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천마의 결심 (2)
* * *
천마의 명령도 떨어졌겠다, 유선은 내일 당장 길을 떠날 작정이었다.
밤늦은 시간. 강한월, 소영영을 비롯한 척혈단 사람들과 재회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싸고 있을 때 천마의 호출이 왔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긴 여행을 해야 하는 건 안중에도 없는지, 천마는 극한의 수련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헉헉헉헉.
고통에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듯 숨이 찼다.
이런 뭐 같은….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지만, 왠지 여행길에 오르면 천마와의 이런 수련이 그리워질 것도 같았다.
“크아악.”
그리워지기는 개뿔.
목을 쥔 천마의 손에서 엄청난 공력이 쏟아져 들어오자 유선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번 고통은 보통 때와는 또 다른 것이어서, 그녀는 거의 일다경 동안 혼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쯧쯧. 이렇게 엄살이 심해서야.”
“좀 전의 그것… 뭐였습니까? 부상을 입었던 건 대공자이지 제가 아닙니다만.”
천마가 불어넣어 준 공력이 선천마기라는 것을 알아챈 유선이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감격한 마음을 들키기 싫었으니까.
“제자라는 것들이 밖에 나가서 망신만 당하고 다니면 안 되니까.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해.”
이번에 유선에게 넘겨준 선천마기는 상당한 양이었다.
아무리 마신강림을 대성해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들, 인간의 몸을 갖고 있는 이상 선천마기가 줄어든 것은 분명 부담일 수밖에 없는 것.
“감사합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몸에 무리가 없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다.
정신에 이상이 없냐고 물은 것. 나쁘게 표현하자면 미친 것 아니냐고 물은 것인데, 그 정도로 최근 천마의 말과 행동이 과거와 달랐다.
“후후, 네 눈에도 이상해 보이나? 난 달라졌다. 마공을 익혀 경지에 오른 이후 이렇게 정신이 맑아 본 적이 없어.”
“마신강림의 효능이군요. 감축드립니다.”
“축하받을 일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매우 두렵다.”
유선은 귀를 의심했다.
천마의 입에서, 그것도 마신경에 이른 천마의 입에서 두렵다는 단어가 튀어나오다니?
“골수에 스며들어 이성을 잠식하던 마기는 마신강림의 마영(魔靈)에 깨끗이 씻겼다. 신성한 마신의 강림이 저급한 마기에 방해받아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언젠가는… 아니 조만간 마기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영이 내 정신을 지배할 거라는 뜻이지.”
“천마께서는… 이겨 내실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만약 정말이라면 내가 널 잘못 가르쳤군.”
천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강인하고 위엄이 넘쳤지만, 유선은 그 속에서 끝 모를 두려움과 허탈감을 엿보았다.
높은 곳에 우뚝 선 강자의 숙명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혹시… 후회하십니까?”
“후회? 푸하하하, 그럴 리가. 그냥 두려울 뿐이다. 이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에 대한 두려움이니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지.”
천마가 왜 이곳까지 달려와 전쟁의 가능성을 타진하는지, 왜 이 늦은 시간 자신을 붙들고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 유선은 서서히 느낌이 왔다.
서둘러야만 하는 것이다. 천마 스스로의 상황 때문에.
“강한월은 만나면 전하라. 척혈단이 제대로 준비를 갖췄던 아니던 전쟁을 서두르라고. 천마신교와 우군이 되어 협력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쉽지는 않겠지만 가급적 수장들의 대결로 승부를 결정지을 방법을 모색하라고 권해라.”
“자 혈승을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네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자 혈승, 그리고 온 세상이 인정하는 신주의협과 대결을 펼치고 싶구나. 그들 외에 누가 있어 내 진면목을 알아줄 수 있겠나?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분명 평생 후회하게 되겠지.”
유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분명 천마는 강했다.
마신을 강림시키지 않은 지금 모습으로도 혈승 중 무의 수장인 호랑이보다 강할 것 같았다.
평상시 모습이 그 정도이니 마신이 강림한 상태의 천마는 분명 인간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럼에도… 왠지 자 혈승을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천마에게 표정을 들키기 싫어 유선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이 승리하실 거예요. 천하를 구하신 후에 마음 편히 마신의 길을 걸으시게 될 겁니다.”
* * *
한편 유선이 천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각, 자 혈승과 양 혈승도 옥룡설산의 천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혈승님.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유선이 천마에게 했던 질문이 똑같이 자 혈승에게도 건네졌다.
이번에 세상을 둘러보고 돌아오면서 자 혈승이 좀 변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전생과 이번 생, 두 번의 인생 모두를 자 혈승에게 걸고 있는 양 혈승으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는 질문이구나. 무엇이 궁금한 거지?”
“그냥… 자 혈승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닌지 여쭙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의문이 생긴 건지 묻는 것 아니냐.”
표정이, 말투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이전과 다르다는 애매한 근거를 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분명한 변화도 있었다.
“최후의 결전을 서두르시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지켜보자는 입장이셨는데….”
시간의 자 혈승의 편이었다.
제한된 수명이라는 것은 남들의 이야기이고, 자 혈승은 이미 그 경지를 초월했음이 분명했다.
물론 인간의 육체를 가진 이상 무한히 살 수는 없을 테지만, 시간의 돌 열두 개를 확보하는 순간 회귀를 통해 삶을 반복할 수 있었다.
무한한 삶. 어쩌면 양 혈승이 자 혈승을 따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일 테고.
“후후, 내 몸에 이상이 생겨 서두르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것이냐? 내가 갑자기 죽기라도 할까 봐?”
“어찌 그런 말씀을? 절대로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농담이다.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어.”
자 혈승은 말을 멈추고 술잔을 들었다.
천천히 술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는데, 양 혈승의 눈에는 변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왜 달라졌냐고? 뭐 별다른 이유는 없다. 외부의 환경이나 변화에 영향받을 단계는 이미 지났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심경의 변화를…?”
“궁금증이 커졌고,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어.”
자 혈승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번에 강한월을 만나고 난 후 관심과 궁금증이 증폭된 것이다.
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과연 뱀, 용, 호랑이에 맞서 제대로 된 승부를 펼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생명교가 공고해지면 강한월에게 더욱 불리해질 것 같았고, 판이 조금 더 빨리 깔리도록 약간의 도움이나 줄 생각.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불편하긴 했다.
심연 속에 봉인한 신주의협의 잔념이 영향을 끼친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이 솔직한 답변을 양 혈승은 다르게 이해했다.
“뱀, 용, 호랑이. 그들이 배신한 것이 맞는지 속히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군요.”
자 혈승은 다시 술잔을 들었고, 양 혈승에겐 긍정의 답변으로 보였다.
“소와 말은 어떻게 할까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명령을 내리시면 찾아낼 수….”
“신경 쓸 필요 없다. 이 세상에 녹아들어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번에는 양 혈승이 말을 잇지 못하고 술잔을 들었다.
소와 말을 굳이 찾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나에게도 새 인생을 살 기회가 있었다는 말인가?
술을 입에 털어 넣은 양 혈승이 씁쓸하게 웃으며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본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자 혈승을 모시고 영생을 살기로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천궁은 어떤 준비를 갖추면 되겠습니까?”
“이제 세상으로 나간다. 한 달 안에 천궁 본부를 사천으로 옮기도록. 이곳 옥룡설산은 중원에서 너무 멀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은 해산시켜라. 우리는 소수로 움직일 것이니. 당분간은 신주의협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네가 천사장의 이름으로 전면에 서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 혈승께서는?”
“나는 잠시 홀로 움직일 것이다. 추후 사천에서 만나자.”
* * *
뱀, 용, 호랑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쩌면 현시점에서 가장 많은 회의가 필요한 것은 그들이었다.
“생명교는 매우 순조롭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훑으며 호랑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미 그 보고서를 먼저 읽은 뱀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순조로운 만큼 자금이 빠르게 바닥나고 있어. 두세 달 후에는 내가 가진 장신구마저 팔아야 할 판이야.”
“전장과 상단들에서 자금을 땡기기로 한 것 아닌가?”
“그랬지. 하지만 기대에 많이 못 미쳐. 제일 큰 천하전장부터 우리 요구의 이 할밖에 협조를 안 해주니….”
“이런 건방진 것들이! 단단히 혼쭐을 내서 본보기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
험악한 표정으로 씩씩대는 호랑이를 보며 뱀과 용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공이 강한 만큼 머리도 좀 따라주면 좋으련만… 역시 호랑이는 한계가 있었다.
“상계의 자금 흐름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야.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천하전장 장주가 결심을 하더라도 외부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여 실제로 우리에게 넘겨주는 데는 빨라야 석 달. 게다가 상계의 노련한 전주들은 그 돈이 생명교로 흘러 들어가는 걸 알고 있을 거야. 애써 좋은 모습으로 포장해 놓은 생명교의 평판에 큰 타격이 될 테지.”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당장 굶어 죽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그보다 이것 먼저 읽어보게.”
씩씩대는 호랑이를 향해 뱀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천마신교의 마가들이 전쟁 준비에 돌입한 것 같다는 동창의 첩보 보고서였다.
“천마신교가 왜 갑자기?”
“뻔하지 않나? 생명교에 대해 자 혈승이 반응을 한 것이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던 호랑이의 표정이 단숨에 싹 바뀌었다.
이건 자금이 딸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일부러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이야.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왜? 후회되나?”
“뱀 자네는 자 혈승이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게다가 천마신교라는 무력 조직까지 장악하고 있는 그가…?”
“두렵지. 하지만 생명교의 활동을 후회하지는 않아. 어차피 홀로서기를 타진해볼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어. 여차하면 생명교를 자 혈승에게 받치면 그만이고.”
이것은 뱀의 생각이었고 용의 생각은 또 달랐다.
만약 자 혈승이 천마신교를 이끌고 전쟁을 시작한다면, 그 후에는 항복을 하고 말고 할 기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아는 자 혈승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자 혈승과 싸울지 아니면 지금 당장 굽히고 들어갈지 결정해야 해. 한번 선을 넘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어.”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여차할 경우 댈 핑계는 이미 생각해 두었으니까.”
“무슨 적당한 핑계가 있다고?”
“척혈단. 그것들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하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하면 돼. 자 혈승은 이해할 거야. 전생에서 도망친 것도 척혈단 때문이니까.”
과연 적당한 핑계였다.
자 혈승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근거는 명확했으니까.
게다가 현재의 척혈단을 신주의협이 이끌고 있다고 한다면?
“좋아. 그럼 자 혈승에 맞설지 아닐지는 굳이 지금 결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긴 시간은 아니지만 최소 몇 달은 더 여유가 있는 것이지. 어쨌든 이 핑계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척혈단과의 싸움을 시작할 필요가 있어.”
“동의하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이미 계획도 있는 것 같군?”
“동창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말게. 척혈단 놈들이 어디 숨어있는지 이미 꼬리를 잡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