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흑사련의 비밀기지 (1)
* * *
한편, 무림맹 비밀 제조 시설을 폭파한 강한월과 진가린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시간을 단축할 겸, 사람들의 눈도 피할 겸 길이 없는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탁월한 경공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절벽을 뛰어오르고 강물을 밟고 달리는 그들보다 더 유유히 계곡을 건너는 이가 있었는데,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유유히 날아가는 한 마리 매였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매우 강하고 지구력이 좋아 쉬지 않고 천 리를 나는 매였는데, 다리에 작은 대나무 통이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전서를 배달하는 것이 분명했다.
매가 머리 위를 지나는 순간 강한월이 고개를 잠시 고개를 들었다.
멋지게 날아가는구나.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비행을 본 짧은 감상이었다.
강한월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매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목적지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그것도 자신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 * *
한편, 하늘을 나는 매보다도 먼저 그곳에 도착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악연인지, 이미 여러 번 강한월과 엮인 바 있는 정옥수였다.
태어날 때부터 흑사련의 대공녀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진 그녀, 하지만 용이 부친을 죽이고 흑사련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운 이후 그 위치와 권한은 더 확고해졌다.
흑사련 내에서 회귀자와 혈교의 비밀을 공유받은 유일한 사람.
게다가 황실 및 무림맹과의 교신과 협업을 책임지는 임무까지 부여받았으니 흑사련 내에서뿐만 아니라 천하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높은 위치에 오른 셈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예전부터 그녀가 맡고 있던… 그리고 이제는 더욱 중요해진 일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는데, 바로 혈교의 비술 전사들을 제조 육성하는 일이었다.
영생교, 생명원 등의 이름을 사용하여 전사를 만들던 것이 강한월에 의해 생명원이 해체된 이후 주춤할 수밖에 없었는데, 용이 흑사련을 접수하고 황실의 지원을 받게 되자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용과 정옥수는 이 시설에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줄 무기가 바로 이 시설이라 믿었다.
사실 용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데, 황실을 장악한 뱀이 마치 혈승들의 수장이라도 된 양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자 혈승이 없을 때에 한정한 것이지만, 혈승들의 우두머리는 제사장들의 수장인 용 자신이어야만 했다.
고작 사악한 비술이나 부릴 줄 아는 뱀이 신앙의 중추를 이루는 제사장의 위치를 넘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성전(聖戰)을 치를 호교전사를 육성하는 능력은 용에게만 있다는 사실이다.
교를 위해 목숨을 바칠 호교전사 만 명만 준비되면, 아무리 뱀이 황군을 움직일 힘을 가졌다 한들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아버님, 저만 믿으세요. 최강의 호교전사를 육성하여 아버님을 세상 제일 높은 곳에 앉혀드릴 테니. 물론 그 이후에는 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겠지만. 호호호.’
매우 기분 좋은 상상.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대공녀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가 방해받기 싫어하는 걸 잊은 건가요? 오후 회의 시간에 보고하면 될 것을.”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라 판단되어….”
“흥, 누가 당신에게 판단을 하라고 했나요? 판단은 내가 합니다.”
도대체 보고를 하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 시설의 총관은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이 빨개졌다.
“쯧쯧, 사람하고는. 뭐 해요, 빨리 보고하지 않고?”
“아, 넵. 그것이… 무림맹의 제조 시설에서 긴급 전서가 날아왔습니다.”
“무림맹의 시설에서?”
용과 뱀, 호랑이의 비술 제조 시설끼리는 연락망이 갖춰져 있지만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내심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고, 각자의 전력을 노출하는 것이 꺼려지기도 했으니까.
“네. 저희 쪽 기술자가 무림맹 시설에 파견을 나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기술자가 전서를 보낸 것이온데….”
파견을 나간 건 정옥수도 안면이 있는 술법사였다.
비술에 관한 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호랑이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가 보낸 정보라면 관심이 갔다.
“쓸데없는 설명은 빼고 빨리 요점을 말해요! 전서의 내용이 뭐죠?”
“그것이… 무림맹의 강남 제조 시설이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무기들이 완전히 폭파되었다고….”
“무엇이? 누가 감히 그런 짓을…?”
“단 두 명이었다고 합니다. 일남일녀가 바람처럼 나타나서….”
“일남일녀?”
정옥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번에 떠오른 것은 강한월이었다.
소림에서 삼안혈도를 단전에 쑤셔 넣었지만 그가 죽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래, 그 괴물 같은 놈이라면 분명 살아났을 거야. 어쩌면 전보다 더 강해졌을지도….’
정옥수는 추측을 넘어 거의 확신했다.
같이 온 여자 한 명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생명원 사건 때 진상을 피운 진가린이거나 아니면 신룡대회 때 일을 망친 유선일 확률이 높은데,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대공녀님. 전서를 보낸 기술자에 의하면, 적들이 저희 시설까지 습격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곳의 위치는 철저한 비밀이라 가능성은 매우 떨어집니다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흥, 만약은 무슨 만약이에요? 강한월은 반드시 옵니다.”
“네? 강… 누구요…?”
“바보 같은… 됐어요. 여하튼 당신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내가 알아서 대비할 테니.”
“아, 넵. 대공녀님이 직접 나서 주신다면야….”
“그건 그렇고,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전사들이 몇이나 되죠?”
“호교전사가 일천, 성전사가 삼백, 피의 세례를 받은 성직자가 오십입니다.”
“주교는요?”
“두 명의 주교는 혈령의 주입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공녀님께서 직접 가져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품속에는 특수한 자기병이 들어있었다.
용의 혈령이 녹아 있는 피 몇 방울을 담은 병이었는데, 이번에 그녀가 이 시설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주교의 혈령 주입을 즉시 준비하세요.”
“네? 하지만 최상의 몸 상태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달의 기운도 봐야 하고, 또 십이간지를 맞춰 택일도 해야….”
“그딴 거 필요 없으니 빨리 준비나 해줘요! 하루 시간을 주겠어요.”
“하, 하루요? 아… 넵.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총관은 정옥수의 답변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정옥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원수 놈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게다가 자신이 최상의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호호호, 강한월. 제발 더 강해졌기를 바란다. 너도 이 시설에서 최강의 호교전사로 변화시켜 줄 테니. 호호호.’
* * *
강한월과 진가린이 질주를 멈췄다.
지도가 맞다면 이제 봉우리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해 숨을 고르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작해야 할 위치에 온 것이다.
“저 너머에 두 번째 목표가 있는 거네요?”
“그래. 경공을 써서 달리면 반 시진도 안 걸릴 거리지.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은신술을 써서 갈 거야.”
“은신술요? 웬일로 이번에는 그렇게 조심하는 거예요? 무림맹 시설을 습격할 땐 안 그러더니.”
진가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단순히 은신술을 쓰자고 해서만은 아니었다. 강한월의 표정이 전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겠나? 이곳이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지.”
“흑사련의 시설이기 때문에요?”
“그래. 무술 담당인 호랑이보다는 제사 담당인 용의 시설이 몇 배는 더 강력할 거야. 연쇄 납치사건 때 망설임 없이 자폭을 하던 자들도 흑사련의 작품이었으니까. 그리고 환생거사 사건 때 만목자 닭 혈승이 펼쳤던 혈제 영역도 만만치 않았고.”
만만치 않았다고?
진가린이 혀를 내둘렀다.
닭 혈승과의 싸움은 그 정도로 표현할 것이 아니었다.
적을 죽일 때마다 더 강한 적이 나타나는 혈제 영역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으니까.
“그래도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죠?”
“습격의 이점을 살릴 수 있으면 승산은 충분해. 그러니까 은신술을 펼쳐 조심스레 접근하려는 것이고. 하지만….”
“하지만, 뭐요?”
“적들이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다면 아무리 은신술을 펼치더라도 소용없겠지.”
“어떻게 미리 아는데요?”
이번에는 강한월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떻게 적들이 모를 수가 있지? 우리가 무림맹의 시설을 박살 낸 사실이 전달되었을 텐데. 우리가 오대세가의 무사들과 술법사까지 모조리 죽였다면 모를까.”
“우리가 이렇게 빨리 달려왔는데도?”
“사람보다 더 빠른 정보 전달 수단은 한두 개가 아니야.”
“어쨌든! 적들은 우리가 습격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거잖아요! 미리 예상을 하면서도 그런 정보가 전달되도록 놔두면 어떡해요!”
“그럼 어떡해. 그들을 다 죽일 수도 없는데.”
“휴우,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길을 가로질러 죽어라 달려온 것도 소용이 없는 거잖아요?”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들은 아마 이틀쯤 후에 우리가 도착할 거라고 예상할 거야. 완벽한 기습을 할 수는 없지만 예상보다 조금 먼저 당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지.”
“그럼 지금 이렇게 쉴 때가 아니죠. 적들이 준비를 갖추기 전에 달려가야….”
당장이라도 달려가려는 듯 진가린이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강한월은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여유 있게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며 품속에서 술병까지 꺼냈으니까.
“좀 앉아봐.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왜요?”
강한월은 자세히 답변하지는 않았다.
곧이곧대로 설명하면 진가린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실은 강한월은 흑사련 기지가 기습에 대비할 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아주 충분한 시간을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 정도… 그 정도의 시간이면 적당했다.
숨어있을지도 모를 괴인들까지 다 끄집어내기 위해서, 또한 적들이 강력한 대비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공을 평가하는 데도 좋을 테니까.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야영을 하고, 내일 각자 출발하도록 하자.”
“출발은 내일. 좋아요. 그런데… ‘각자’ 출발하자고요?”
그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진가린이 물었다.
“그래. 내가 먼저 가고, 가린이 너는 나중에 오도록 해.”
“혹시 단장이 위험에 처하면 제가 구해야 하는 건가요?”
“맞아. 그런 거지.”
“시간 차를 두고 습격을 한다… 그건 뭐 좋은 작전인 것 같아요. 그런데… 뭔가 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단장을 구해요? 당연히 제가 먼저 습격하고, 혹 위기에 처하면 단장이 저를 구해야죠.”
일반적이라면 그게 맞기는 했다.
강자를 약자를 구하는 거지, 양자가 강자를 구하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강한월이 먼저 가는 게 맞았다.
“네가 먼저 습격하면 적들은 나중에 나도 올 것을 알 거야. 하지만 내가 먼저 습격하면 나중에 네가 올 거라는 걸 모를 수도 있거든.”
“그것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제가 마지막에 판을 흔들 능력이 되느냐는 거잖아요?”
“그래. 실은 그게 제일 중요하지.”
“설마… 제 실력을 믿으시는 거예요?”
“나는 네 실력을 믿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핏,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항주 오성상단으로 가는 길에 실력 없다고 혼냈던 거 잊은 거예요?”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지만 실은 진가린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요, 단장.
내가 뒤를 봐줄 테니 아무 걱정 말아요.
죽는 한이 있어도 단장은 꼭 구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