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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50화 (127/210)

150화. 혈승 대 혈승 (2)

* * *

말은 시장에서 물건이라도 고르는 듯 쓰러져 있는 광군영, 위청보 등을 요리조리 살폈다.

“흠… 이거 고민이군. 하나같이 다 원한이 깊은 놈들이라 누굴 골라야 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영영에게 눈을 깜박였는데, 시간을 끌게 맞장구를 쳐 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소영영은 그 신호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가장 원한이 깊은 사람을 찾는 거라면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을 텐데요?”

“무슨 뜻이지? 대장인 강한월에게 책임을 넘기는 건가?”

“그럴 리가요. 솔직히 강한월 대장도 말 혈승 당신과는 큰 원한은 없잖아요.”

“강한월에게 큰 원한이 없다니? 그럼 내가 누구에게 원한을 가져야 하지?”

“당연히 아끼는 동료를 죽인 사람에게죠. 바로 돼지 혈승을 죽인 사람.”

순간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말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원숭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시간을 끌기 위해 대화를 하자는 거였지만, 이건 소영영이 너무 나간 것.

자칫 원숭이가 광분할까 걱정이 되어 말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닥쳐라! 이 요망한 것이 어디서 이간질을 하는 것이냐? 돼지를 죽인 것은 바로 너희 문무대가 아니더냐!”

“그렇지 않다는 건 말 혈승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돼지 혈승, 그리고 토끼 혈승이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혈령을 누가 흡수했는지….”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짐짓 분노한 듯, 말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원숭이의 살기가 치솟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기에 자신이 먼저 화를 내는 척해야 했다

자칫하면 시간을 끌기는커녕 소영영 먼저 죽게 생긴 상황.

이 똑똑한 여자는 어째서 이렇게 눈치 없이 말을 막 하는 걸까?

말은 소영영의 행동을 이해 못 했지만, 민 문주는 달랐다.

소영영의 말에서 어떤 단서를 찾은 것이다.

동료 혈승 두 명의 혈령을 흡수한 원숭이. 그렇다면 그의 혈령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소리인데?

민 문주가 슬쩍 눈을 돌려 음양혈인을 응시했다.

음양혈인에 대한 명령권을 가지는 것은 혈령을 주입한 자.

하지만 그 혈령이 순수하지 못하다면…?

그래, 어쩌면 그 방법이 통할지도….

“이보게 말. 도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줘야 하나?”

“잠시만 기다리게 원숭이. 이 요녀가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아직 고르지를 못했어.”

“그러지 말고 소영영부터 죽이게. 그년은 내가 자네에게 양보할 테니.”

원숭이의 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말은 시간을 끌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고, 소영영은 죽음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뭐 굳이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이 마교의 요녀를….”

난감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우선 소영영을 몇 대 가격한 후 다시 시간을 끌어야 하나 고민할 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원숭이. 그런데 이자는 풍기는 기운을 보아하니 과거 뱀이 자주 사용하던 것이군. 이름이 아마 음양혈인이었지?”

민 문주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지더니 뚜벅뚜벅 음양혈인 앞으로 걸어갔다.

“뭐… 맞습니다만. 웬일로 갑자기 소 형께서 비술 괴인에 관심을 가지시고…?”

원숭이가 조금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답했다.

소영영을 얼른 죽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만, 민 문주의 질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력은 약하지만 어쨌거나 한 분야의 수장.

게다가 명색이 자금 담당이니, 천하일통의 큰일을 앞둔 지금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냥 궁금해서 말일세. 그런데 이건 뱀만 조정할 수 있는 걸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원숭이 자네도 할 수 있나 보군?”

“허허, 물론 저도 할 수 있지요. 혈인의 상단전에 혈령을 주입해 동조시키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요. 실은 소 형도 하실 수 있답니다. 물론 저 혈인은 이미 제 혈령이 주입되어 있기에 불가능하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런 것이었군. 실은 어렵지 않은 거였어.”

민 문주가 천천히 걸으며 손끝에 혈령의 힘을 모았다.

기회는 단 한 번.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계산할 수 없었지만 이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소 형. 그리 가까이 다가가실 필요는… 음양혈인에 대해 궁금하시면 일단 이것들을 죽인 후에 제가 설명을 드릴 테니… 엇?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뒷모습이라 어느 정도 가려질 줄 알았지만, 완전히 가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민 문주가 손가락 끝을 깨무는 걸 본 원숭이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제는 말이 필요 없는 단계.

민 문주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음양혈인의 이마를 피 묻은 손가락으로 찍었다.

“멈춰! 뭐 하는 짓이냐!”

원숭이는 이제 존댓말도 쓰지 않았다.

전직 살수답게 날카로운 살기를 일으키며 민 문주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민 문주가 원숭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샥~

발사체를 격발하는 폭음이나 공기를 찢는 파공성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긁는 듯한 자극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을 뿐.

하지만 절대의 끝자락에 다다른 원숭이의 예민한 감각이 즉각 반응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엄청난 위험.

“하아압!”

원숭이가 기합을 지르며 용을 쓰자 순식간에 강철 같은 호신강기가 일어나 몸을 감쌌다.

한 겹으로는 불안했는지 두 겹 세 겹 누에고치처럼 둘러싸 몸을 보호했는데.

그제야 원숭이는 안심할 수 있었다.

절대고수가 펼치는 강기 공격이나 설사 폭탄이 터진다 하더라도 이 정도 호신강기면….

샥~

하지만 원숭이의 자신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호신강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그것은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반투명한 얼음조각 같았다.

민 문주가 발사한 구유탈혼총의 탄환.

탄환의 표면이 호신강기에 닿는 순간 강기막이 너무도 쉽게 녹아버렸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탄환은 실은 사천당가의 독의 총화인 무형지독을 극음의 기운으로 얼려 놓은 것으로서, 접촉하는 것은 강철이던 강기막이던 모두 녹여버리는 무서운 독이었다.

“크으읍!”

깜짝 놀란 원숭이가 모든 힘을 쥐어 짜내 호신강기를 보강했다.

탄환은 이미 지척에 도달해서 몸을 돌려 피할 여지도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 공력을 분산할 경우, 호신강기가 약해지면서 탄환이 즉시 몸에 박힐 것 같았다.

샤악~

다시 한번 울리는 기분 나쁜 소리.

두 번째 강기막이 녹아 사라지는 소리였다.

이런 제기랄….

원숭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호신강기로 얼음조각을 막을 수 없다는 게 확인된 이상, 저걸 막을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역시 그 수밖에 없는 건가?

원숭이는 팔을 하나 버릴 각오를 했다.

왼손을 뻗어 얼음조각을 붙잡고, 독 기운이 몸에 퍼지기 전에 왼팔을 벨 작정이었다.

쉬익~ 탁.

원숭이가 얼음조각을 잡았고, 동시에 쫙 핀 오른손에 날카로운 강기를 일으켜 왼팔을 베어갔다.

말은 길었지만 생각에서 행동까지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

하지만….

“크어억.”

원숭이는 왼손을 베지 못하고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얼음조각을 잡으려는 순간, 조각이 수십 개의 작은 알갱이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비산한 것이다.

알갱이들은 양팔은 물론 허리, 가슴, 허벅지 가리지 않고 박혀 들었다.

“이… 이건… 구유탈혼총이었구나!”

“빨리도 알아보는군.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걸 너에게 썼으니 영광으로 알아라.”

“야… 이 배신자 새끼야! 어… 째서 같은 동료인… 나를….”

무형지독이 온몸으로 퍼지자 원숭이는 입을 열 힘도 없었다.

하지만 죽을 땐 죽더라도 이 의문을 풀어야만 했다.

도대체 왜 소가 혈교를 배신했는지.

“배신자? 누가 배신자이지? 돼지와 토끼를 죽인 너인가, 아니면 동료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는 나인가?”

“그래… 결국 그것 때문인가? 이제 보니… 복수를 하러 왔다는 말의 이야기는 사실이었군. 하지만….”

원숭이의 팔다리가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저주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너희도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내 혈령의 지배를 받는 음양혈인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음양혈인이 너희를… 어? 어… 어째서…?”

혈령의 힘을 쏟아부어 명령을 내렸지만 음양혈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다. 음양혈인에 대한 네 지배권은 이미 소멸됐거든. 내가 주입한 혈령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니까.”

“그럴 리 없어! 혈령 주인은 바뀌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원숭이 네 혈령은 애당초 문제가 있었거든. 동료를 잡아먹어 여러 혈령이 혼탁하게 섞여 있으니 음양혈인의 완전한 주인이 되기 힘들었지. 그 상태에서 내 혈령이 들어갔으니 몸이 누구를 주인으로 택했겠나?”

원숭이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혀도 독에 침투당해 녹고 있었다.

하필이면 천인살을 완성하는 날.

소리를 내지도 못했고 뭉개진 표정도 바뀌지 않았지만 원숭이는 웃었다.

그래, 천인살을 완성했기 때문이구나.

천 명의 원한이 하늘에 닿은 것이구나.

공력이 풀린 원숭이가 빠르게 한 줌 혈수로 녹아내렸다.

마지막 숨을 다하는 순간, 원숭이의 몸에서 혈령이 빠져나왔다.

그대로 놔주면 가장 가까운 다른 혈승에게 흡수될 상황.

공중을 배회하던 혈령이 민 문주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말에게로 날아갔다.

눈앞으로 날아온 혈령을 멈춰 세우고 말이 물었다.

“대형. 어째서 혈령이 저에게…?”

“난 좀 전에 대부분의 혈령을 음양혈인에게 주입했네. 내게 남은 혈령이 너무 미약해서 자네에게로 향한 것 같군.”

“저도 거부하면… 이 혈령은 어디로 갈까요?”

“글쎄? 근처에 다른 혈승이 없으니 아마도 저기로 들어가지 않을까?”

민 문주가 손가락을 뻗어 음양혈인을 가리켰다.

그래, 저기라면 상관없겠지.

말이 주저하지 않고 손을 휘저어 혈령을 쫓았다.

잠시 공중에서 갈팡질팡하던 원숭이의 혈령이 휘리릭 날아가 음양혈인의 백회혈로 스며들었다.

“소 소저, 혹시 생령을 담을 수 있는 기물이 있는가?”

민 문주가 소영영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감사를 표하려 막 몸을 일으키던 중이었다.

“일단 인사부터 드릴게요. 저희 목숨을 구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문주님.”

“어색하게 감사는 무슨. 그저 원숭이에게 복수를 했을 뿐이네.”

“그렇지 않아요. 문주님과 말 혈… 승님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생령을 담는 기물은 왜요? 신녀궁에는 있지만 제가 가진 것은 없는데요.”

“흠… 아쉽군. 그런 기물이 있으면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을 듯한데.”

민 문주는 정말로 아쉬운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선물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아직도 두 눈이 풀려 있는 위청보가 비몽사몽간에 말했다.

“저에게… 그런 기물이 있는데요.”

“정말인가? 모산파의 보물이라면 믿을 만하지. 내가 좀 빌릴 수 있겠는가?”

위청보가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실제 무기는 아닌, 여인네의 장신구처럼 보이는 물건인데, 칼집에 낡은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원귀를 봉인하는 칼인데, 꽤나 신성한 보물이에요. 빌려드릴 순 있는데… 어디에 쓰시려고요?”

단도를 받아 든 민 문주가 남아 있던 자신의 혈령 모두를 거기에 주입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말에게 내밀었는데, 잠시 망설이던 말도 혈령을 단도에 옮겨 넣었다.

“자, 다 되었네. 이 단도를 잘 보관하게.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테니까.”

“혈령이 주입된 단도… 이거 혹시…?”

“맞아. 저 음양혈인에 대한 통제권이 이제 이 단도에 옮겨졌지.”

“그럼 이 단도의 소유자가 음양혈인의 주인이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네. 기분 좋은 선물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진 잘 데리고 있게나. 내 혈령 거의 전부가 들어 있고 원숭이의 혈령도 흡수했으니 절대 고수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것이고, 한두 달 혈령 연화가 끝나면 자네들 말을 잘 듣는 충복이 될 테니.”

“감사합니다. 정화에게 전해주겠습니다. 그녀를 지키는 경호원이 되도록.”

“뭐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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