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흑사련의 비밀기지 (2)
* * *
정옥수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눈앞에 도열한 전력을 하나하나 살피는 동안 그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거대문파 한 개는 반나절이면 멸문시킬 수 있는 전력.
설사 강한월이 부상에서 회복되고 더욱 강해졌다고 한들, 이번 대결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강한월은 아마도 방심하고 있을 터였다.
최근 무림맹의 시설을 습격했으니 흑사련의 시설도 그곳과 비슷하리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
모든 혈승들이 괴인 전사를 만드는 비술 몇 가지씩 가지고 있지만, 제사장은 차원이 달랐다.
왜냐하면 호교전사를 키우는 임무와 성전을 선포하는 권한이 제사장에게 있기 때문.
흥, 강한월. 예전엔 나도 멋도 모르고 싸웠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도 이제는 비밀을 안다는 말이다!
“총관, 이 정도 인원이면 몇 단계 성전을 발동할 수 있지요?”
“인원수로만 따지만 특상의 성전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제사장님이 직접 성전을 선포하시지 않으면 특상의 효능을 발휘되지 않지요.”
“그렇다면…?”
“만약 주교 두 명의 혈령 주입이 끝나면 상급의 성전을 치를 수 있습니다. 만약 주교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중급의 성전이 됩니다만, 인원이 넉넉하니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겁니다.”
“알겠어요. 총관은 주교에게 혈령을 내리는 행사를 서둘러 준비해주세요. 내일 꼭 해야 합니다.”
어차피 하기로 계획했던 일이라 불만은 없지만, 총관은 정옥수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공녀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혹시 침입자가 걱정되어 행사를 서두르시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침입자는 겨우 두 명이라고 하던데, 굳이 성전을 준비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시려는 건 아닌지…. 주교까지 동원되는 성전이라면 마교의 천마를 잡는 일 정도는 되어야….”
총관이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성전을 선포하는 일은 극도로 자제되어야 하는 일. 교를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사용해선 안 되는 방법인 것이다.
성전이 선포되어 성전사로 각성한 전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싸우게 되고, 대부분 재활용이 어렵기 때문.
“이봐요, 총관. 성전을 한번 선포하려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아요?”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제 생각엔 대공녀님의 실력도 어마어마해서 절대급의 고수라도 능히 제압하실 수 있으신데… 도대체 침입자가 누구이길래….”
정옥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아부성 발언이기는 했지만, 총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원래도 꽤 대단했던 정옥수의 무공은 용이 흑사련주가 된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이제는 회귀의 비밀을 공유해도 괜찮다고 판단한 용이 혈교의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에 더불어 비술을 써서 공력도 증진시켜 주었고.
편법을 쓴 것이라 안정화가 필요하긴 했지만, 어쨌든 절대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아니,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정옥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소림사에서 봤던 강한월의 실력은 정말 무시무시했고, 자신의 현 실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더 두려운 건 강한월의 발전 속도.
예전 생명원에서 보여준 것과 소림사의 것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
자신도 무공의 발전 속도에선 상식을 벗어났지만, 강한월은 그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괴물 같은 놈.
하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그녀가 눈앞의 전사들을 둘러보며 다시 안정을 찾았다.
“총관, 예전에 생명원이 무너진 사건을 기억하지요?”
“물론입니다. 그날 사망한 생명원주는 저와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아! 무림맹 시설을 파괴한 것이 혹시 생명원주 사형을 죽인 그 자입니까?”
“맞아요. 바로 그 자예요.”
총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벼르고 벼르던 원수가 제 발로 찾아온다니 가슴에 쌓였던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다.
실은 생명원주의 두개골을 박살낸 건 정옥수가 쏜 가락지이지만, 총관이 그것을 알 수는 없으니….
“잘됐군요. 정말 잘되었습니다. 그 자식… 반드시 지옥을 맞보게 해주겠습니다.”
“지옥이라. 좋은 계획이라도 있나 봐요?”
“제가 명색이 호교전사 제조를 담당하는 총관 아닙니까? 어떤 비술이 가장 큰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지요.”
“그 말은…?”
“그렇습니다. 대공녀께서 허락하시면 그 원수 놈을 붙잡아 혈편복으로 만들겠습니다.”
“혈편복? 그건 아직 못 본 괴인인데?”
“네. 제조 과정의 고통이 너무 심해 대부분의 재료가 죽어버리지요. 하지만 약물의 주입을 조절하면 죽이지 않고 끔찍한 고통만 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 고통을 겪고 혈편복이 되면 또 다른 고통이 계속되지요. 피에 대한 갈증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해가 뜰 때면 어두운 동굴이나 관속에 들어가….”
설명하는 동안 총관의 눈알이 잔인하게 빛났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듯 입에 침까지 발라가며 의욕을 보였지만, 정옥수의 마음엔 딱히 와닿지 않는 듯했다.
“총관. 그 혈편복이라는 것도 좋기는 한데… 그보다는 완전한 내 노비로 만들고 싶은데요.”
“하, 하지만 노비로 만드는 것은 그다지 큰 고통을 줄 수가….”
“상관없어요. 노비가 된 이후에는 매 순간이 고통일 테니. 내가 꼭 그렇게 만들겠어요.”
“대공녀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없어졌기 때문인지, 총관은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정옥수의 말에 표정이 활짝 펴졌다.
“서운해 할 것 없어요. 습격해 올 침입자는 두 명이라고 하니, 둘 중 여자는 총관에게 넘기지요.”
“아, 그럼 여자는 혈편복으로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호호호, 혈편복을 만들든 노예로 만들든 총관 마음대로 하세요.”
* * *
한편, 은신술을 펼친 채 달리던 진가린은 갑자기 귀를 후볐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나?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집중해.”
“진짜 귀가 가려웠던 말이에요!”
“됐고. 저 언덕만 넘으면 흑사련의 시설이다. 지금부터 작전 시작이야.”
강한월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며 진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싸한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동방선도를 수련한 데다 심안을 타고난 그녀는 남다른 육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감각이 날카롭게 신호를 보내왔다.
“단장. 이거 무림맹 시설하고는 느낌이 다른 데요. 뭔가 굉장히 위험할 것 같은….”
“이미 알고 온 거잖아. 당연히 이곳에 더 많은 비술 괴인이 있을 거고 그만큼 방비도 철저할 거야. 그렇기에 꼭 파괴해야 하는 시설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그야 뭐 그렇지만.”
“됐고. 우리는 작전대로만 하면 돼. 난 지금 출발할 테니 좀 있다 보자고.”
진가린의 어깨를 몇 차례 토닥여준 후 강한월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괴인들이 들끓을 적지로 향하면서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겁이 없는 거야?
강한월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진가린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전에 따르면 그녀는 한 시진 후에 출발해야 했다.
한 시진… 모든 것이 순조롭다면 강한월이 시설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시간.
만약 그 시간 안에 천뢰의 폭음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뜻이고, 그녀의 임무는 강한월을 구조하여 탈출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시진 동안 혼자 무얼 하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 *
강한월은 어둠 속을 달렸다.
주변에 동화되는 은신술을 펼치며 달렸지만 매우 빠른 속도였다.
일 각 정도면 시설을 중심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살심(殺心)이 일어날까?
이번 흑사련 시설을 습격하는 것은 특별히 기대가 컸다.
직전 무림맹 시설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살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맞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심검을 작동시키는 원동력은 살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자라는 한 자루 예리한 검.
그 검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내공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서 확인했다.
공력으로 검을 키울 수 없다면 남은 것은 혼신의 마음.
만약 검을 키우는 것이 마음이 맞다면 그건 십중팔구 살심일 것이라는 게 강한월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난번 무림맹 기지를 습격했을 때, 이미 일부분 확인하기도 했다.
괴인을 죽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투명검의 조정이 훨씬 원활했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 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오대세가의 무사들이 경비를 서던 무림맹 시설과는 달리, 이곳 흑사련의 시설이라면 마음 놓고 살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진가린을 나중에 오라고 한 이유였다.
살심에 젖어 날뛰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 * *
“대공녀님. 전사들의 배치가 끝났습니다.”
“벌써요? 늦은 시간까지 총관이 수고가 많았네요.”
정옥수는 잔인하고 냉정한 성격이지만, 필요할 때는 칭찬도 할 줄 알았다.
우습게도 생명원에서 관음보살이라 불리었던 모습에도 그녀의 실제 모습이 일부 있기도 했고.
어쨌든 격려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총관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호교전사들을 모두 집합시켜 침입을 막는 진세를 갖춘 것은 물론, 주교 후보들에게 혈령의 세례를 베풀 대제사의 준비까지 했으니 말이다.
“적들이 하늘을 날아서 오는 게 아닌 이상 내일 오후는 되어야 여기 도착할 거예요. 그 전에 주교 세례를 끝낼 수 있겠죠?”
“빠듯하지만 가능합니다. 주교 후보들은 자시(子時)에 이미 연단을 시작했습니다. 대공녀께서 수여하실 혈령이 용, 즉 진(辰) 혈령이니 진시(辰時)에 맞춰 끝을 내야 합니다.”
“좋아요. 아직 시간이 좀 있네요. 나는 쉬고 있을 테니 시간이 되면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대공녀님. 그럼 저는 이만 제단을 준비하러 가보….”
삐익, 삐이익~
총관은 인사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적막한 밤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연달아 울렸기 때문이다.
“침입자? 어떻게 벌써…?”
“대공녀님.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호교전사들이 진용을 갖추고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총관이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정옥수의 고운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예상보다 하루나 일찍 도착한 것을 보니 강한월은 부상을 회복했음은 물론 예전보다 실력이 향상되었음이 분명했다.
흥, 역시 운이 좋은 놈이야.
주교들에게 혈령의 세례를 내리기 전에 들이닥치다니.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총관의 말 대로 지금 이 시설의 전력이면 무림맹주나 천마라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니까.
정옥수가 축축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의 긴장감과 함께 묘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강한월은 오늘부로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이었다.
* * *
‘아이고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네.’
날카로운 호각 소리는 진가린의 귀에도 들렸다.
소리가 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가린과 강한월이 헤어진 그곳까지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크게 들렸다는 건… 실은 그녀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는 증거.
그랬다. 진가린은 흑사련 시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나무 위에 은신해 있었다.
강한월이 떠난 지 반각도 안 되어 죽어라고 달려온 결과였다.
지시를 어기거나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육감이 매우 강력한 경고를 발했기 때문에 한 시진이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것.
‘단장이 저쪽에서 시작했으니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볼까?’
진가린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어렴풋한 그림자 하나가 슬금슬금 시설을 향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