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척혈단의 기지개 (2)
* * *
영선곡.
깎아지른 높은 봉우리나 기암괴석이 즐비한 곳은 아니지만, 선기(仙氣)가 충만하고 풍광이 원만하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
이곳에 척혈단 원로들이 머무는 장원이 있었다.
원래는 하오문의 민 문주가 은퇴 후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것인데, 민정화가 건물을 증축하고 시설을 갖춰 척혈단에 기부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는 말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장원이 곧 파괴될 거라니.”
아미파 수월사태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수월사태는 이미 정이 많이 든 것 같았다.
“하하하, 사태처럼 득도한 고승도 이런 물질에 욕심을 내시는 겁니까?”
천산 백응신장이 놀리듯 물었다.
수월사태가 득도한 것은 맞는 모양. 놀림을 받았는데도 천진난만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욕심은 무슨… 내 것도 아닌데. 이 장원이 만약 내 소유였으면 댁 같은 영감에게 방을 내주지도 않았지.”
“쩝, 그런가요? 어쨌든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적들이 쳐들어온다고 꼭 장원이 불타는 것도 아니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다 때려잡으면 될 것 아닙니까?”
“내 말이. 하지만 저 군사라는 양반이 엉뚱한 계획을 세웠으니 걱정이 되는 거지.”
수월사태가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했고, 지목을 받은 제갈현선은 민망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번째 타박을 하는 건지… 이곳에 모인 원로들은 그가 세운 작전이 영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이보게, 제갈 군사. 자네 정말로 작전을 변경할 생각이 없는 건가?”
수월사태가 눈치를 준 것인지 이번엔 곤륜일검이 딴지를 걸어왔다.
“어젯밤에도 다시 점검한 계획 아닙니까? 소요자 어른과 위 맹주도 동의하셨고….”
나이와 연륜에서 한참 밀리는 제갈현선은 소요자와 위무진 맹주의 이름을 팔 수밖에 없었다. 배분을 포함 여러 면에서 최고 어른은 소요자이고, 공식적으로 척혈단 원로 부대의 대표는 위무진이니까.
“하지만 군사는 바로 자네 아닌가? 자네 스스로 계획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수정한다면 소요자 선배께서도 동의하실 거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적들을 진법 안으로 유인하는 매복작전 이런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한 건데? 오는 족족 그냥 입구에서 다 때려잡으면 될 것을.”
“그거야 당연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지요. 적의 규모도 짐작하기 어려우니 안전하고 보수적인 작전을….”
“허허, 젊은 친구가 이리 겁이 많아서야. 게다가 척혈단 본부에서도 지원군을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곤륜일검 때문에 식은땀이 흐를 때,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무언가가 제갈현선의 눈에 띄었다.
“아! 저기 보십시오. 마침 말씀하신 지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제갈현선이 손을 번쩍 들어 장원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일단의 남녀를 가리켰다.
“에게? 고작 여섯 명이야?”
곤륜일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잖이 실망스러운 건 제갈현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응신장은 생각이 달랐다. 위험한 싸움일 줄 알면서 도와주러 왔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군인들의 전쟁도 아닌데 머릿수가 뭐 중요해? 저기 보시게. 소요자 선배도 저렇게 좋아하시지 않나.”
과연 평소 점잖던 소요자가 웬일로 달려 나가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소요자 할아버지! 저 왔어요.”
“가린아. 이 위험한 곳엔 뭐 하러 왔어?”
“할아버지 뵈러 왔지요. 아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안전하게 지켜드릴게요!”
“하하하, 그래. 가린이 너만 믿는다.”
지원군이 고작 여섯 명이라는 것에 기분 상해하던 원로들도 소요자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억지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수월사태의 표정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잠깐. 자네들 정말 척혈단에서 파견된 것 맞는가?”
수월사태의 강렬한 눈빛이 한 명 한 명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원로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것은 총 다섯 명.
제일 먼저 자원했던 유선, 그리고 진가린도 소요자를 뵙고 싶다는 이유로 자원했다. 그러니 주교 일호와 이호도 한 묶음으로 오게 되었고.
강한월이 추가로 위청보를 지목해서 도합 다섯 명의 지원조가 꾸려진 것이다.
그러니 수월사태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수밖에.
척 보기에도 한 명은 마교도이고, 또 다른 두 명은 뭔가 사이한 비술의 기운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으니까.
다섯 중 셋. 과반이 넘는 수가 마(魔)와 사(邪)인데… 이것이 정녕 척혈단의 지원조라고?
“사태님. 이들은 척혈단이 맞습니다. 저희가 천마신교와 공조하는 것은 사태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갈현선이 수월사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미파가 천마신교에 대해 얼마나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으니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흥, 천마가 직접 온다면 몰라도 저 어린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휴우, 저 할망구가 진짜…!
예전 성격 같으면 주먹부터 나갔겠지만 지금의 유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한 마디 톡 쏘는 것까지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맞습니다. 저는 혈교와 싸우러 온 것이지 사태를 도우려 온 것은 아니지요.”
“뭐라? 이것이! 어린 마귀라고 내가 봐줄 것 같으냐!”
수월사태의 몸에서 거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와 태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승포가 펄럭였다.
건방진 어린것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강렬한 기도가 유선의 몸을 내리눌렀는데….
“흥.”
유선은 짧게 콧방귀를 끼며 옷자락을 한 번 털자, 태산같이 무겁게 짓누르던 기파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당사자인 수월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지켜보던 다른 원로들도 적잖이 놀랐다.
사태의 하는 양이 맘에 들진 않았지만 이참에 마교 후기지수의 실력이나 확인하려고 말리지 않고 지켜본 것인데, 이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실력.
“이… 이것이… 한 자락 제대로 배우긴 한 것 같다만 어림없다!”
수월사태가 호통을 치는 순간 아미복마신공의 경력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후배의 실력을 가늠하려는 것 치고는 너무 지나친 수법.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몇몇 원로가 나서려고 할 때, 부드러운 봄바람이 팔랑 불어왔다.
그 순간 수월사태의 아미복마신공도, 맞받아 칠 준비를 하고 있던 유선의 마공도 씻은 듯이 흩어졌다.
“사태, 손님들을 모시고 들어갑시다. 위 맹주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극유의 공력을 내어 상황을 정리한 소요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소요자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수월사태는 못 이기는 척 몸을 돌리면서도 유선에게 눈을 흘겼고, 유선은 쓴 웃음을 삼켰다.
* * *
먼 길을 달려왔지만 유선 일행은 쉴 틈이 없었다.
위무진 맹주, 제갈현선 군사와 함께 간단히 작전 회의를 한 후 위청보를 도와 진법 강화 작업을 시작했다.
장원에 이미 펼쳐져 있던 방어진에 모산파의 부적을 추가하는 작업.
조용히 뒤를 따르며 작업을 지켜보던 혼천도와 곤륜일검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한 장 한 장이 천금의 값어치를 가진 모산파의 진산 부적 아닌가? 무림의 보물을 이런 일에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헤헤, 원로님들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아끼지 말고 부적을 쓰라는 단장의 명령이 있었어요.”
위청보가 웃으면서 답했다.
부적이 아까워 속이 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우리 생각을 해주는 건 고맙지만, 한편으론 서운하기도 하군. 설마 우리 실력을 못 믿는 건가?”
“그럴 리가요. 다만 이번이 척혈단과 혈교의 공식적인 첫 대결이 될 거라서 그쪽도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으로 예상되어서요. 하오문의 정보원들에 따르면 흑사련 귀곡(鬼谷)에서 일단의 고수들이 출발한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하고, 황궁 비밀감옥의 귀장들도….”
“흥, 그렇다고 한들 이곳엔 소요자 선배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깟 사파의 노물이나 비술 괴인 따위 걱정할 필요가 없어.”
“헤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단장의 명령이니 좋던 싫던 부적 설치를 하는 거죠.”
위청보는 원로들을 적당히 달래고 부적 설치를 계속했다.
그리고… 부적을 쓰길 잘했다는 걸 원로들이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 혈교의 무리가 쳐들어온 것이다.
* * *
척혈단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영선곡의 능선.
이번 공격부대의 총대장인 곽 공공이 각각 흑사련과 무림맹을 대표하는 귀곡 곡주, 사천당문 문주와 함께 작전을 협의하고 있었다.
“이거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들고 온 것은 아닌지? 적들의 수가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채 오십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장끼인 귀령신안술을 펼쳐 장원 주변을 살펴본 귀곡 곡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흑사련이 설립된 이후 수백 년 동안 최고의 명성을 떨쳐온 귀곡이 출동할 만한 일이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곡의 단독 작전도 아닌 연합 작전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후후, 곡주는 머릿수가 중요하다고 보는가? 저기 누가 있는 줄 알고?”
곽 공공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아 물었다.
귀곡 곡주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고관이라는 것만 빼면 별것도 아닌 것이 상관 행세를 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흥, 사내 구실도 못하는 환관 놈이….
“정파의 원로들이 있다는 거야 저도 알지요. 하지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연 흑사련의 귀곡은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렇다면 당문주의 생각은 어떻소? 같은 정파였으니 원로들의 실력에 대해 잘 아실 것 아니요?”
고의인지 무의식적인 건지는 몰라도 곽 공공은 연달아 곡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곡주에겐 하대를 하면서 사천 당문 문주에게는 반공대를 하고 있으니.
“원로 중 도대체 누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절대 만만히 볼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전대 십대 고수 중 몇몇은 있지 않겠습니까? 정파의 원로들은 대부분 정종 내공을 익히고 있어 나이를 먹을수록 내력이 더 깊어지니까요.”
“그렇지.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니까. 그리고 동창의 분석에 의하면 무당의 소요자, 아미의 수월사태, 천산 백응신장이 저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소요자라… 혹시나 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요.”
곽 공공과 당문주가 죽이 잘 맞는 것 같자 귀곡 곡주는 더 심통이 났다.
“흥, 소요자를 우리라고 예상 못 했을 것 같습니까? 귀곡에는 초고수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특수 부대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흑사련의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래도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지. 소요자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만약 신주의협이 저곳에 있다면?”
“그… 그건….”
결기를 보이던 곡주였지만 이번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간 흑사련이 감히 정사대전을 일으키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신주의협이니까.
“역시 부담되나 보군. 그럼 당문주는 어떠시오? 같은 정파였으니 신주의협에 대해 잘 아실 것 아니오?”
“휴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공격조에서 빠지기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맹주님의 명령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참가는 했지만 말이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신주의협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여기 있다면… 머릿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맹주께서 당문주를 보내신 이유도 신주의협 때문일 테지요. 당문의 그 보물을 써서 상대하라는 것 아니요?”
당문주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문이 극비리에 보관하고 있는 보물.
무림 십대 금지 무기 중 당당히 일위에 올라 있고,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날 경우 무림 공적으로 몰려 멸문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
황실과 무림맹이 뒤를 봐준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절대로 가져오지 않았을 그것은….
바로 무형지독(無形之毒)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