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하북 비밀기지 (2)
* * *
적운각(赤雲閣)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은 사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에 불과했다.
시뻘건 안개가 건물 주위로 자욱하게 깔려 있으니 말이다.
이 안개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고 진법이나 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바로 괴인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피와 약품의 증기가 밖으로 배출되고 있던 것.
“분위기가 영 으스스하네요.”
“쉿!”
위청보가 별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가 곧바로 핀잔을 들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지만 적운각 구역으로 들어섰으니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 맞았다.
—이제부터는 전음을 써라. 그것도 꼭 필요할 때 아니면 자제하고.
사마염이 모두에게 주의를 준 후 다시 전진했다.
그렇게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 첫 번째 관문이 된 것은 지하 계단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 두 명.
쉬익.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광군영이 번개처럼 쇄도해 양손을 뻗었다.
경비 무사는 나름 일류 고수였지만, 천마의 특별 교육 후 절대경에 오른 광군영을 막는다는 건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
쓰러지는 경비들의 멱살을 잡아 조용히 구석에 치워 둔 광군영이 다시 앞장섰다.
* * *
‘후우…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원숭이의 얼굴에 극한 희열이 번졌다.
어째서 천인살 대법의 마지막을 음양인으로 장식해야 하는지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지금껏 구백구십구 명의 피와 정기를 흡수했던 것이 음양인의 피를 통해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흐흐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방금 전 제물로 삼은 죄수는 정말 최상의 음양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동정의 몸이었고, 때 타지 않은 순수한 음기와 양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뭐 그리 억울한 삶을 살았는지 마음속에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가득했고, 그런 어두운 마음이 살기가 되어 핏속에 녹아 있었다.
이 또한 천인살 비술의 효과를 높여줄 강점이었다.
시체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 테니 다시 태어날 땐 평범한 몸으로 태어나시게. 흐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죄수를 향해 원숭이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반 시진만 흐르면 음양인의 기운이 완전히 녹아들 것이고, 이후 마지막 운기행공을 하고 나면 자신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강해질까?
초월경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건 자신할 수 없지만, 분명 초월경에 근접한 힘을 낼 수 있을 것은 분명했다.
물론 이것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쥐는 말할 것도 없고 뱀, 용, 호랑이도 이보다 강하니까.
하지만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천인살을 성공시키면 만인살의 길이 열리는 것이고, 쉽진 않겠지만 만인살 대법마저 완성한다면….
그런 즐거운 생각을 하던 원숭이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수석 술법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황사님! 접니다. 잠시 뵐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잊은 것이냐?”
감히 자신의 명령을 뭘로 알고!
원숭이는 정말로 화가 났다.
지금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음양인의 정기를 흡수하고 있을 때 이런 방해가 있었다면 대법에 큰 차질이 발생할 수도 있었으니까.
“제가 어찌 황사님의 명을 잊겠습니까. 다만… 비상 상황이 발생하여 어쩔 수 없이….”
“비상? 무슨 일인데?”
“경내 순찰을 돌던 무사 한 명이 기절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침입자가 있다는 것이냐? 흥, 침입자가 있으면 경비대가 나서면 될 일. 내가 그런 일까지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냐!”
듣고 보니 별 같잖은 이유였다.
누가 감히 이곳을 침입한다는 말인가? 분명 경비병이 졸고 있던 거라고 원숭이는 생각했다.
설사 진짜 침입자가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여기서 제조 중인 무기를 생각하면 절대고수가 쳐들어온 들 막아내지 못할 리 없으니까.
“그게… 발견된 무사의 상태가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상한데?”
“제가 살펴봤는데 아무래도 섭혼술에 당한 것 같았습니다.”
“섭혼술?”
이제야 원숭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섭혼술이란 말에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문무대 놈들이.
“예. 저도 명색이 수석 술법사 아닙니까? 제 판단으론 섭혼술 중에서도 천마신교의 술법 같았습니다.”
섭혼술… 게다가 천마신교!
기뻐하는 것인지 분노하는 것인지, 원숭이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얼굴은 곧 깊은 고민으로 뒤덮였다.
어떡한다?
오늘 밤만 조용히 집중하면 천인살을 대성할 수 있는데….
하지만 쳐죽일 문무대 놈들일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완성된 혈인들은 몇 구나 되지?”
“전부 다섯 구입니다. 현재 이곳 지하실 관 속에 보관 중입니다.”
“모두 데려와. 오늘 끝장을 본다.”
결심을 한 원숭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
우드득. 샤악.
광군영이 괴인의 목뼈를 으스러트리는 순간 사마염의 금빛 검이 다른 괴인의 목을 갈랐다.
벌써 열댓 명째.
초반엔 경비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지하로 내려오니 일반 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괴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상급의 괴인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비 무사들과는 차원이 달랐고, 광군영 혼자 여럿을 그것도 소리 없이 처리하기는 힘들어 사마염이 한 팔 거들고 있었다.
—경비가 더 삼엄해진 걸 보니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그래, 저기 저 철문 뒤인 것 같다. 사악한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구나.
사마염이 철문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경비 수준도 높지 않으니 일을 처리한 후 탈출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물론 철문 안쪽에는 엄청난 괴인들이 있겠지만, 그들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과 광군영이 한 개씩 지니고 있는 천뢰가 대신 싸워줄 테니까.
—저 문을 여는 순간 더 이상 은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는 속도와 시간이 중요해. 최대한 신속하게 몰아친 후 바람처럼 빠져나간다. 알겠지?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인 후 대열을 갖췄다.
사마염과 광군영이 선두, 그 뒤를 곽철과 소영영이 받쳤고 맨 뒤에 위청보가 섰다.
위청보의 역할은 뒤에서 공격해오는 적은 없는지 감시하며 퇴로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오는 동안 곳곳에 감지 부적을 붙여 놓기도 했다.
—시작하자!
사마염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검을 들고 철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이익.
콰아앙!
종이쪽처럼 찢어지며 활짝 열린 문.
그 안으로 광군영이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펑, 퍼엉.
문 근처에서 경비를 서던 괴인 둘이 육합흑철마장에 맞고 날아갔다.
깜짝 놀라 달려오던 다른 괴인들은 사마염의 검과 소영영의 비도에 목이 베어졌다.
그렇게 아수라장이 펼쳐진 틈으로 곽철이 미꾸라지처럼 달려갔다.
콰앙.
날랜 발차기로 중간 문을 박살 내고 뛰어든 곽철이 거친 숨을 토했다.
설마 이게 전부 다…?
거대한 안쪽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수백 개의 욕조.
시뻘건 액체 안에 담겨있는 알몸의 죄수들.
그리고 가장 중앙에는 훨씬 더 거대한 욕조 다섯 개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짙은 검붉은 빛의 끈적한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찾았어요! 여깁니다!”
곽철이 소리를 지른 것과 피익 하는 호각 소리가 울린 것은 동시였다.
사마염 등은 경비 괴인들을 모두 처치하고 달려왔고, 호각 소리에 반응한 욕조 속 괴인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이런. 저것들이 또…!”
욕조를 본 광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광군영. 이 괴인들에 대해 아는 게 있나?”
“혈의병(血蟻兵)이라는 것들입니다. 강한월 단장과 함께 장준검 천호를 구하러 갔을 때 본 일이 있지요.”
“강한 놈들인가?”
“무력은 그리 강한 게 아닌데… 죽지를 않아요. 그때도 천뢰를 써서 겨우 동굴 속에 매장해버렸습니다.”
사마염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도 천뢰는 가지고 있지만 상황이 달랐다.
동굴이라면 입구를 폭파하는 것만으로 매장시킬 수 있지만, 여기는 일반 건물.
죽지 않는 괴인들이라면 무너진 건물 정도야 쉽게 헤집고 나올 터였다.
“천뢰를 아주 정확히 터트려야 하겠군. 저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그 중앙에서 터트려야만….”
“잠깐만요, 원로원주님. 저기 저것들은 특별히 위험해 보여요.”
소영영이 중앙의 거대한 욕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녀 후보인 그녀는 비술의 파장을 남보다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거대한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괴인들에게서 매우 위험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디선가 분명 느껴본 듯한.
그게 어디였더라…?
“맞아요! 기억났어요. 그것들과 같은 종류예요. 소림에서 송목대사와 방장대사를 궁지로 몰았던 음양혈인!”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송목대사마저도 고전하게 만든 괴인이라면 자신들 모두가 덤벼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천뢰를 터트려도 죽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분명 같은 종류예요. 하지만… 소림에서 본 음양혈인보다는 많이 약한 것 같아요. 아마 비술이 완성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
최악보단 다행이라는 거지 절대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욕조에서 기어 나온 괴인들, 거대 욕조에서 일어서고 있는 미완성 음양혈인들을 바라보며 사마염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저것들이 흩어지게 하면 안 돼. 최대한 중앙에 모여서 싸운다. 음양혈인은 위험하니 나와 광군영이 맡고, 나머진 곽철과 소영영이 상대해.”
“네. 하지만… 그다음에 어떡하죠?”
“저것들이 충분히 한곳에 모이면 신호를 보낼 테니 너희가 먼저 탈출해. 내가 남아서 저것들을 묶어 놓다가 천뢰를 터트리겠다.”
“안 돼요!”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시간이 없으니 어서 빨리 움직여!”
사마염이 금빛 검광을 흩뿌리며 혈의병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혼자서 싸우게 놔둘 수는 없으니 광군영과 곽철도 따라서 뛰었다.
하지만 소영영은 제자리에서 머뭇거렸는데….
“소 사매, 뭐 하는 거야?”
맨 먼저 만난 혈의병의 머리를 박살 내며 광군영이 뒤돌아 물었다.
하지만 소영영은 대답할 생각은 않고 갑자기 입구 쪽을 향해 뛰었다.
설마 혼자 도망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어쨌든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혈의병들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쿠웅, 쿠르르릉, 콰앙!
한편, 제조실의 입구를 나선 소영영은 다급히 위청보를 찾았다.
“청보. 모산파 진산 부적… 최상급으로 모두 꺼내 봐.”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보물 보따리를 풀어 놓으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소영영의 표정이 하도 심각하기에 위청보는 부적 주머니를 얼른 꺼냈다.
“그중에 폭발력을 견디게 해주는 것도 있어?”
“방어용 귀갑(龜甲) 부적이 있고, 땅속으로 은신하는 토둔(土遁) 부적도… 왜요? 설마 천뢰를 견딜 부적을 찾는 거예요? 에이, 그건 못 버텨요!”
“그러면 꼭두각시를 부리는 부적은?”
“괴뢰(傀儡) 부적이요? 그건 있죠. 이매(魑魅) 부적이 그런 건데… 하지만 그건 모산파에도 몇 장 안 남은 정말 귀한 거라고요!”
있으면 된 거지 뭐.
그게 얼마나 귀한 건지는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영영이 위청보의 손을 잡아끌며 안쪽으로 뛰었다.
“저도 들어가요? 퇴로를 지키는 건 누가 하고요?”
“지금 퇴로가 중요한 게 아니야!”
소영영이 돌아왔을 때, 제조실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계획대로 사마염, 광군영, 곽철은 괴인들을 한 곳에 몰고 있었다.
수백 명의 혈의병에 둘러싸여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막 정신을 차린 음양혈인들이 그들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소 사매, 빨리 거들어! 이러다간 아무도 못 빠져나간다고!”
소영영이 귀면비를 뽑아 들고 혈의병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위청보도 침을 꿀꺽 삼키며 부적을 손에 쥐었다.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