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심검의 실마리 (2)
* * *
다음 날 아침.
강한월은 홀로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만 멍하니 바라봤다.
어젯밤 사마염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 줄곧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칼로 도려낸 것처럼 그 순간의 기억만 사라진 것이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 중 충격을 받아 단기 기억을 상실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
하지만… 머리를 가격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는데?
머리 이곳저곳을 손으로 만져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강물을 바라본다고 없어진 기억이 돌아올 리 없으니까.
강한월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어? 단장.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또 일 시키려고 그러는 거예요? 저도 며칠은 쉬어야….”
진가린이 잔뜩 경계하며 강한월을 맞았다.
“일은 무슨. 누가 들으면 내가 악덕 상관인 줄 알겠다.”
“그럼 무슨 일로…? 설마 제가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호호호, 같이 여행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리워하고 그러세요.”
물론 농담이었다.
강한월이 하도 심각해 보여서 일부러 실없는 소리를 한 것인데,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 말고,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그래요?”
“흑사련의 시설을 습격했을 때의 상황. 그걸 좀 되새겨 보려고.”
“복귀하는 길에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그건 전반적인 이야기였고, 이번엔 정말로 상세하게 세분화해서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어째서 그러냐 하면….”
고민이 무엇인지, 이것이 왜 필요한지 강한월이 설명했다.
요지는 증발해버린 기억 혹은 감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한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사… 심검의 실마리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진가린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초월경의 무학에 대해 진가린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당시 상황을 복기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좋아요.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계곡을 가로질러 달릴 때부터요?”
“아니. 한 시진 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내가 먼저 출발한 그때부터 이야기해보자.”
“그러죠. 음… 그러니까 그때 단장이 먼저 떠났고 저는 숲속에 숨어있었는데….”
강한월과 진가린은 조각난 그림을 맞추듯 번갈아 이야기를 했다.
실제 일어난 일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까지 이야기했는데, 속 마음을 드러낸다는 건 몹시 쑥스러운 것이었지만 강한월이 강력히 요구하니 어쩔 수 없었다.
뭐 좋아. 단장이 심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하지만 과연 이런 대화를 통해 심검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젠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죠.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었거든요. 수조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공격받을 것을 알았지만, 물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랬구나. 살기로는 심검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걸 내가 깨달은 것이 그즈음이겠군. 심검이 실패하자 온몸의 힘이 빠졌고 정신이 아찔했는데….”
“심력을 소진한 거군요.”
“그래. 역근경 내공은 단전에 가득했지만 마음은 이미 지친 거였어. 그리고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혹시 그때 이미 정신을 잃은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야. 그 이후의 장면들도 생생하거든. 이상한 일이지만 눈으로 보거나 겪은 것은 선명히 기억이 나고, 내 생각이나 감정만 사라졌다.”
“정말 이상하네요. 뭐 어쨌든 이제 다시 제 차례죠? 주교 일호를 앞세우고 물 위로 올라왔는데, 성직자가 속지 않았어요. 엄청난 주먹이 날아왔는데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죠. 단장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한 시진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온 게 후회가 되었어요. 단장은 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르는데… 지금쯤 내가 올 거라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를 엄청 걱정할 텐데….”
순간 강한월의 표정이 멍해졌다.
진가린을 걱정해야 했는데… 그 기억이 없었다.
“뭐죠 그 표정은? 설마 제 걱정을 안 한 거예요?”
강한월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진가린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하지만 왜일까? 왜 그녀 생각이나 걱정을 하지 않은 걸까?
그리고 그 답은 진가린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 미안해하는 표정 짓지 마세요. 대장이 제 걱정을 안 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너를 걱정한 기억이 없어.”
“바로 그거예요. 저를 걱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저를 걱정했던 기억이 사라진 거예요.”
“내 기억이 사라진 그 순간… 내가 네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당연하다고?
강한월이 다시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심검은 실패했고 적들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 조만간 진가린이 올 텐데 자신은 쓰러져 있을 테고…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탁까지 해 놓았으니 그녀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것이 분명.
진가린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신이 생각할 것은, 느꼈을 감정은… 진가린의 안전에 대한 걱정.
그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어째서 이 감정과 기억만 사라졌을까?
“그것도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네가 답을 안다는 말이냐?”
“단장이 의식을 잃기 직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적들이 쓰러졌다면서요. 눈에 보이는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닌데 그들이 쓰러졌다면 심검에 당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계속… 이야기해봐.”
“심검은 심검인데 살기를 매개로 한 심검은 분명 아니고. 그럼 뭐였을까요? 심검을 발동시킨 힘은? 살기는 없었고, 심력은 고갈 상태. 역근경의 내공이 갑자기 소모되었나요?”
“아니, 공력이 빠져나가진 않았어.”
“그러니까 그것밖에 없잖아요. 사라진 기억, 사라진 감정. 그것이 심검을 발동시킨 힘으로 사용된 거죠 뭐.”
강한월은 뒤통수를 강타당한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심검을 발동시킨 힘.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소모된 것.
진가린의 추리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힘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머? 당연히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배웠는데….”
“장학송 문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네. 사용하기 가장 쉬운 건 근력. 수련을 거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공력. 선택받은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초상 능력. 그리고 그다음은 마음의 힘, 즉 심기(心氣)라고 하셨거든요.”
“심기?”
물론 들어본 말이긴 했다.
하지만 굳은 결심과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했지, 생각과 감정을 공력처럼 사용한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부님 말씀이 세상 모든 것의 본질은 같다고 하셨어요. 밥을 먹고 숨을 쉬어 근육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밥을 먹어 만들어진 힘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도 다시 힘으로 변환될 수 있는 거라고. 형태가 변할 뿐 본질은 같은 거고 기(氣)는 돌고 돌 뿐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음… 예를 밥으로 들어서 좀 그런가? 호호호.”
그 뒤로도 진가린은 종알종알 떠들었지만, 강한월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석상처럼 굳어버려 무아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 * *
옥룡설산 천궁.
양 혈승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정해진 시간 외에는 자 혈승을 만날 수 없었지만, 지금같이 중요한 보고가 있을 때는 예외.
“자 혈승님. 강남과 하북에 심어 둔 밀정들이 보낸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강한월 그 아이에 관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몇몇 중요한 정보가 더 있습니다.”
“원숭이의 죽음에 관한 것이겠지.”
역시 알고 계셨구나.
혈승 중의 누군가가 사망할 경우 혈승들은 그 즉시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사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데, 자 혈승만은 그게 누구인지까지 알 수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확실히 자 혈승은 차원이 달랐고, 양 혈승은 새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우선 하북에서 온 정보를 보고드리면….”
독자 활동 중인 혈승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것은 뱀.
그 뱀이 상당한 전력 손실을 겪은 큰 사건이지만, 자 혈승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흘려들을 뿐이었다.
심지어 제자 혹은 핵심 수하라 할 수 있는 원숭이의 죽음마저도.
“원숭이가 누구의 손에 당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번 습격조에 정파 무림의 원로들이 동원된 것은 아닐까 추측할 뿐인데, 사마염은 가능성이 높고 그 외에도 전 무림맹주 위무진 등이….”
“원숭이는 이기적이고 잔머리를 굴리는 터라 항상 동료들의 미움을 받았지.”
“네? 아… 네, 저도 원숭이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이번 죽음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지만, 자 혈승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언젠가 원숭이가 죽게 되면, 적의 손이 아닌 동료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네. 뭐, 하북은 그만하면 되었고… 그다음은?”
“아… 넵. 그럼 무림맹과 흑사련의 정보원들이 보내온 내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이 두 곳은 모두 강한월이 직접 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무림맹의 시설이온데….”
확실히 자 혈승의 반응이 달랐다.
권태로운 표정은 변함이 없지만, 눈빛에 생기가 돌고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그려졌다.
강한월, 그 이름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양 혈승의 마음속에서 슬금슬금 질투심이 고개를 들었다.
자 혈승을 모시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훨씬 먼저인데. 전생인 이백 년 후의 미래에서도, 그리고 회귀한 이후 이곳 현생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자 혈승을 위해 살아왔는데….
“…그렇게 해서 무림맹의 시설은 파괴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오대세가 무인들을 통해 흘러나온 정보를 통해 강한월의 무공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여기 첨부된 문서를 보시면….”
양 혈승에게서 서신을 받아 든 자 혈승이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실망한 표정이 감도는 걸 양 혈승은 놓치지 않았다.
강한월의 성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구나.
양 혈승은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마지막으로 흑사련의 시설에 관한 보고입니다. 제법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던 것 같습니다. 성전까지 발동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용이 입은 타격도 큽니다. 용의 세력의 이인자라 할 수 있고, 향후 후계자로 유력했던 정옥수라는 여인의 사망까지 겹쳐져….”
“불필요한 내용은 굳이 보고할 필요 없네.”
흐뭇했던 감정이 단숨에 날아갔다.
제사장인 용의 세력이 약화되고 심지어 성전마저 선포되었는데 불필요한 보고라니?
역시나 자 혈승의 관심은 오로지 강한월뿐인 것인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흑사련 시설에서의 강한월의 활약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황실이나 무림맹 시설과는 달리 이곳은 무사 전원이 교의 호교무사들이었던 관계로 흘러나오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
“보고서를 줘보게.”
종이를 받아 든 자 혈승이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었다.
그 이면에 숨은 정보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자 혈승의 눈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무엇을 알아내신 걸까?
양 혈승의 궁금증이 커져갈 때, 자 혈승이 다시 건네며 말했다.
“강한월의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는구나. 하지만… 가능성은 보였어.”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어리석어 이해를….”
“굳이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다.”
자 혈승은 거대한 태사의에 눕듯이 기대앉아 생각에 잠기더니,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꼿꼿이 허리를 폈다.
“가급적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혈교의 아이들도 그리고 강한월도 기대에 못 미치는구나.”
“천궁이 세상에 나갈 때가 된 것입니까?”
양 혈승이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얼음과 눈밖에 없는 이 척박한 산꼭대기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렸던가.
자 혈승과 함께 온 천하를 종횡할 그 날을.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점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우선은… 직접 한 번 둘러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