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생명교 (1)
* * *
어라? 이 아줌마가 진짜!
“이거 보세요! 여기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요? 그렇게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면 어떡해요!”
“호호호. 미안해, 총각. 내가 무릎이 아파서 오래 줄을 못 서서 그래. 총각은 몸이 다부진 게 끄떡없겠구만 뭘 그래. 호호호.”
“그 문제가 아니라고요! 여기 제 뒤에 계신 노인분들도 동트기 전부터 줄을 섰다고요. 그리고 다부지게 생긴 건 아주머니도 매한가지….”
여인이 들은 척도 않고 새치기를 하자 곽철의 목에 핏대가 섰다.
평소 설렁설렁하지만 이런 건 의외로 못 참는 성격.
힘으로라도 끌어내야겠다 생각하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곽철을 진가린이 뜯어말렸다.
“오라버니 가만 좀 계세요. 뒤에 어르신들도 참고 계신데 오라버니가 왜 나서요!”
“저분들은 성격이 좋으신가 보지. 나는 이런 거 못 참아!”
곽철이 진가린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대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서 열 분 들어오세요.”
우르르 사람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새치기 한 여인이 마지막 열 명에 속했다.
안쪽으로 사라지기 직전 곽철에게 혀를 낼름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고.
“아니, 저 아줌마가 진짜!”
―오라버니! 제발 좀 참아요! 사람들 눈길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요!
펄펄 뛰던 곽철은 진가린이 전음을 보낸 후에야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 들을 수밖에.
생명교의 지점을 염탐하러 와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사람들이 엄청 모여드네요. 보세요. 저 뒤로 줄이 끝이 안 보여요.”
“우리 앞에 한 오백 명 있었는데, 저 뒤로는 최소 이천 명은 되겠군. 모든 사람에게 쌀을 한 자루씩 나눠주니 이게 돈이 얼마야?”
생명교가 교리를 선포하고 포교를 시작한 지 고작 석 달.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포교 지점이 생겨났고, 먹을 것을 주고 병을 치료해준다는 말에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의무적으로 교인으로 가입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도움을 받다 보면 자발적으로 교에 가입하고 충성을 다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처음 생명교라는 이름이 들렸을 때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척혈단은 이후 교의 행적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오늘 곽철과 진가린이 지점을 방문한 것은 민초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는데, 미리 짐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역대 어느 황제도 하지 못했고, 이름난 사찰이나 도관들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빈민 구제를 생명교는 확실하게 해내고 있으니까.
“더 지켜볼 것도 없겠는데요?”
“그래도 쌀은 받아서 가자고.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깝잖아.”
잠시 후 곽철과 진가린의 차례가 되었다.
문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생명교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무병장수를 하게 해준다는 노래 하나를 배운 후 쌀 포대를 받았다.
걸린 시간은 일각 남짓.
매우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생명에는 귀천이 없으니 나의 피나 황제의 피나 다름이 없다네. 오직 순수한 피를 가진 자만이 영생할 수 있나니….”
노래 가사를 다 외운 곽철이 돌아오는 길 내내 흥얼거렸다.
하나같이 좋은 말들이었지만, 진가린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 * *
여기저기 서류와 서신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곳은 척혈단의 군사실.
탁자 위에 넓게 펼쳐진 지도에 점을 찍으면서 제갈윤이 말했다.
“이번 달에만 열두 곳이 추가되었어요. 다음 달에는 스무 곳이 새로 문을 연다고 하고요.”
“확실히 황실과 무림맹의 총력 지원이 무섭긴 무섭네요. 이런 속도가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오문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으며 민정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던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민 소저. 이거 너무 서두르는 느낌 아니에요? 빠르다고 꼭 좋은 건 아닐 텐데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교도가 늘고 교세가 확장되는 건 좋겠지만 돈을 너무 물 쓰듯 쓰고 있거든요. 하오문 정보관들의 조사에 의하면 하루에 대략 오백만 냥. 한 달이면 일억 오천만. 그리고 두 달 안에 소요 자금은 그 두 배로 늘 거예요. 혈승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반 년 이상 버티기 힘들 텐데….”
“천하전장에도 손을 벌리겠네요?”
“이미 요청이 왔다고 해요. 아직까진 정중한 부탁이었다고 하던데 앞으로는 강요와 협박으로 변하겠죠.”
“도대체… 왜일까요?”
가장 답답한 것이 그것이었다.
혈승들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
황실, 무림맹, 흑사련을 장악했으니 천천히 세를 키워가면 천하는 자신들의 차지가 될 텐데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걸까?
자 혈승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민정화와 제갈윤은 알지 못했다.
민 문주나 유선의 의견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민 문주는 간혹 안부나 전해올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유선도 최근 천마와 함께 폐관수련에 들어가 소통이 원활치 않은 것이 문제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는 거죠.”
“맞아요. 이백 년 후의 혈교와는 달리 인신 공양 등 엄한 짓도 벌이지 않으니 민심이 빠르게 그들 편으로 쏠리고 있어요. 이 상태라면 일 년 후에는 천하 모든 사람이 생명교의 교도가 될 거예요.”
황실을 장악하고 무림을 장악한 데다 민심마저 장악한다면 그것으로 끝.
그보다 더 완벽하게 천하를 손에 넣는 방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자금이 못 버틸 거라면서요?”
“그렇게 믿었는데, 그 생각도 이제는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어째서죠?”
“저와 천하전장이 손을 잡고 시중에 유통되는 자금을 통제하고 있지요. 만약 군자금 목적으로 융통을 원하면 그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요. 하지만…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자금 융통을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온 천하 백성들의 공적이 될 거예요. 자신의 배만 불릴 줄 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로 지탄받다가 결국 칼을 맞게 되겠지요.”
“허어… 무섭네요.”
민정화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가정과 상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상수를 고정시키고 여러 가지 변수를 대입하자, 머릿속의 그림이 점차 모습을 갖춰갔다.
감당하기 힘든 방향이어서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그렸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비록 가정이고 상상일 뿐이지만 벌써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원 소집을 해야겠어요.”
“전원이라면… 누구까지?”
“한 달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모두요.”
“한 달이면 소요자 어른 등 원로분들도 가능하겠네요. 하지만 단장이….”
강한월이 문제였다.
최근 강한월은 홀로 사라지기 일쑤였는데, 중요한 무공을 수련하는 중인 것을 알기에 일체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둔 상태.
빠를 때는 며칠 만에 돌아오지만 길어질 때는 달을 넘길 때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찾아오세요. 단장은 반드시 참석해야 해요.”
“노력해볼게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데요?”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 마지막 전쟁이. 앞으로 일 년 안에.”
* * *
해 질 무렵, 곽철과 진가린이 다녀갔던 그 포교 지점에 훤칠하게 잘생긴 중년 사내가 찾아왔다.
늦은 시간인 덕에 줄은 오전처럼 길지 않았고, 한 시진쯤 지났을 때 사내도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생명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미 해가 졌는데도 문을 닫지 않는군요?”
“원래는 유시(酉時)에 문을 닫는 게 맞지요. 하지만 오래 기다리신 분들이 계신데 어찌 그냥 가시라고 하겠어요. 찾아 주시는 분들이 계시는 한 생명교는 항상 열려 있답니다.”
안내자는 매우 정중하고 부드럽게 답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였고, 이 순간 누구라도 생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생명교는… 매우 자애로운 곳이군요.”
“별말씀을요. 저희는 교리를 따를 뿐이랍니다. 그건 그렇고… 손님께선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왜요? 제가 아픈 사람 같습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쌀이 필요해서 오신 분 같지도 않아서요. 혹시 병을 치료하러 오신 거면 제가 다른 방으로 안내해드려야 하기에.”
“아픈 곳은 없습니다. 쌀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어쩐 일로…?”
“생명교가 궁금해서 왔습니다. 최근 하도 칭찬이 자자하길래… 교리가 어떤지, 제가 믿어도 좋을지 알고 싶어서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줄을 서지 않으셔도 됐을 것을. 이리로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안내자의 인상이 확 펴졌다.
아무래도 쌀을 얻으러 온 사람보다는 도를 구하러 온 사람이 더 반가운 듯.
안내받아 들어간 방에는 후덕해 보이는 교리 선생이 앉아있었다.
눈빛, 표정, 목소리… 안내자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편안했다.
사내는 차를 마시며 교리 선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각 정도 지나니 생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느끼고 사내는 지점을 나섰다.
해가 완전히 진 그 시간에도 지점 앞은 북적거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온통 칭찬 일색.
이 칭찬은 조만간 찬양이 되고 맹신이 될 것이 분명했다.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생명교는 그 이름처럼 사람들의 생명줄을 쥐게 될 터였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데…?’
양 혈승은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생명교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들었던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희석된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이름은 왜 생명교라 했을까?”
첫인상이 나빴던 것, 아니 나쁜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치밀었던 건 교의 이름 때문.
자 혈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면 당연히 혈교의 이름을 써야만 했으니까.
생명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건 혹시 반역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 혈승은 참지 못하고 생명교의 지점을 찾았다.
모시고 나왔던 자 혈승은 마침 홀로 다른 일을 보고 있었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첫 번째 지점을 방문한 후 양 혈승은 혼란에 빠졌다.
여차하면 지점을 뒤집어엎을 생각으로 방문했지만, 평화로운 분위기와 기뻐하는 민초들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교리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혈교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둘 중 하나일 테지.
뱀, 용, 호랑이 그들이 자 혈승에 맞설 생각으로 새로운 교를 만들었거나, 혹은 튼튼한 기반을 만들어 자 혈승에게 바치려는 것.
정답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몇몇 지점을 돌아보며 얻은 결론은 이 생명교를 자 혈승이 차지할 경우 많은 노력과 돈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
‘내일 한 곳만 더 둘러보자. 그런 후에 자 혈승을 뵈러 가면 시간이 맞겠어.’
선 너머 마을에 있다는 또 다른 포교 지사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삼 일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이지만, 양 혈승은 반 시진 안에 도착해 객잔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 * *
양 혈승이 묶게 될 그 객잔.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 둘이 이 층 창가에 앉아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대공자님. 보고 또 봐도 지금 복장이 매우 잘 어울리십니다.”
“종오, 그만 좀 놀리라니까. 자네도 명색이 흑마대 대주인데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고.”
“하하하. 신교의 대공자께서 그런 누더기를 걸치고 계신데, 저야 옷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요.”
“그만하라고 했다.”
“대공자께서 우울하실까 봐 이러는 거지요. 차기 천마가 되실 분이 이렇게 정탐 임무나 하고 계시니….”
“우울하긴. 내가 자원한 건데. 게다가… 직접 와서 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하기도 하고.”
대공자의 말이 맞았다.
종오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