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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56화 (133/210)

156화. 주교 일·이호

* * *

‘한계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겠어.’

희미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들며 진가린은 생각했다.

참을 수 없이 숨이 가빠왔고 정신은 몽롱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한계에 봉착했는데, 아마도 등의 상처에서 출혈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지 물속에서 질식해 죽을 수는 없지.

조금이라도 정신이 붙어 있을 때 밖으로 나가는 게 맞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물이 탁해 밖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입구엔 분명 성직자가 벼르고 있을 터. 고개를 내미는 순간 강력한 공격이 쏟아지겠지?

그렇다면….

진가린은 손을 뻗어 벌거벗은 주교 육체 하나를 붙들었다.

좀 뻔한 수법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육체를 밀어 올리고 다른 한 손에는 등짝에서 뽑아낸 비수를 쥐고 수조 입구를 향해 떠올랐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급적 주교와 한 덩어리로 보이기를 바라면서….

진가린보다 두 뼘쯤 더 높이 있던 주교의 머리 꼭지가 거의 수면에 닿았다.

그녀일 거라 착각한 성직자가 주교를 향해 공격을 가할 것이고, 그 틈에 수조를 빠져나가 도망치려는 것이 이번 계획.

하지만 역시나, 성직자와 술법사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주교의 머리가 물 밖으로 떠올랐지만 성직자는 공격하지 않았고, 뒤이어 떠오를 진가린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이런, 계획이 들통났구나.

다시 수조 깊은 곳으로 돌아가는 게 맞았지만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부력은 진가린을 계속 끌어올렸고, 부력을 거스르고 아래로 내려가기엔 숨이 너무 가빴다.

이판사판. 죽을 때 죽더라도 이제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결국 진가린의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쿠르르릉!

물 밖에서 처음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성직자의 무지막지한 장력.

진가린은 체념하고 말았다.

손에 쥔 비수를 휘둘러봐야 저 장력을 막을 길은 없었으니까.

콰아앙!

압축된 진기가 터지는 소리, 수조 아래 서 있던 술법사들이 흠뻑 젖을 정도로 비산하는 물보라.

성직자가 폭포수처럼 피를 토하며 수조 입구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럴 수가!”

경악의 외침이 술법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분명 진가린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며 죽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성직자가 몸도 못 일으킬 정도의 부상을 당하다니?

놀란 것은 진가린도 마찬가지.

무서운 장력이 코앞까지 날아와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먼저 떠올랐던 주교가 그녀의 몸을 보호하며 다짜고짜 성직자에게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인 데다가 원래 주교가 성직자보다 훨씬 상위의 고수.

성직자는 가슴뼈가 함몰되며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설마…?

동동 머리만 물 밖으로 내민 채로 진가린은 주교의 눈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를 향한 눈빛은 매우 순종적이었다.

마치 주인을 바라보는 시종의 그것처럼.

역시 그랬던 거구나.

진가린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그려졌다.

혈령 주입을 기다리고 있던 육체에 혈령이 아닌 그녀의 피가 흘러 들어갔고, 피에 녹아 있던 영선기 때문에 혈령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

예전 돼지 혈승의 피가 주입되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가정도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넌 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 같고… 나머지 한 명은 어떻지?”

진가린이 묻는 순간, 수조 아래에 잠겨 있던 나머지 육체 하나도 불쑥 떠올랐다.

“그렇군. 너희 둘 다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 거군. 좋아. 너희는 당장 저 아래 있는 술법사들을 제압하고 옷도 좀 챙겨 입어라.”

휙, 휘익~

벌거벗은 육체 둘이 수조 밖으로 뛰어내렸고, 채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술법사들을 향해 지풍과 장력을 날렸다.

성직자도 버티지 못한 공격을 그들이 피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모조리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제길. 적당히 겉옷만 벗겨 입을 것이지.

수조 위에서 여유 있게 뛰어내리며 진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몸의 주교들이 보기 흉해 옷을 찾아 입으라 했더니, 술법사 두 명을 알몸으로 만들어 놨던 것.

얼굴이 벌게진 진가린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여튼 수고했다. 명령을 아주 잘 수행하는군. 그건 그렇고… 너희 이름이 있나?”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이들은 비술에 당하기 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이 없다고? 나한테 지어 달라고? 호호, 이것 참. 내가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진가린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적당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명에 재능이 없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

“이제부터 넌 일호, 그리고 너는 이호다.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애당초 원래 이름을 기억 못 하는 너희들 잘못이니까.”

호칭 정리를 끝낸 진가린이 주교 일, 이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 *

성전의 현장은 참혹했다.

연속되는 폭발로 지면에는 수십 개의 구덩이가 파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게 탄 살점과 뼛조각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교도? 부하?

호칭이 무엇이던 자신의 명령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게 분명했지만, 정옥수는 널린 시체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하나.

“호호호,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쓰러져 있는 강한월의 몸을 발끝으로 톡톡 차며 정옥수가 웃었다.

부상이 심한 것인지 아니면 진력이 고갈된 것인지, 강한월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총관. 어서 이자를 살펴봐요.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노예 비술을 펼칠 상태가 되나요?”

“흐흐흐. 걱정 마십시오, 대공녀님. 숨만 붙어 있으면 비술 재료로 쓰는 데 문제가 없으니까요.”

총관이 옆에 쪼그리고 앉더니 강한월의 몸을 살폈다.

화상을 입은 피부나 날아드는 뼛조각에 찢긴 상처를 대충 훑더니 맥문을 쥐고 내부를 들여다봤다.

“허허, 이것 참. 무슨 이런 상태가….”

“왜요? 문제가 있나요? 재료로 못 쓸 것 같아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이자는 별다른 부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피륙의 상처야 별 게 아닌데… 왜 기절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뭐라고요?”

깜짝 놀란 정옥수가 벼락같이 움직여 강한월 몸의 혈도 십여 곳을 눌렀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삼안혈도를 집어 강한월의 목을 겨눴다.

그가 거짓으로 부상당한 척하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대공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비록 큰 부상은 없지만, 이자가 의식을 잃은 것은 분명 사실이니까요. 제 진맥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흥. 총관은 이자가 얼마나 영악하고 독한 놈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쯧쯧, 전에 얼마나 심하게 당했길래….

총관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감히 겉으로 표현하진 못했다.

어쨌든 잔뜩 쫄아 있는 정옥수를 안심시키기 위해선 빨리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대공녀님. 그럼 즉시 비술을 시작하시죠. 저놈이 아무리 독한 놈이라고 해도 일단 비술에 걸리면 말 잘 듣는 순한 강아지나 다름없게 될 테니까요.”

“강아지라. 호호호, 그거 적절한 표현이네요.”

정옥수가 앞장섰고 강한월을 안아 든 총관이 뒤를 따랐다.

향하는 곳은 비술 시설이 있는 전각.

“겸사겸사 잘되었습니다. 주교 의식도 치러야 하니까요. 술법사들이 사전 예식을 시작했으니 진시에는 혈령 주입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요. 잘되었죠. 그건 그렇고 강한월 이 녀석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어떤 방법을 쓰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혈령을 주입해 혈노로 만드는 술법은 반 시진이면 충분히….”

“그건 안 돼요!”

당연히 안 될 말이었다.

혈령을 주입하면 강력한 노예가 되기는 하지만 혈령의 주인을 섬기게 되는 법.

벼르고 별러 어렵사리 잡은 이 녀석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럼 시간은 좀 더 걸리더라도 일반 노예로 만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호위무사형 노예가 있고, 일반 잡일용도 있으며… 흠흠, 혹시 원하신다면 성 노예로 만들 수도….”

“성 노예?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관심이 동하는 듯, 정옥수의 귀가 쫑긋했다.

역시 흑사련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여염집 아녀자처럼 부끄러움을 타지는 않았다.

“하하하, 가능하고 말고요. 아시다시피 저희 혈교의 비술들은 상당 부분 천축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환희밀교의 전승을 계승한 비술이 있는데, 그것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냐 하면….”

총관의 장황한 설명은 전각의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부연 설명할 것이 좀 남았지만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총관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정옥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고, 총관 스스로도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

“총관. 여기… 우리 경비들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입니다. 주교 재료가 보관된 중요한 곳이니까요. 무사들이 갑자기 미쳐서 딴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채앵.

정옥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삼안혈도를 거칠게 뽑았다.

“침입자가 있다는 뜻이겠죠.”

그녀가 말을 마치는 순간, 복도 끝 방의 문이 덜컹 열리더니 무언가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이미 공력을 끌어올리고 대비하고 있던 정옥수는 거침없이 도를 휘둘렀다.

쩌억.

날아오던 무언가가 삼안혈도를 맞고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주교 재료를 지키고 있던 성직자였다.

콰앙!

정옥수는 놀랄 새도 없이 다시 도를 휘둘러야 했다.

성직자를 먼저 집어 던진 후, 뒤따라 쇄도한 주교 일호가 폭풍 같은 장력을 뿜었기 때문이다.

“아앗! 너는 주교 후보가 아니냐? 혈령 주입도 안 했는데 어떻게…?”

총관이 경악하며 물었지만, 답변을 기다릴 여유 따윈 없었다.

복도를 날듯이 달려오는 주교 이호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주교들의 실력이 어떤지는 총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채 삼 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하물며 강한월을 안은 채로는….

총관은 주저함 없이 강한월을 집어 던졌다.

역시나 달려오던 이호는 걸음을 멈추고 강한월을 받았다.

삐이익~

계단을 뛰어오르며 총관은 죽을힘을 다해 호각을 불었다.

이제 밖에 있던 무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전각을 벗어나기만 하면….

하지만 총관의 생각은 거기서 끝이 났다.

목이 잘린 사람은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주교 일, 이호를 앞세운 후 무영보를 펼쳐 쾌속으로 돌진한 진가린이 단칼에 총관의 목을 벤 것이었다.

“으아아악! 이 연놈들이 진짜!”

정옥수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정말 다 된 밥이었는데 진가린 저 얄미운 것이 나타나 코를 빠트린 것이다.

하지만 분노가 치솟는다고 무공까지 강해지지는 않는 법.

정옥수가 죽을힘을 다해 도를 휘둘렀지만, 주교 일호를 당해내지 못하고 한 발 한 발 뒤로 밀렸다.

“일, 이호. 시간이 없어. 빨리 탈출해야 해!”

수조가 있던 방 쪽으로 정옥수를 몰아붙인 일, 이호가 계단 쪽을 향해 몸을 돌렸고, 그 순간 진가린이 무언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둥근 물체. 천뢰였다.

어느새 강한월을 넘겨받은 진가린과 일, 이호는 계단 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렸고, 반대로 정옥수는 수조가 있는 방 안으로 뛰었다.

콰아아아앙!

천뢰가 폭발했다.

전각이 일순간에 무너졌고, 진가린 등은 아슬아슬하게 폭발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굳이 싸울 필요 없어. 그대로 돌파한다!”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전사들을 보고 진가린이 외쳤다.

주교 일, 이호가 정면에서 길을 뚫으며 수백 명의 전사 무리의 중간을 갈랐다.

포위를 뚫고 막 시설을 벗어나려는 순간, 진가린은 뒤쪽을 향해 다시 한번 천뢰를 던졌다.

콰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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