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생명교 (2)
* * *
천마신교의 대공자는 어째서 허름한 옷을 입고 이 객잔에 머무는 걸까?
천마가 유선을 데리고 폐관 수련에 들어간 사이, 생명교라는 요상한 종교가 엄청난 속도로 교세를 확장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기세가 워낙 대단했고, 심지어 십만대산 인근에서도 교에 가입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대공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보를 교류 중이던 하오문의 민정화도 생명교를 요주의 대상이라 알려줬고, 특히나 천마신교와 마찬가지인 종교였기에 더더욱 관심이 갔다.
직접 확인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 흑마대 대주 종오를 데리고 길을 나선 것이었다.
“대공자님, 뭐 좀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침 외부에 나와 있으니 좀 편하게….”
“뭔데?”
“저… 혹시 차기 천마가 되시는 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무슨 그런 생뚱맞은 질문이 있어?”
대공자가 황당하다는 듯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런 술자리에서 늘어놓기에는 너무도 민감하고 무거운 주제였으니까.
“요즘 애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이러다가 유선 공녀와 후계자 경쟁을 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요. 천마님이 유선 공녀만 싸고돈다는 소문이 쫙 퍼져가지고….”
“풉, 난 또 뭐라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수련이나 더 열심히 하라고 해라.”
“아! 역시 걱정할 필요 없는 거지요? 휴, 저는 또 지난번 이공자와의 경쟁 같은 그런 사태가 또 일어날까 봐….”
“그래, 그런 내분은 다시 일어날 일 없으니 걱정 마라. 내가 천마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엥?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종오가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차기 천마가 누가 되느냐에 대해 대공자보다 그가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 날 시켜주면 내가 하는 거고, 만약 유선이 선택되더라도 그녀와 싸울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실망입니다! 지금껏 대공자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따른….”
“됐다니까. 나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야. 게다가 우리 신교의 역사상 여자가 천마가 된 적도 없고. 하지만 그런 불리함을 극복하고 그녀가 천마가 된다면, 난 그녀를 지지할 의사가 있다.”
“왜요?”
“왜라니? 너는 유선 그녀가 얼마나 강단이 있고 또한 무공의 천재인지 모르는 게냐? 여자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천마신교에 딱 어울리는….”
“아하, 이제 알겠습니다.”
잔뜩 화가 나 있던 종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더니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알긴 뭘 알아?”
“후후후. 유선 공녀가 매력적이긴 하죠. 사실 신교 내에 그 정도 미녀는 드무니까요. 대공자님 생각은 천마가 되어도 좋고, 아니면 천마의 남편이 되어도 좋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라면 저도 적극 지지를….”
따악!
대공자의 젓가락이 종오의 이마를 강타했다.
꽤나 아팠을 텐데도 종오의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뜨끈한 죽으로 속을 달랜 대공자와 종오가 길 떠날 채비를 마쳤다.
막 객잔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소.”
훤칠하게 잘생긴 중년 사내였고, 목소리마저 예의 발랐다.
“아? 예. 무슨…?”
“혹시 젊은 양반들도 생명교에 가려는 거면 같이 좀 갈 수 있나 해서. 내가 이곳이 초행이라 길을 몰라서 말이요.”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물은 것이지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우리 정체를 들킨 것이 아닌가 하고 제 발 저렸으니까.
하지만 지나친 걱정이었다. 이 객잔에 묶는 손님들 대다수가 생명교에 가기 위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니까, 중년 사내가 그렇게 묻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면 같이 가시죠. 마침 저희도 생명교에 가려던 참이니.”
대공자와 종오는 몹시 불편했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싫다고 한들 사내가 알아서 뒤를 따라오면 그걸 막을 수도 없었고.
“하하하, 고맙소. 덕분에 길 헤맬 걱정은 덜었군.”
중년 사내, 양 혈승은 넉살 좋게 웃으며 뒤를 따랐다.
사실 그가 대공자와 종오에게 접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름 철저히 숨긴다고 숨겼지만, 절대경을 넘어선 초고수인 양 혈승의 눈에는 대공자와 종오의 주변에서 꿈틀거리는 마공의 파장이 훤히 보였던 것이다.
‘나이는 젊지만 보통 놈들이 아니군. 특히 저자는 마교에서도 꽤나 고위직이겠는데?’
양 혈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공자를 주시했다.
천마신교가 생명교를 노리는 거라면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뱀, 용, 호랑이가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의 판단은 유보된 상태이지만, 천마신교가 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회귀하기 전 미래에서 피 터지게 싸웠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가장 골치 아픈 적은 척혈단이었지만, 마교도 진절머리가 나는 건 마찬가지.
반면 대공자도 길을 걸으며 몰래 양 혈승을 살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나 풍겨 나오는 기세는 전혀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짐작되는 나이에 비해 너무도 팽팽하고 윤기 도는 피부. 내공을 연마한 고수가 아닌데 저렇게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종오. 저 사내가 몹시 수상하다. 마기를 더 철저히 숨기고 말실수 않게 조심해.
―역시 그렇죠? 하지만 마기를 눈치채진 못할 겁니다. 기운을 숨겨주는 단약까지 복용했으니….
―가급적 전음도 쓰지 마라. 왠지 느낌이 안 좋으니.
설마 전음을 알아챌 수 있으려고?
종오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대공자의 말 대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걱정대로 양 혈승은 전음이 오고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용까지 엿들은 것은 아니지만, 전음이 만들어내는 파장의 변화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뭔가 음모를 꾸미는 건가?
은밀히 전음을 주고받는 것을 확인하니 그들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졌다.
흥, 너희들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겠다.
양 혈승이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자 혈승에게 바쳐질 생명교를 천마신교가 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생명교 포교 지점 앞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종오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가 생명교 지점입니다. 오늘 많은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어? 당신들도 여기 들어가려는 거 아니었소? 같이 줄을 서면 좋을 텐데.”
“헤헤, 저희는 뒷간이 급해서. 일을 좀 보고 천천히 들어가려고요.”
양 혈승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대공자와 종오는 얼른 자리를 떴다.
진짜 일이 급한 것처럼 건물 뒤편으로 쪼르르 달려간 그들은 양 혈승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휴우, 뒷간까지 쫓아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일단은 잘 따돌렸지만 그래도 계속 주의하자고. 멀리 간 건 아니고 어차피 주변에 있는 거니까.”
“그래야죠. 여기서 시간 좀 죽이다가 반 시진쯤 지나고 줄을 서면 되겠어요.”
“줄은 너 혼자 서라. 지금부턴 각자 행동하는 게 효율적이야. 네가 방문객으로 가장하고 생명교가 어떻게 포교를 하는지 체험을 해봐. 나는 몰래 안에 들어가서 살펴볼 테니.”
“함께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잠입은 지금보다는 이따 해가 진 후에 하는 게….”
“아니. 밤보다는 차라리 지금이 나아. 이렇게 사람이 북적거릴 때가 기척을 숨기기 더 수월하거든.”
“그건 그렇네요. 어쨌든 조심하세요. 생명교 본부도 아닌 이런 시골 지점에 대공자님께 위협이 될 고수가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내 은신술을 못 믿는 거냐? 어쨌든 조심은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공자의 몸 주변에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생겨나나 싶더니 스르르 모습이 사라졌다.
역시 대단한 솜씨.
종오는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보다 더 대단한 은신술을 펼친 양 혈승이 저쪽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 * *
포교 지점은 세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맨 앞쪽 쌀을 나눠주는 곳과 그 뒤의 진맥을 하고 약을 지어주는 곳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쌀과 약을 나눠주는 모습.
생명교가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비결이 여실히 드러났다.
‘칫,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생명교가 아니라 황금교라고 이름을 바꿔야겠군.’
돈으로 포교하는 모습이 경멸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척박한 십만대산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교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어쨌건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정보.
지붕과 대들보를 오가며 한동안 관찰하던 대공자가 마지막 건물을 향해 은밀히 몸을 날렸다.
그곳은 앞선 건물들처럼 북적이지 않았다.
생명교의 포교사로 보이는 사람들만 몇몇 보일 뿐이었는데, 대공자는 여러 개의 방 중 가장 은밀해 보이는 곳의 천장으로 스며들었다.
“지사장님. 오늘도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대로라면 이번 달 예상 인원을 배는 초과할 것 같아요. 빨리 추가 요청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요청을 했네. 쌀과 약재가 닷새 후면 도착할 거야. 돈 걱정은 하지 말고 포교에 최선을 다하게.”
역시나 이 방에서 이야기 중인 사람들이 핵심 인물들이었다.
대공자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정신을 집중했다.
“쌀과 약재만 충분하다면 포교는 문제없습니다. 다른 지사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낼 테니 안심하십시오.”
“일반 교도들만 늘린다고 능사가 아닐세. 포교원으로 쓸 만한 후보들을 확보해야 해. 그 성과에 따라 우리 실적도 평가된다는 걸 잊지 말고.”
“포교원이 많이 필요한가 보네요? 지사를 또 늘리는 겁니까?”
“그렇다네. 며칠 전 지사장 회동에서 정보를 받았는데, 올해 안에 사천과 청해는 물론 신장까지 포교지사를 개설한다고 하더군.”
신장?
순간 대공자의 표정이 굳었다.
감히 천마신교의 터전인 신장까지 들어와서 포교를 하겠다고?
“대단하네요. 저… 그럼 혹시… 저도 지사 하나를 맡을 기회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자네 욕심은. 뭐 좋아. 원하는 곳이 어딘가? 내 한번 추천을 넣어보겠네.”
“아! 감사합니다, 지사장님. 그럼 혹시 사천의 성도 부근에 자리가 생길까요? 청해나 신장은 너무 멀고 사천 정도면 욕심이 나네요.”
“성도 부근이라… 어디 보자….”
지사장이 서랍을 열더니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앞으로 설치될 포교지사의 예정지가 적혀 있는 책자 같았다.
“성도 부근에도 두 곳의 예정이 있군. 좋아. 경쟁이 치열하긴 하겠지만 내 강력히 추천을 해보겠네.”
“아이고, 지사장님.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직 성사도 되지 않은 일 갖고 호들갑을 떨던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나누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또 누가 들어오진 않는지 잠시 기다리던 대공자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목표는 지사장이 꺼내 들었던 그 책자.
정말로 신장에도 포교지사가 생기는 것이 맞는지, 감히 십만대산 인근에도 진출하려는 것인 것 확인하고 싶었던 것.
소리 없이 서랍을 열어 책자를 꺼내든 대공자가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과연 앞으로 일 년 내에 신규로 진출할 지역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열 받게도 신장 지역을 포함해서.
게다가 지사 하나당 얼마의 예산이 배정되는지, 인력배치와 포교 전략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었다.
꽤나 유용한 정보.
기분은 나쁘지만 어쨌든 오늘 잠입의 성과로는 상당히 훌륭했다.
책자를 품에 넣은 대공자의 그림자가 다시 천장 위로 사라졌다.
스르륵 지붕과 지붕을 건너뛴 그림자는 건물 밖 보는 눈이 없는 담장 앞에서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대공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줄을 서고 있을 것이 뻔한 종오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