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심검의 실마리 (1)
* * *
콰아아앙!
천뢰가 폭발하는 지하실 복도.
좁은 공간이라 열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었고, 시설에 보관 중이던 인화성 물질도 많았기에 위력이 배가되었다.
주교 일호에 밀려 계단 반대쪽을 향해 있던 정옥수는 폭발의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탈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조가 있던 방으로 몸을 던졌다.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냈지만 폭발의 화염이 너무도 빨리 따라왔고, 방문을 닫을 틈도 없이 수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치이익.
머리카락과 옷에 붙어있던 불길이 꺼지며 고통이 잦아들었다.
화염과 파편이 날아왔지만, 특수한 금속으로 제작한 수조는 매우 튼튼해서 그럭저럭 버텨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
수백 번의 천둥이 동시에 치는 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전각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돌덩이와 흙 무더기가 쏟아지며 수조의 입구를 막았고, 주변은 암흑이 되었다.
안 돼!
정옥수가 있는 힘껏 장력을 날려봤지만 수조 입구를 막은 돌덩이는 꿈적하지 않았다.
오 층 높이의 건물 구조물이 산을 이루고 있으니 부상을 당한 데다가 물속이라 호흡도 못 하는 그녀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
생매장당한 건가?
끔찍한 결말이 예상되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호흡이 가빠왔다.
이 상태라면 그녀가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일각.
그 시간 안에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와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진가린과 주교 두 명에 폭탄까지 지니고 있으니 또다시 성전을 선포하지 않는 한 자신의 수하들이 이기기 힘들 것이고, 설사 싸움을 끝낸다 한들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 것도 시간을 잡아먹을 테니까.
미칠 듯이 다급한 마음에 머리를 굴려봤지만,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지금은 혈승들을 모셔야 하지만 삼십 년 아니 이십 년 후에는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몸인데… 이렇게 질식사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그래… 복수도 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한월과 진가린 그 둘은 꼭 죽여야만 해!
정옥수는 품속을 더듬었다.
다행히 용의 피를 담아온 자기 병은 무사했다.
비술 준비 과정을 거친 재료들에게 주입하면 주교로 각성되어 엄청난 힘을 얻게 되는 혈령.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이걸 쓰면 어찌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죽음이 앞당겨지거나 혹은 괴물이 될지도….
뭐가 되었던 이대로 서서히 질식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주교 두 명을 만들 수 있는 양의 혈령이 그녀의 입속으로 부어졌다.
* * *
“허허, 이것 참….”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강한월과 진가린을 보고 제갈윤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당연히 안부를 묻고 무사 복귀를 축하해야 했음에도 말이다.
“이거 무슨 유행인 거예요? 사마염 원주님 조도 그러더니.”
“유행이냐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데?”
“저기 저 사람들이요.”
제갈윤이 손가락으로 주교 일호와 이호를 가리켰다.
며칠 전 복귀한 사마염 일행이 음양혈인을 데려와 깜짝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강한월이 괴인을 두 명이나 데리고 온 것이었다.
“내 생명의 은인들이다.”
“은인… 이라구요?”
제갈윤은 깜짝 놀랐다.
딱 봐도 혈교가 만든 비술 괴인이 분명한데 은인이라니?
혈교에 대해 그토록 단호했던 평소의 강한월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일단 짐을 풀고 설명해줄게. 사백님께 인사도 드려야 하고.”
오랜만에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으니 즐겁게 해후할 수 있었다.
하북 기지를 습격한 일에 대해서는 소영영이 설명했다.
원숭이 혈승이 등장했다는 말에 눈이 커진 강한월은 민 문주와 말 혈승이 도와줬다는 말을 듣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민정화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은 것은 서운했지만, 동료들을 구함과 동시에 더 이상 혈교의 편이 아님을 증명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경호 무사까지 만들어 주셨으니….
“그 음양혈인은 어떤 상태지?”
강한월도 음양혈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 위력은 소림사에서 직접 확인했으니 말할 필요 없었다. 다만,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지가 관건.
“처음에는 좀 불안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오는 사이에 거의 안정이 되었어요. 민 문주님이 단도에 심어주신 혈령과 완벽히 동조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의사소통은 가능한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저희가 하는 말은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밀랍 인형 같았는데 지금은 제법 표정도 있고요. 아, 이름도 지어줬어요. 영도(靈刀)라고.”
생령을 담을 수 있는 단도를 매개로 관계가 맺어졌기에 영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고, 단도는 민정화가 소지하고 있었다.
“영도의 실력이 상당해. 복귀하는 길에 몇 차례 비무를 해봤는데 결코 내 아래가 아니더군.”
광군영이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음양혈인이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면 소림사 방장 대사도 누를 수 있음이 이미 증명되었으니까.
어쨌든 척혈단 입장에선 대단한 고수를 확보한 셈이니 이번 하북행은 매우 성과가 컸다.
원래의 임무인 시설 파괴를 완수한 것은 물론이고, 강적인 원숭이 혈승을 제거하고 대단한 고수를 아군으로 얻었으니까.
“뭐, 하북의 일은 이 정도예요. 이제 강남은 어땠는지 이야기를 해주시죠.”
설명은 진가린이 맡았는데, 무림맹 시설을 파괴한 것은 별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은 흑사련의 시설 파괴 건.
하북에 원숭이가 나타난 게 의외의 사건이었다면, 이번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정옥수의 이름이었다.
“정옥수? 그 생명원의 관음보살?”
“맞아요. 그리고 소림사에서 단장을 거의 죽일 뻔했던 여자이기도 하고요.”
“그 여자… 죽은 거야?”
“십중팔구 죽었을 거예요. 도망갈 곳 없는 지하에서 천뢰가 터졌으니까요. 어머? 설마… 곽 오라버니 아쉬워하는 건 아니죠?”
“아, 아쉽다니? 그런 악녀는 죽어도 싸다고!”
진가린이 농담에 곽철이 펄쩍 뛰었다.
사실 여기 모인 대다수가 정옥수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월, 광군영, 곽철, 진가린은 생명원 사건 때, 제갈윤과 위청보는 신룡대회에서, 그리고 소영영은 소림사에서 그녀와 악연이 있었으니까.
혈승의 무리 중 가장 자주 부딪혔던 것이 그녀인데, 그 악연도 이제는 끝이 난 것이다.
“데리고 온 두 명은 어때? 주교 일호와 이호라고 했던가?”
“복귀하는 길에 확인했는데, 제 영선기와 완전히 동조가 이뤄진 것 같아요. 단장 말에 의하면 주교는 혈교에서도 상당히 고위의 전사라네요. 음양혈인만큼 강한 것은 아니지만 의사소통은 원활히 할 수 있어요.”
“그래? 가린이 네가 크게 한 건 했구나. 수고가 많았다. 그건 그렇고… 단장은 어땠어요?”
제갈윤이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지만, 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했고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음양혈인과 주교를 얻었지만 척혈단 제일의 전력은 뭐니 뭐니 해도 여전히 강한월이니까.
“나는… 심검에 실패했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대원들 입장에선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물론 티를 낸 사람은 없었지만.
“명색이 전설의 무공인 심검이 그리 쉽게 완성될 리 없잖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단장은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대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뻔한 위로를 건네는 것뿐이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 * *
그날 밤, 강한월은 조용히 사마염을 찾아갔다.
무공에 대해 물을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력은 강한월이 한 수 위지만 무공에 대한 이해와 학식만큼은 사마염이 더 고수라 할 수 있었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고, 무림맹의 원로원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어서 오거라.”
“제가 찾아뵐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네가 심검을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음이 답답할 테니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지. 만약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갔으면 꽤나 서운했을 거야. 하하하.”
“사백 말고 다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빈말은 아니었다.
소요자나 위무진이 이곳에 있었더라도 강한월은 사마염을 찾아왔을 것이다.
무공은 그들이 더 높지만 사마염은 가족과 다름없었고, 사부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그건 사마염이니까.
“그래. 솔직히 내가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적어도 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준비는 되어있다.”
사마염은 준비해둔 술병을 꺼내어 강한월의 잔을 채웠다.
맘 편하게 이야기를 해보라는 신호.
“저는 살기를 통해 심검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살기? 음… 그럴듯하기는 해. 하지만 너다운 생각은 아니었구나.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실은 사백님이 전해주신 사부님의 서신 안에 관련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 사부가 살기를 바탕으로 심검을 이루라고 가르쳤단 말이냐? 허허, 갈수록 모를 일이군.”
단숨에 술잔을 비우며 사마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제 신주의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데, 그는 제자에게 살기를 키우라고 가르칠 사람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정확히 살기를 언급하신 건 아닙니다. 다만 마음속의 어떤 감정을 갈고 닦아 유형화시키면 검의 모양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죠.”
“검의 모양으로 예리하게 다듬을 감정이라면 살기가 가장 적합하긴 하겠군.”
“예. 저는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시도해봤습니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기도 했고요.”
“그런데 최종적으로는 실패했다 이거군.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살기의 총량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으로 검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엄청난 심력을 필요로 하는데, 도저히 그 정도 크기의 살기가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혈교의 괴인들을 상대하면서 일부러 고통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마염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강한월은 실패를 말하고 있지만, 사백인 그의 입장에선 이런 실패가 오히려 감사했다.
심검을 완성해 무엇 하겠는가? 만약 그 마음이 살기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악한 괴인들을 상대한다고 한월이 네 마음이 살기에 물들 리가 없지. 그리고 네 사부 또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고.”
“그럼… 사부님이 언급하신 감정은 살기가 아닐 거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네 사부는 신주의협이고 그 이름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살기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심검과 같은 천고의 절학이 그런 악한 감정을 통해 달성될 리도 없고.”
마지막 말에는 강한월은 동의하지 않았다.
천고의 절학이라고 해서 모두 선한 마음을 통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니까. 천마신교의 마신강림이 그 좋은 예이고.
하지만 사부와 살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백님의 말씀이 맞겠죠. 어쨌든 살기를 통해 심검을 이뤄보려는 것은 이제 포기했습니다.”
사마염은 강한월의 잔을 다시 채우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한월이라면 분명 다른 길을 찾았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한 가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심검에 실패하고 의식을 잃는 순간 여러 명의 적들이 동시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가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적들이 쓰러졌다는 말이냐? 마치 심검에 당한 것처럼?”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렇게 본 것 같습니다.”
“허허, 그것참 신기한 일이구나.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고로 극한의 상황에 달했을 때 초월적인 힘이 발휘되는 법이니까. 그 순간에 네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그것이 심검을 향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지?
그것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웬만한 것은 잊는 법이 없는 강한월에게는 이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