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짧은 회우 (1)
* * *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오겠다 싶을 정도까지 죽어라 달린 그들.
배를 빌려 강물 위에 띄운 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진 소저, 그리고 곽 소협. 감사합니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소.”
진기가 소진되고 부상도 심했지만 대공자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곽철과 진가린 모두 생색을 내는 성격은 아닌지라 담담히 대꾸했는데….
“감사는 무슨. 당연히 서로 돕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까?”
“저희도 생명교 지사들을 조사 중이거든요. 아침 일찍 줄을 서서 쌀을 받아 나오다가 대공자님을 본 거예요. 마침 같은 날 같은 지사를 찾은 건데, 아무래도 제가 천마신교랑은 인연이 있나 봐요. 호호호.”
“내가 운이 좋았군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은혜는 무슨… 그나저나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예요? 어마어마한 고수이던데.”
“글쎄 나도 그것이 궁금하오. 몇 마디 나눠보니 생명교의 사람 같지는 않았소만….”
진가린은 아까 그 초고수가 혈승, 혹은 최소한 혈승의 수하일 거라 짐작했다.
주교 일·이호가 뛰어든 순간 ‘주교들이 어째서?’라고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척하기는 곤란했는데, 대공자가 혈교에 대해 알고 있는지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
“조사해보면 알게 되겠죠. 일단 회복에만 신경 쓰세요. 두 분 다 부상이 심하신데.”
대공자는 품속에서 시커먼 환단을 꺼내 입에 넣었다.
천마신교의 최상급 요상단인데, 이것을 먹지 않으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물론 그런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 정도 부상은 별것 아니오. 그보다는 이 사실을 빨리 천마께 알리는 것이 급선무….”
“바로 먼 길을 가시겠다고요? 저희 본부로 가셔서 부상 치료도 하시고, 광군영 선배도 만나 보시는 게….”
“보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이번엔 어렵겠소.”
그의 눈빛이 하도 단호해서 진가린은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배는 가까운 나루터에 잠시 멈췄고, 대공자와 종오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괜찮을까요? 십만대산까지는 길이 먼 데.”
“명색이 천마신교의 대공자.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죠. 지금 우리가 남 걱정할 입장도 아니고. 우리도 어서 복귀해요. 이번에는 보고할 것이 많으니.”
* * *
생명교를 살펴보라는 임무를 줘 양 혈승을 떼어낸 후, 자 혈승은 홀로 어딘가로 향했다.
천궁의 요원들이 가져온 정보는 불분명했지만 자 혈승의 초상 감각이 더해지자 대략의 위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초인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어떤 이끌림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마치 자석의 음과 양극이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혹은 혈육의 피가 끈끈하게 서로를 찾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자 혈승은 그런 끌림이 불편했다.
이런 감정은 신주의협에게나 어울리는 것. 하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심연 깊은 곳에 철저히 봉인되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천천히 산길을 오르며 자 혈승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강한월은 그저 장기판의 말일 뿐이라고.
딴생각을 품었을지 모르는 혈승들을 긴장시킬 칼이며, 재미없이 돌아갈 무대에 긴장을 더해줄 조연. 강한월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후후.”
자 혈승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강한월이 장기판의 말이라면, 지금 그를 찾아가고 있는 자신은 뭐란 말인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끌려 발걸음을 했으니 그저 잠깐 보고 가면 그만.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유유자적 산을 오르던 자 혈승은 솔밭 모퉁이를 돌다가 걸음을 멈췄다.
저곳에 있구나.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먼 거리였지만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근 두근.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심장 박동.
뒤이어 피의 흐름, 몸 밖으로 은은히 퍼져 나오는 기의 파장이 느껴졌다.
자 혈승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전해져 오는 모든 것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아니 다행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았지만 어쨌든 강한월이 병을 극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처방해준 방법, 즉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의 상호작용에 의한 생명력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미봉책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피에서 발산되는 생명력.
후후, 소림의 땡중들이 일을 할 줄 아는군.
결국엔 역근경을 통해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란 것도 사실 미리 예측했던 것.
나한진을 손 봐주면서까지 송목 대사와 인연을 만들어 놓았던 것도 자 혈승 본인의 안배였으니까.
강한월의 병이 완치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예측과 안배가 실현되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기분은 뿌듯했다.
하지만 이 정도 살펴본 것으로 끝날 일은 아니니, 강한월의 경지가 어디까지 올랐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자 혈승은 은근히 공력을 끌어올리며 공기처럼 부드러운 기운을 발사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확산된 그 기운은 서서히 강한월의 주변에 내려앉았는데….
그 시점부터 자 혈승의 초감각에 강한월의 몸 상태가 선명하게 읽혔다.
공력의 상태는 어떤지,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에는 어떤 기운이 담겨있는지.
심지어 최근 어떤 대결을 펼쳤고 어떤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지까지 짐작이 되었다.
아직 숙제를 풀지 못한 것이냐?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했었다. 강한월이 심검의 자물쇠를 열었을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역시나 무리였던 것이다.
사마염을 통해 전달한 자신의 심득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자 혈승의 삐뚤어진 심성이 발휘되어 일부러 내용을 꼬아 놨으니까.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고금제일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심검만큼은 끝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자신도 달성하지 못한 것을, 게다가 내용까지 꼬아서 알려줬으니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그래도 왠지 너는… 너만은 가능할 것 같았는데….
자 혈승은 묵묵히 강한월의 심상 수련을 훔쳐봤고, 어떤 의도로 무엇을 수련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알려줬던 단초, 즉 살기를 키워 검의 예기로 변환시키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강한월이 시도하고 있는 심검의 원천은 살기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자 혈승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강한월은 흠칫 놀랐다.
어떤 기운, 아니 기운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자신에게 접속하려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경계했지만, 웬일인지 위협적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친숙한 느낌이었다.
설마… 사부님?
【 한월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
자 혈승의 교령통의술은 불가의 혜광심어보다 더 심오한 것이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함은 물론 상대의 생각까지 소리 없이 받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 사부님? 정녕 사부님이 맞으십니까? 】
강한월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주변에 가득 찬 부드러운 기운이 그를 다시 눌러 앉혔다.
【 일어날 것 없다. 굳이 얼굴은 봐서 무엇하겠느냐? 너의 몸 상태와 심상을 살필 수 있으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더 좋구나. 】
굳이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고?
수년간 그토록 그리워하고 다시 만날 날만 기다렸는데…?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지만, 이내 강하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챈 것이다. 자신의 심검 수련을 도와주려는 것을.
【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병은… 완치가 되신 거고요? 】
【 내 심신 상태는 아직 불안한 부분이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앞에, 심지어 네 앞에도 안심하고 나서지 못하는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 그래서 몇몇 지인들과 함께 조직을 하나 만든 거야. 】
【 천궁이라는 조직 말씀이시죠? 】
【 그래. 회귀자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비밀스레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힘을 키우는 한편, 시간의 돌을 회수하는 일을 하고 있단다. 】
사부에게서 직접 들으니 많은 의문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충분치 않았고, 여전히 이해 못 할 일들이 있었다.
그럼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자 혈승이 설명을 덧붙였다.
【 조직이 만들어졌지만 나는 천궁에 머물지 못하고 천하를 떠돌았고, 그러다 보니 내 의도와는 다르게 조직원들이 무리한 활동을 한 경우도 생기더구나. 생명의 돌의 중요성을 강조했더니 힘을 써서라도 그것을 확보하려는 시도마저….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내가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
그랬던 거구나.
찜찜하게 남아있던 의혹과 의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물론 상세한 부분에서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지만, 사부가 주는 신뢰감 앞에서는 별 의미 없는 것들.
이제 남은 응어리는 서운함 하나뿐인데….
【 저에게 귀띔을 해 주실 수는 없으셨던 겁니까? 하다못해 잘 지내신다는 소식이라도 보내주셨으면… 저는… 혼자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
【 미안하구나.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 나 또한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너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걸 믿어줬으면 한다. 미래 무림맹이 보낸 의식 전송 후 나는 광증에 시달렸고, 혹시 나 또한 괴물로 변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으니까. 】
이 정도면 되었을까?
준비해온 거짓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 혈승은 강한월의 감정선을 살폈다.
다행히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저보다 사부님이 더 힘드셨을 텐데요. 제가 아직도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
【 그래, 우리 사이에 사과는 필요 없겠지. 그보다는 너의 수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아마도 심검을 연구 중인 것이겠지? 】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강한월은 마음이 울컥했다.
사부의 존재…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고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 존재가 너무도 필요했으니까.
소요자, 송목 대사, 장학송 문주 등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사부에 비견될 수는 없었다.
【 맞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마불진경의 기운을 잃고, 지금은 심검의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마침 사부님께서 심득을 전해주시기도 하셨고요. 】
【 심득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었지. 어쨌든… 지금은 어떤 상태인 거냐? 】
【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나 하면…. 】
심검을 얻기 위한 노력에 대해 강한월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소림에서의 일, 장백산에서의 일, 그리고 최근의 일까지.
중요한 부분은 살기를 통해 심검을 이루려는 시도였고, 그 부분에선 자 혈승도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살기에 의한 심검이 결국 실패하고 의외의 상황에서 심검이 발현된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자 혈승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 살기가 아닌 다른 감정과 마음으로 심검에 닿았다고? 】
【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네요. 】
【 이론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머릿속의 생각이나 마음속의 감정도 결국엔 기(氣). 자고로 모든 기는 다른 형태로 변환이 가능하니까. 】
【 장백산의 장학송 문주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
【 그래. 동방선도의 전승자라면 이 도리를 알고 있겠지. 하지만… 이론이 그러할 뿐 현실적이지 않아.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한계가 있다. 심검으로 화할 정도로 큰 힘을 만들 수 없어.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살기뿐. 】
대면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사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한월도 마찬가지 생각이긴 했는데, 아무리 감정을 쥐어짜 내도 그날과 같은 심검 발현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 미안하구나 한월아. 이 사부가 부족하여 너에게 정확한 답을 줄 수 없으니. 답답할 때는 길을 돌아가는 것도 방법인 법. 잠시 심검을 내려놓고 다른 무공을 익히면 어떻겠느냐? 초월경의 단계에 적합한 다른 무공들이라면 내가 당장에라도 도움을 줄 수…. 】
자 혈승은 이렇게 강한월을 떠보았고.
【 아닙니다. 당장 승산이 보이지는 않지만 좀 더 심검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
강한월은 이렇게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