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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54화 (131/210)

154화. 흑사련의 비밀기지 (4)

* * *

호위무사는 손바닥이 갈라져 줄줄 흐르는 피를 혀로 핥았다.

기습에 놀랐을 거고 적지 않은 고통이 있을 텐데도 표정 변화가 없는 걸 보니 괴인은 괴인.

“저기요… 갑자기 공격을 해서 미안하긴 한데요… 그 검은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저에게는 의미가 큰 검이라….”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 진가린이 뻔뻔하게 요청해봤지만 역시나 원하는 반응이 오지는 않았다.

“이제 봤더니 완전히 미친년이구나. 감히 제단을 침입해 교인을 죽여 놓고 검을 돌려 달라고?”

“어? 아저씨는 말을 잘하네요. 혈교 괴인 중엔 말을 못 하는 종류도 많던데.”

“이것이 나를 뭘로 보고!”

호위무사가 잔뜩 열받은 채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순간 열두 명의 술법사들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호위무사가 움직였으니 상황은 종료된 것이라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에 단숨에 목이 달아난 무사는 일반 호교무사였지만 지금 이 사내는 그보다 두 단계나 위인 성직사인 것이다.

술법사들 입장에선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존재.

“정말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할 거예요? 싸우려면 검이라도 돌려주고… 앗.”

시간이나 좀 끌어보려던 진가린은 자신을 향해 그어지는 자신의 검 때문에 급히 발을 놀려야 했다.

백학이 얼마나 예리한 검인지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쉬익.

무영보를 극한으로 펼쳐 몸을 옮긴 그녀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무사를 훑고 지나갔고, 어느새 손에는 시체의 허리에서 뽑아낸 검이 들려 있었다.

채앵~

손가락으로 검날을 튕겨본 진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마음에 드는 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에 쇠붙이를 드니 한결 마음은 편했다.

“좋아요. 원래 고수는 무기 탓을 안 하는 법. 어디 한 번 해보자구요.”

우우웅.

진가린의 검에 맑은 기운이 맺혔다.

백학이 아니기에 별무리 같은 반짝임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선기.

그에 맞서 성직자도 검기를 일으켰다.

손에서 흐른 피가 끈적하게 엉겨 있는 백학에서 붉은색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감정이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인데도 약간의 놀란 표정이 떠올랐는데, 이제서야 백학이 보통 검이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칫, 그 검은 내껀데.

진가린이 입술을 삐죽하며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쉬익. 샤악.

둔탁한 철검이지만 그녀의 손에 들리니 날렵한 제비처럼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무공이 무르익을 만큼 익었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천마신교를 다녀오며 소요자와 천마의 도움으로 내공과 경공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도 중요한 원인이지만, 장백산 본문을 다녀온 이후에는 정말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아마도 사부를 만나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불안이 풀린 것이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리라.

게다가 연속해서 극한 상황을 겪으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혈교의 괴인들은 물론 마교의 마인들과도 생사의 결전을 치르면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다.

콰아앙!

크윽.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자신감은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이 대번에 밝혀졌다.

수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검을 성직자가 정직하게 받아쳤는데, 진가린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이럴 수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비검술로 날린 백학을 그가 낚아챘을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엄청난 고수다.

도저히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정확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혈승의 혈령이 주입되는 주교나 음양혈인 등 몇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혈교의 무사 중 가장 강한 성직자 직급.

게다가 이곳에 있는 성직자 중에서도 특별히 강하여 주교가 될 재료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던 것이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구나. 너를 붙잡아 총관께 바쳐야겠다.”

한술 더 떠 사고능력까지도 매우 정상적이었는데, 그가 이런 생각을 한 덕에 진가린에겐 약간의 기회가 생겼다.

이제 믿을 것은 무영보뿐.

진가린은 한 시도 멈추지 않고 발을 놀렸다.

다행히 경공의 속도만큼은 성직자와 진가린이 비슷한 수준이었고, 곳곳에 앉아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술법사들이 걸림돌이 되어 그녀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혹시 이들을 이용하면…?

진가린의 머릿속에 한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그녀는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와중에 검기를 날려 술법사 한 명의 머리를 노렸다.

계획대로라면 성직자는 술법사를 보호하기 위해 급히 몸을 날릴 것이고, 그 순간 공격을 가할 기회가 생길 것인데….

퍼억!

뭐야 이건… 헉!

검기를 맞은 술법사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지는데도 성직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술법사를 보호할 생각은 없이 공격을 가하는 통에 진가린만 다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놀란 것은 진가린 만은 아니었다.

성직자를 믿고 주술에 몰두하던 술법사들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지금 뭐하는 거요? 우리를 보호해야 할 것 아니오!”

“흥 내가 왜? 내 임무는 주교를 보호하는 거지 너희를 보호하는 게 아니다.”

성직자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풀풀 흘렀다.

술법사들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난 것이다.

멀쩡한 무인이었던 자신을 사람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이상한 것으로 만든 자들이 바로 저 술법사들이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술법사들.

주교 재료를 활성화시키는 주문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 했으니까.

방구석으로 후다닥 뛰어나 단검, 비수 등 나름의 무기를 꺼내 들고 진가린을 경계했는데….

사실 진가린은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교를 보호한다고?

주교… 그게 뭐지?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느껴졌던 이상한 기운, 싸움에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그것.

그건 분명 방 중앙에 놓인 일 장 높이의 철제 수조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가?

그 주교라는 것이 들어있는 곳이?

눈을 반짝인 진가린이 그대로 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슈아악!

수조를 향해 거칠게 날아가는 검기.

예상대로 성직자는 다급히 몸을 날려 수조 앞으로 달려가 검기를 막았다.

콰앙!

공격은 실패했지만 진가린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호호호. 그렇단 말이죠? 갑자기 저 수조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지네.”

“닥쳐라. 네 죽음만 재촉할 뿐이니!”

진가린을 생포할 생각을 버린 성직자가 매섭게 공격해왔다.

하지만 경공에 자신 있는 그녀는 잽싸게 몸을 피한 후 다시 수조를 공격했다.

콰아앙!

역시나 급히 몸을 돌려 수조를 보호하는 성직자.

주교를 보호하는 임무가 심령에 각인되어 있으니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수조부터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후의 싸움은 진가린이 주도했다.

수조를 두세 번 공격하다가 한 번씩 성직자를 공격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성직자는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몸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 계속하면 결국 성직자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저 수조에 든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저걸 파괴하면 임무까지 완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주교를 지키는 임무가 각인된 건 성직자만은 아니라는 것.

구석에 모여 몸을 사리고 있던 술법사들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쉬익, 쉬이익~

단도, 비수, 강침 등 십여 개의 무기들이 매섭게 날아왔다.

혼신의 힘을 다한 피의 술법을 걸었기에 깜짝 놀란 진가린이 몸을 피했지만 무기들도 그녀의 움직임을 쫓아 계속 날아왔다.

그 순간을 성직자가 놓칠 리가 없었다.

붉은 기운을 잔뜩 품은 백학을 휘두르며 번개처럼 쇄도해 왔다.

어지럽게 검을 놀려 술법사들의 무기를 쳐내던 진가린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돌려 성직자의 공격을 막았다.

콰아앙!

진가린이 피를 토하며 뒷걸음질 쳤다.

다행이라면 선검인 백학이 성직자의 사악한 기운을 거부하며 막판에 붉은 공력을 스스로 차단했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회복하기 힘든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상이 경미한 것도 아니었다.

내장이 진탕 되는 내상을 입은 데다가 술법사들이 던진 쇠붙이 몇 개도 등과 어깨에 꽂혔으니까.

“후후후. 교를 우습게 본 죗값을 받았구나.”

성직자는 다시 마음을 바꿔 진가린을 생포하기로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 보였으니까.

성직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직자에 맞서 싸울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번의 경공을 펼칠 수는 있었다.

“앗? 멈춰라!”

방심한 성직자가 주춤하는 사이 진가린은 죽을힘을 다해 몸을 띄우더니 수조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 * *

한편 진가린이 성직자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사이, 강한월의 싸움도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이미 몸 어디 한 곳이 검에 잘린 채 바닥을 뒹구는 무사들의 수가 백을 넘어섰고, 핏방울은 밤안개에 섞여 곳곳을 붉게 물들였다.

강한월은 지치지 않았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역근경의 공력이 육체를 단단히 지탱해 주었기에 이런 싸움이라면 해가 뜰 때까지 계속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슬슬 정신의 피로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초월경에 들어 자연스런 움직임을 갖는 건 아마도 육체뿐인 모양이었다.

흙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잘린 팔다리와 토악질이 날 정도로 비릿한 피 향기는 정신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니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성전 선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고, 그 후에는 마음의 무공을 써야 하는데 벌써 심력이 소모되면 안 되는 것인데.

도대체 성전 선포는 언제 하려는 것인지…?

다시 한번 호교무사와 성전사의 몸에 혈선을 그으며 강한월이 슬쩍 눈을 돌렸다.

전각 꼭대기 방, 창문 넘어 정옥수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강렬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정옥수는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 너라면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을 진작에 알았겠지.’

사실 성전 선포를 위한 조건은 진작에 갖춰졌다.

좀 더 강력한 성전의 발동을 위해 시간을 끌고 있었을 뿐.

하지만 그건 그녀의 욕심일 수 있었다.

성전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더 많은 전사들이 순교하게 될 거고, 강한월 한 명을 잡기 위해 너무 많은 전사들을 소모할 경우 용의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아니면 지금…?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강한월의 검이 다시 몇몇의 무사들을 쓰러트렸다.

전면에 나섰던 무사들은 이제 모두 전투불능에 빠졌고, 뒤에서 대기하던 자들을 추가로 투입하던가 아니면 지금 성전을 선포해야 했다.

호각을 입에 문 총관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의 의미는 뻔했다.

이제 제발 성전을 선포하자고.

콰앙!

전각 창문을 거칠게 부수며 밖으로 튀어나온 정옥수가 밤하늘을 멋지게 날아 총관의 옆에 착지했다.

“대공녀님. 지금입니까?”

“그래요. 성전을 선포하세요. 저 건방진 놈에게 교의 무서움을 알려주세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총관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눈동자가 점차 붉게 물들었다.

선명한 핏빛으로 변한 순간, 총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혈신의 가호를 받는 교의 전사들아.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한다. 피의 권능을 받아 성스러운 전사로 거듭나고, 자신을 불살라 영생을 얻으라!”

전장에 넓게 퍼져 있던 피안개가 기지개를 펴듯 출렁거렸고, 바닥을 뒹굴던 전사들이 몸을 일으키며 한목소리로 답했다.

“배덕자에게 죽음을! 순교자에게 영생을!”

성전이 선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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