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척혈단의 기지개 (3)
* * *
혈교 공격조의 면모는 이러했다.
먼저 흑사련에서는 귀곡이 참여했는데, 사파 오대 고수에 이름을 올린 귀곡의 곡주 사망혈편 류곡성의 지휘하에 오랜 기간 정파 무림인에게 악몽 같은 존재였던 지옥십귀, 그리고 임무를 위해서라면 처자식의 목이라도 벤다고 알려진 일백 명 귀면검수가 준비를 갖췄다.
무림맹을 대표해서 나온 사천당가에서는 가주 당설위가 장로 두 명과 함께 오십 명 암독대 전원을 데리고 왔으며, 아직 누구에게도 선보인 적 없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를 대동했는데 바로 무형지독을 몸에 품고 있는 독인(毒人)이었다.
반면, 황실의 대표이자 이번 공격조의 총지휘관인 곽 공공은 동창 무사 한 개 조 외에 황실 뇌옥에서 고작 열 명의 귀장을 데려왔을 뿐이었다. 인원은 적었으나 한 명 한 명이 극강의 고수들. 하지만 정작 비장의 한 수는 따로 있었으니 가마에 싣고 온 관 두 개였다.
관 속에 든 것은 한 쌍의 음양혈인인데, 소림에서 활약했던 것보다 더 강력하게 제조된 것이었고 뱀의 혈령 파편까지 주입된 상태였다.
혈령이 주입된 음양혈인은 매우 귀중한 자원. 뱀이 이것을 흔쾌히 내줬다는 건 신주의협에 대한 경계심이 그만큼 크다는 뜻.
어쨌든 무형지독에 더불어 음양혈인까지 있으니 곽 공공의 마음이 든든했다.
“해독단은 모두 복용했는가?”
도열한 무사들을 향해 곽 공공이 물었다.
“전원 복용을 마쳤습니다.”
“좋아. 약효의 지속 시간은 고작 두 시진이니 서둘러야 한다. 섬멸 작전을 개시하도록!”
“존명!”
암흑이 내려앉은 늦은 밤,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백 명에 육박하는 각양각색의 고수들이 일제히 목표 지점을 향해 쇄도했다.
순찰을 도는 경비 무사도 없었기에 순식간에 장원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콰아아앙!
당문의 장로가 망설임 없이 장력을 갈겨 문을 부쉈고, 암독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녹색 두건을 쓰고 사슴 가죽 장갑을 낀 암독대가 선두로 나선 이유는 뻔했다.
독을 살포하려는 것.
과연 오십 명의 암독대가 지나간 자리 주변으로 뿌연 독무가 피어올랐다.
독기는 강했다.
피부가 저릿하고 머리카락이 오그라들자 흑사련의 귀면검수들이 주춤거렸다.
“해독단을 먹었으니 문제 될 것 없다. 어서 당문의 뒤를 쫓아!”
곡주의 호통에 귀면검수들이 다시 달렸고, 뒤이어 지옥십귀와 귀장들까지 안으로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곽 공공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후후, 그럼 사냥을 시작해볼까?”
* * *
척혈단 전투 지휘실로 사용 중인 전각 꼭대기 방.
“적들이 들어왔네. 예상대로 독을 뿌리기 시작했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피던 제갈현선이 외쳤다.
“진법은 제대로 작동하겠죠? 제 부적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위청보가 말했다.
아까운 부적을 왕창 쏟아부었는데 효과를 못 볼까 봐 걱정되는 것 같았다.
“진법은 걱정하지 말게. 몇 번이나 꼼꼼하게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안심이에요. 최소한 독기의 절반은 묶어 둘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문제야. 당문이 직접 나섰으니 보통 독이 아닐 테지. 절반으로 줄이더라도 원로님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남해의선님을 믿어 봐야죠. 어쨌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저도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위청보. 조심해라.”
“헤헤, 너무 걱정 마세요. 단단히 준비했어요.”
무복 겉자락을 슬쩍 열어 보이며 위청보가 말했다.
옷 안쪽이 각종 부적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 * *
챙, 챙, 휘이익, 콰앙~
장원 앞마당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제갈현선의 진법과 위청보의 부적의 영향으로 불가사의한 돌개바람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암독대가 뿌리는 녹색 독무가 소용돌이쳤다.
바람은 독기를 뒤쪽으로 몰아갔으니 해독단을 먹었다고 한들 흑사련과 황실의 무사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척혈단은 그 틈을 노려 암독대를 상대했다.
남해의선이 나눠준 피독환을 입에 문 몇몇이 바람처럼 움직이며 검을 뿌렸다.
휘이익.
소리 없이 나타나 검을 휘두른 진가린이 다음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콧구멍에 방독초를 잔뜩 꽂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당하는 암독대 입장에선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경지에 오른 무영보가 이런 난장판 싸움에서는 무서운 무기가 되었고,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암독대 한 명씩이 바닥을 굴렀다.
게다가 그녀를 바짝 뒤따르는 주교 일호와 이호가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데, 수백 가지 독한 약물로 재탄생한 육체이기에 독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샤샤샤샥.
이대로는 안 된다고 느꼈는지 암독대가 독 살포를 멈추고 암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였다.
당문의 암기가 대단하다고 한들 일개 대원들이 발출하는 것이 척혈단의 원로들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으니까.
“크아악.”
원로들은 뿌려지는 독이 줄어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전대의 고수들이 전력으로 뿌리는 장력과 검강은 한 번에 두세 명의 암독대 대원들을 쓰러트렸다.
숨 몇 번 쉴 짧은 시간에 암독대 삼 분의 이가 시체로 변했다.
“암독대는 뒤로 물러서라!”
다급한 명령을 내리며 당문주와 장로 두 명이 앞으로 나섰고, 그 순간 만천화우가 펼쳐졌다.
밤하늘을 온통 뒤덮는 셀 수도 없는 암기들.
원로 고수들이라도 논란의 여지 없는 강호 최정상의 암기술 만천화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잠시 소강상태가 펼쳐졌고, 당 문주가 뒤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정녕 구경만 할 것이오?”
그 외침이 신호가 된 듯, 지옥십귀와 백 명의 귀면검수가 일제히 몸을 날렸다.
지옥십귀는 초절정, 귀면검수는 절정 수준이었지만 그들은 싸움, 특히 합격술의 귀신들이었다.
암독대가 고전하는 사이 이미 작전을 짠 듯, 망설임 없이 다섯에서 열 명씩 무리를 지어 각각 목표한 원로들을 공격했다.
“이 파리떼 같은 놈들이!”
지옥십귀 둘과 다섯의 귀면검수에게 둘러싸인 곤륜일검이 귀찮다는 듯 검을 휘둘렀지만, 웬걸… 빠른 시간에 승부가 나질 않았다.
뒤로 물러섰던 암독대가 독탄을 던졌고, 승기를 잡을 만하면 당문주와 장로들이 어김없이 암기를 던져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위기에 봉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판을 뒤흔들 필요는 있었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척혈단의 나머지 고수들, 즉 더 상위의 고수들이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천산 백응신장을 필두로 수월사태, 혼천도, 남해의선이 각각 당문주와 장로들, 그리고 귀곡주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콰콰콰쾅!
차원이 다른 고수들의 등장은 곧바로 효과를 나타냈다.
백응신장의 천응공 앞에서 당문주는 제 살길 찾기에 바빴고, 당문의 문주들은 첫수에 이미 부상을 입었다. 약재를 다룰 때 쓰는 저울을 무기 삼은 남해의선 앞에서 귀곡주도 한 발 한 발 밀리고 있었고.
“과연 늙은것들이 대단하군.”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뱉으며 곽 공공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돌풍이 일며 열 명의 귀장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펑, 퍼엉!
뱀 혈승이 황실의 힘을 쏟아부어 만든 귀장들은 과연 강했다.
두세 명씩 짝을 이뤄 강렬한 공격을 퍼붓자 백응신장 등 초고수들도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양측의 전력이 대부분 전투에 참여한 상황.
당장의 상태로 볼 때는 척혈단이 불리했다.
“맹주. 우리도 나서야 하지 않겠소?”
장원 중문의 지붕위에 서서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소요자가 위무진 맹주에게 물었다.
그와 맹주, 그리고 유선과 위청보가 아직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좀 더 지켜보시죠, 선배님. 보아하니 저쪽도 진짜 무서운 패는 아직 꺼내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맹주가 먼 곳에 서 있는 곽 공공을 바라보면 말했다.
소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소요자는 맹주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게다가 사천당문의 문주가 이곳에 왔으니, 어쩌면 소문의 그것도 함께.
“맹주의 생각에 동의하오.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소요자의 말이 맞았다.
말 몇 마디 주고받는 그 짧은 시간에 원로 몇몇이 부상을 입고 비틀거렸다.
최소한 균형은 맞춰줘야 하는 상황.
“제가 가겠습니다.”
맹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유선이 달려 나갔다.
이백 명 이상이 뒤엉켜 있는 난장판 속을 한 마리 잉어처럼 부드럽게 스쳐 간 후 한 지점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모두가 흠칫 놀라 쳐다볼 정도로 거대한 폭음.
경력이 폭발한 자리에서 뻗어간 검은 마기가 귀장 두 명과 지옥십귀 셋을 덮쳤다.
“네 도움은 필요 없다!”
수월사태가 인상을 구기며 화를 냈다.
강적들이 유독 자신에게 많이 몰린 탓에 수세에 몰렸고, 몹시 위태로운 순간 유선이 나타나 도와준 것.
덕분에 큰 부상을 면했지만 대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흥, 돕긴 누가 돕는다고요? 뭐가 예쁘다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유선은 수월사태를 괴롭히던 귀장들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이어갔다.
발을 내디디면 천마군림보가 펼쳐졌고, 한번 손을 휘두르는 사이 천마폭열장, 마신화염지, 아수라마참권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뒷걸음치는 귀장들.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려던 수월사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수월사태는 절대경의 꼭대기에 오른 고수 중의 고수.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유선이 타고난 싸움꾼이며 천재 중의 천재라는 것을.
“어딜 한눈을 팔아요!”
유선이 휙 몸을 돌리더니 지풍을 날렸고, 수월사태의 귓불을 스칠 듯 날아가 지옥십귀의 검을 튕겨냈다.
유선의 눈부신 실력에 놀라 넋이 나갔던 수월사태를 다시 한번 구해준 것.
“아… 미안. 이제 여기는 나에게 맡겨라.”
웬일로 수월사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단순히 유선의 솜씨에 놀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진심과 투지에 감명받았기 때문인데, 내공의 상당 부분을 중독을 막는 데 쓰고 있던 자신과 달리 유선은 독의 침투를 감수하면서 전력으로 싸운다는 것을 알아봤던 것이다.
마교의 젊은이까지 목숨을 거는데… 내가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수월사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돌변했다.
중독의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에 전념하자 그제야 진정한 아미파 최고수의 위력이 드러났고, 주변에 있던 적들은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수월사태로 끝난 게 아니다.
목숨을 건 싸움이 어떤 건지 보여준 유선의 당찬 모습이 수월사태를 거쳐 다른 원로들에게도 번져간 것.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였고, 잠들어 있던 전사의 본능이 그제야 깨어났다.
콰콰콰쾅!
정파 최고 배분의 전대 기인들이 일제히 최대치 공력을 개방하자 전황은 급변했다.
혈교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던 상황이 순식간에 기울더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귀장이나 지옥십귀 등 고수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실력이 처지는 귀면검수 등은 속속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것은 의외의 결과를 만들었는데, 곳곳에 끼어들어 독을 살포하던 암독대 대원 십여 명이 눈 깜짝할 시간에 모조리 정리된 것.
중독을 각오하고 전력을 펼쳤더니 오히려 중독 걱정이 사라진 것이고, 이것이 유선이 급하게 뛰어들어 행동을 펼친 의도였다.
“후후, 역시 정파의 늙은 생강들은 맵구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곽 공공은 아직 태연한 표정.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만 볼 생각은 아니었다.
삐이익~
곽 공공은 품에서 호각을 꺼내어 힘차게 불었다.
“귀장들은 혈신력을 개방하라!”
호각이 신호인지 아니면 곽 공공의 명령에 주술이 걸려있던 것인지, 혈장들의 두 눈이 붉게 물들며 몸에서 콩 볶는 듯한 우드득 소리가 울렸다.
귀장들의 선천지기에 뱀의 비술이 덧입혀지는 소리였고, 이제 본인들의 생명을 연료 삼는 대신 평소 두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된 것.
척혈단 쪽으로 기울던 승부는 다시 혈교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