모를 들판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단장. 그래서… 어땠어요?”
“어떻다니? 뭐가?”
“에이 다 알면서… 새로운 무공을 시험한 거요. 어땠는데요?”
“글쎄다. 네가 보기엔 어땠는데?”
불 속에 잔가지 몇 개를 던져 넣으며 진가린은 기억을 되새겼다.
강한월의 손에서 불쑥 튀어나와 하늘을 비행하던 투명검.
생전 처음 보는 감탄스러운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엄청나던데요. 혈주라는 괴인들도 순식간에 처리했잖아요.”
진가린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강한월은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강한 위력은 아니야. 어차피 수련하는 과정이지 당장의 위력은 큰 의미는 없어.”
진가린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투명검의 위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솔직히 소림사에서 부상을 당하기 전 강한월의 무공도 그보다 못할 건 없었다.
마불진경의 무공을 썼더라도 혈주 열 몇 명 정도는 순식간에 해치웠을 테니까.
“그래도 대단히 신기한 무공이던데요? 위력을 떠나서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접어든 거 아닌가요?”
“음… 새롭긴 한데….”
강한월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새로운 것은 맞는데, 과연 이것이 심검으로 향하는 올바른 길인지가 확실치 않았다.
사마염 사백이 가져다준 사부의 편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지만, 그 편지조차도 정확한 수련 방법을 알려주진 않았던 것이다.
걱정이 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류의 무공은, 특히 심상을 사용하는 무공은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지면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
주화입마나 성정이 망가지는 부작용도 간과할 수 없고.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다. 조금 더 확인을 해야 감이 잡힐 것 같아.”
“그렇군요. 뭐 잘됐네요. 처리해야 할 혈교의 기지가 한 곳 더 남았으니. 그곳에서 다시 확인해봐요. 뒤는 제가 든든히 지켜드릴 테니.”
“그래. 고맙다.”
강한월은 억지로 눈을 붙였다.
내일은 또 쉬지 않고 달려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