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67화 (144/210)

167화. 척혈단의 기지개 (1)

* * *

한 달간 강행군을 한 유선이 드디어 척혈단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사공의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길.

저 멀리 선착장이 어렴풋이 보였다. 벌써부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울컥했고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줘야 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시 방문한 것이지만, 마치 고향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

“언니! 보고 싶었어요!”

입에 손을 모으고 소리를 꿱꿱 지르는 진가린, 그 옆에서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는 소영영.

별 관심 없다는 듯 딴 곳을 보고 있었지만 광군영도 함께였다.

마주 손을 흔들어줄까 하다가 유선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흥, 하여간 나잇값을 못 하고 유치하기는.

“잘 왔어. 그간 고생이 많았지?”

배에서 내리는 유선을 꼭 끌어안으며 소영영이 말했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꽤나 많아서 유선의 한쪽 어깨가 축축해졌다.

“고생은 무슨. 죽지 않았으면 된 거죠.”

유선이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내용은 진심이었다.

문무대를 떠나 십만대산으로 향할 때는 정말로 죽을 각오를 했었으니까.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었다.

“정말로 신교의 마인이 되었구려. 그것도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의. 이제는 말도 함부로 못 하겠군.”

유선의 기도를 유심히 살피던 광군영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은은히 풍겨 나오는 마기를 보고 그녀가 새로 태어났음을, 그리고 천마가 아끼는 제자가 되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광군영의 인정은 유선으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목숨을 걸고 떠났던 여정에 성과가 있음을 인정받은 것이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본부로 가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요.”

진가린의 재촉을 받고서야 소영영이 유선의 몸에서 떨어졌다.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는 유선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긴 여행의 피로는 이미 싹 풀려 있었다.

* * *

본부에서도 환영은 이어졌다.

신룡대회를 함께 치른 제갈윤과 위청보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간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은 민정화도 살갑게 그녀를 맞았다.

차를 마시며 잠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드디어 강한월이 나타났다.

“유선 대공녀. 정말 잘 오셨소.”

강한월은 진심으로 기쁜 표정이었다.

천마의 제자가 되어 돌아온 그녀의 모습이 예전 그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증명했으니까.

회귀자도 새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마음만 먹으면 전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반면 유선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강한월과 같은 기쁜 표정을 짓지는 못했다.

자신이 변한 것 이상으로 달라진 강한월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민정화가 전해준 소식을 통해 강한월이 겪은 일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최근의 천마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가 강한월에게도 엿보였다.

초월자의 모습, 뭔가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느낌.

큰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강자의 탄생은 기뻐할 일이지만, 점점 자신과 멀어지는 듯하여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강한월 단장님. 감사도 표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안타깝게도 닥친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뒤로 미뤄야겠네요.”

먼 길을 온 손님에게 휴식 시간을 주는 것이 예의이겠지만 회의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유선의 말 대로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특히나 민정화의 표정이 급했다. 아마도 뭔가 보고할 것이 있는 모양.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유선이었다.

천마신교의 현 상황, 천마의 결심, 그리고 척혈단에 대한 당부의 말이 차례로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환영할 내용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큰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이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천마신교의 마인들이 중원에 발을 디디게 되는 상황이니, 아무리 우군이라 한들 마음이 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명교가 도발을 시작하면 그때 도우러 오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천마신교가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우리 신교의 입장에서는 생명교의 도발은 이미 시작된 겁니다. 대공자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으니까요.”

“하지만 대공자를 공격한 것은 생명교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천마께서도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

“알죠. 하지만 적은 생명교로 특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마신교의 칼끝이 중원 전체로 향할 위험이 있어요.”

질문했던 강한월은 유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전쟁. 전체적인 그림이 중요한 것이지 굳이 세세한 사실관계를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십만대산은 너무 멀어요. 적들이 도발을 시작한 이후 움직이기 시작하면 너무 늦죠. 신교의 부대가 중원에 도착하면 이미 전쟁은 끝났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좋든 싫든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수많은 부대가 십만대산에서 출발하는 순간 적들도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겠군요.”

“이미 알걸요? 그렇지 않나요, 민정화 소저?”

유선이 민정화를 향해 물었다.

“물론입니다. 저 역시 하오문의 정보원들을 통해 신교에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까요. 동창의 눈과 귀는 천하에 깔려 있으니 그들도 물론 알고 있을 겁니다. 단지 궁금한 것은 그래서 정확히 언제 신교가 출정하냐는 것인데…?”

“오늘 이 회의가 잘 끝났다는 보고서를 천마께 보내면 그 즉시 십만대산을 출발하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에 맞춰 우리 척혈단도 준비를 갖춰야겠네요. 관련해서 저도 보고할 것이 있는데….”

“아, 잠시만요. 제일 중요한 이야기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제일 중요한 이야기? 그게 뭐죠?”

유선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고 뜸을 들였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꺼내기 조금은 꺼려하는 듯해서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정, 사, 마에 황실까지 모두가 뛰어드는 큰 전쟁이 될 테지만 사실 승부처는 따로 있어요. 결국 자 혈승을 누가 이길 수 있느냐에 승패가 걸려있죠.”

“초고수 간의 대결을 뜻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자 혈승은 놓치면 결국 헛수고인 셈이니까요. 과연 자 혈승을 이길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걸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유선이 머뭇거린 이유가 밝혀졌다.

신교의 교도에게는 천마는 곧 신(神). 당연히 천마가 자 혈승을 이길 거라 장담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으니까.

“우리 쪽에도 경지를 초월한 초고수는 많습니다. 마신강림을 이루신 천마, 제 사부이신 신주의협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진가린의 사부이신 장학송 문주님도 계시고요. 이 세 분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소요자 어르신과 위무진 맹주님도….”

“강한월 단주 본인을 빼놓다니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맞아요. 우리 편에도 고수는 많죠. 신교의 원로 마인들 중에도 드러나지 않은 고수들이 많이 있고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안심이 안 돼요. 뱀, 용, 호랑이 이들을 상대하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래도 자 혈승은….”

자 혈승을 언급할 때 유선은 목소리마저 떨렸다.

그녀가 자 혈승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강한월은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광군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완성된 마신강림이 어떤 위력을 낼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자 혈승을 이길 자신이 없다고?

“솔직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죠. 그럼 유선 소저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마와 신주의협 두 분이 동시에 자 혈승을 상대하는 것으로 작전을….”

민정화 딴에는 최선의 방안을 말한 것인데도 여전히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정과 마의 최고수 둘이 힘을 합해도 자 혈승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는 듯이.

“뭐예요? 설마 자 혈승이 정말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모르겠어요. 제가 비록 제자이긴 하지만 천마님의 경지를 제대로 아는 건 아니고, 특히 신주의협은 뵌 적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유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천마와 신주의협이 힘을 합하면 달마대사나 장삼봉 진인과 싸워도 이길 수 있을 텐데 도대체 뭐가 걱정이라는 말인가?

“여러분은 이백 년 후 미래에서 혈교가 싸움에 지고 현재로 도망쳐온 것이라고 알고 있죠?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미래 척혈단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열한 명의 혈승일 뿐이죠. 자 혈승은 한 번도 싸움에 나선 적이 없었고, 만약 그가 나섰다면 혈교가 질 일은 절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뭐?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 혈승이 미래의 척혈단보다 강했을 거라고 해서 천마와 신주의협을 합한 것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유선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은 강한월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유선의 것과는 각도가 달랐다.

과연 천마와 신주의협이 힘을 합할 수 있을까?

천마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의 사부 신주의협이 걱정이 되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안개에 쌓인 듯 모호할 뿐.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일단 유선 소저의 의견을 반영해서 전략을 짜보도록 해. 승패가 거기서 결정될 것이라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강한월의 말로 이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이어지는 주제는 민정화가 가지고 온 보고서.

“혈승들이 동창의 정보력을 이용해 우리를 감시하고 있듯, 우리고 당연히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어요. 이것은 오늘 아침에 받은 가장 최신의 첩보인데… 혈승들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아마도 우리 척혈단을 공격하려는 것 같아요.”

“뭐라고요? 아니 어째서 갑자기 우리를…?”

유선이 자 혈승을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문제였다.

그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니까.

“조금 전 논의했던 문제, 즉 천마신교가 출병을 준비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것 같아요. 물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요.”

“하지만 어떻게 우리를 공격한다는 거죠? 설마 우리 위치가 발각된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민정화와 제갈윤이 서로를 돌아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척혈단의 두뇌들의 표정을 보니 일부 안심은 되었지만, 그래도 납득할 만한 설명도 필요했다.

“저희가 너무 꽁꽁 숨어버리면 오히려 적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게 될 것 같아 일부러 몇 가지 단서를 흘렸어요. 동창의 정보원들은 그것을 문 것이고요.”

“가짜 정보를 줬다는 말입니까?”

“가짜는 아니에요. 가짜를 구별 못 할 만큼 동창이 어리숙하지도 않고요. 진짜 척혈단의 정보이기는 한데, 본단의 위치는 당연히 아니고 다른 곳의 정보를 약간 흘렸죠.”

“다른 곳? 그게 어디입니까?”

“원로들이 머물고 계신 영선곡입니다. 적들은 그곳이 우리 척혈단의 본부라고 믿을 거예요.”

뭔가 안심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민정화와 제갈윤이 적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 기뻤지만, 그렇다고 원로들에게 위험을 전가시켜서는 안 되니까.

“원로들도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예요. 그분들의 동의와 협조가 없었으면 처음부터 이런 작전은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혈교 무리가 공격해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시점은 언제쯤으로…?”

“그들도 준비를 갖춰야 할 테니 아마 지금부터 한 달쯤 후? 그러니 저희도 지금 결정을 해야 해요. 누가 영선곡으로 가 원로들을 도울지.”

결정은 언제나 그렇듯 강한월의 몫.

다들 강한월의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불릴지 주목하고 있는데, 유선이 먼저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가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