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척혈단의 기지개 (4)
* * *
선천지기를 불태우는 귀장들의 기세는 맹렬했다.
애당초 싸움과 살인에는 도가 튼 악질 범죄자, 무림 공적들.
황실 뇌옥에 잡혀 올 때 초절정의 고수였던 그들을 각종 영약과 비술로 절대급 고수로 개조한데다, 지금은 선천지기를 불태워 모든 잠력을 죄다 끌어올리니 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백응신장, 수월사태 같은 초고수들에게는 귀장 두셋에 지옥십귀 몇까지 붙어서 겨우 상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강한 귀장 한 명씩만 남아 평수를 이루며 싸우고 있었다.
그럼 남은 귀장과 지옥십귀는 어디로 갔겠는가?
척혈단 원로들 중 상대적으로 약한 쪽으로 몰려가 맹공을 퍼부었던 것이니, 벌써 몇몇 원로들이 허연 수염을 붉게 적시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버티시오! 버티면 우리가 이깁니다!”
귀장들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파악한 남해신의가 외쳤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그걸 몰라서 못 버티는 게 아니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위무진 맹주의 판단으로는 잘 버텨야 이 각이 한계였다.
그 전에 귀장들의 선천지기가 소진된다면 척혈단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패배.
판을 뒤흔들 필요성을 느낀 맹주가 소요자에게 말했다.
“선배님. 더 이상은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가 먼저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맹주의 판단을 믿소. 어서 갑시다.”
맹주와 소요자, 그리고 거기 왜 끼어 있는지 모를 위청보가 곽 공공을 향해 빛살처럼 쇄도했다.
* * *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높다란 나무 위.
은신술을 펼치고 있기에 눈에 띄진 않았지만 실은 사람이, 그것도 두 명이나 그곳에 있었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온 목적은 따로 있어.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주변에 듣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들은 전음을 써서 대화하고 있었다.
매우 조심하고 있다는 증거.
―목적을 잊은 건 아니지만 원로들이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 단장까지 움직이기 뭐하면 나라도 내려가서….
―아직은 괜찮아. 정파의 전대 고수들이 쉽게 무너질 리 없어. 어느 정도 피해를 입더라도 원래 우리 목적에 집중해야만 해.
원로들을 돕고 싶어 몸이 단 것은 광군영, 냉정하게 만류하는 것은 강한월이었다.
이런 중요한 전투에 강한월이 왜 빠졌나 했더니, 실은 근처에 은신하고 별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긴 한데… 과연 오긴 오는 걸까?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건 아닐지?
―반드시 올 거야. 이미 와 있을 수도 있고. 첫번째 전투가 우리에게 중요하듯이 그들에게도 중요할 테니까.
강한월과 광군영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맹주와 소요자가 곽 공공을 공격하며 전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 * *
정파 최고 배분의 원로와 신주의협의 자리를 계승한 무림맹주가 전력을 다한 경공은 그야말로 빛살처럼 빨랐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위청보가 얼추 그 속도에 맞춰 함께 쇄도했다는 것인데… 어쨌든 눈 깜짝할 사이에 전장을 건너뛴 삼 인이 곽 공공의 눈앞에 나타났다.
쐐애액~
곽 공공을 직접 공격한 것은 위무진 맹주.
간을 볼 생각 따윈 없었는지 첫 수부터 예사롭지 않은 화산의 검공이 펼쳐졌다.
“흥, 화산검 따위…!”
곽 공공이 물러서지 않고 수공을 펼쳤다.
여인의 것처럼 고운 손이 푸른 빛으로 빛났는데, 황실 무공 중 거세한 환관들만 익힐 수 있는 청옥수(靑玉手)였다.
채앵~
쇠붙이와 사람의 손이 부딪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울렸다.
예리한 검강을 두른 검을 맨손으로 막아낸 것이고, 뜻밖의 실력에 맹주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실 최고수라 알려졌으니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
실은 최근 뱀의 오른팔로 확실히 자리를 잡으면서 피의 세례를 받고 공력이 급증한 영향이었다.
하지만 맹주의 공격을 당당히 막아냈음에도 곽 공공의 표정이 좋지를 못했는데, 소요자와 위청보의 행동 때문이었다.
힘을 합쳐 자신을 공격할 줄 알았던 그들이, 옆을 휙 지나가더니 다짜고짜 뒤에 고이 모셔 두었던 관 두 개를 공격했기 때문.
지키고 있던 동창 무사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작정하고 달려온 소요자를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
쾅,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관 뚜껑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안 돼!”
곽 공공은 다급히 품속을 뒤져 호각을 꺼냈다.
위 맹주의 날카로운 검이 재차 날아들고 있었지만, 그걸 막는 것보다 이게 더 급했다.
가까스로 몸을 틀었지만 검은 어깨 살을 한 움큼이나 베였고, 그 순간 곽 공공을 힘차게 호각을 불었다.
삐이익~
잠들어 있는 음양혈인을 각성시키는 호각이었다.
신주의협을 상대하는 것 외에는 사용을 금지한다고 했지만 이번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이미 가루가 된 관 속에서 두 남녀가 강시처럼 벌떡 일어서더니 연기처럼 뒤로 물러서며 소요자와 위청보의 공격을 피했다.
“치이… 한발 늦었어요. 이미 각성을 했네요.”
위청보가 아쉬운 입맛을 다지며 말했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그로서는 가급적 살 떨리는 대결 없이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것.
게다가 온몸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전투용 부적도 시간제한이 있는 것이니….
“어서 빨리 승부를 보세.”
소요자가 양 혈인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항상 여유로운 도가의 기인치고는 꽤나 서두르는 모습이었는데, 마음이 급한 이유가 있었다.
적들에겐 아직 숨겨진 패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곧바로 밝혀졌다.
“당 문주. 무얼 망설이는 게요? 당장 시작하시오!”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위 맹주의 공세를 어렵게 버티던 곽 공공이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는데, 감히 입에 담기도 꺼려지는 그것은 바로 무형지독.
“커억.”
당문주와 장로 둘을 동시에 밀어붙이던 혼천도가 갑자기 몸이 굳으며 쓰러졌다.
왜? 어째서?
영문을 모르는 원로들이 모두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는데….
“무형지독이에요! 저자가 당문의 숨겨진 독인이었어요!”
유선이 손가락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하며 외쳤다.
“무형지독? 당문주 지금 제정신이요? 정녕 무림공적이 되어 멸문을 당하고 싶은 거요?”
수월사태가 분노하여 외쳤지만 의미 없는 소리였다.
황실과 무림맹의 편에 선 당문이 무림공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리 없으니까.
“이자는 저에게 맡기고 다들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세요!”
유선이 겁도 없이 당문의 독인을 향해 쇄도했다.
만용이 지나쳐도 정도가 있지… 원로들 눈에는 자살행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만독불침이 아닌 이상 무형지독을 상대할 방법 따위는 애당초 없으니까.
“너 미쳤냐? 어서 뒤로 빠지지 못해?”
수월사태가 다급히 만류했지만 유선은 멈추지 않았고, 그 순간 독인이 손을 뻗었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무형지독을 발출하는 것이었다.
유선이 바닥에 쓰러질 것을 예상하며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켰는데….
그 순간 유선의 소매 춤에서 검은빛이 번득이더니 짙은 마기가 뻗어 나와 몸을 감쌌다.
“이… 이럴 수가?”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온 건 독인의 입.
얼마나 놀랐는지 이어지는 유선의 공격을 막을 생각도 못 했고, 옆에 있던 당문주가 다급히 막아주지 않았으면 단 한 수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다들 뭐 하세요? 각자 싸움에 집중하시라고요!”
원로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떤 방법을 쓴 것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선이 무형지독을 막을 수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감탄, 부끄러움, 미안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와 원로들은 더 매섭게 적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저 멀리 나무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두 사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광군영에게 강한월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부러운가?
―아, 아니. 부럽기는 무슨. 그냥 좀 뜻밖이라.
유선이 무형지독을 막은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본 사람이 셋 있었다.
강한월과 광군영, 그리고 진가린.
유선의 소매 안에서 번득인 그것은 분명 마신환이었으니까.
―단장은 알고 있었어?
―유선이 마신환을 차고 있는 거? 짐작은 했지. 유선의 기의 흐름이 특이했는데, 마신환이 흐름을 증폭시켜주는 거라고 짐작이 되었거든.
―마신환이 무형지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신한 것은 아니야. 아마도 천마께서 마신강림 상태에서 생성한 마기를 마신환에 담아 유선에게 주신 거겠지. 무형지독도 결국엔 독. 제아무리 독한 독도 신성이 담긴 마기를 오염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유선이 용감한 건 인정해야겠어. 본인도 확신하지 못했을 텐데 무형지독을 상대하겠다고 뛰어들다니.
―그래, 대단한 여자야. 어쨌든 이제 정말 막판이야. 누군가 나타난다면 지금일 테니 주의하자고.
대결은 점차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선의 용기에 감명받은 원로들이 서서히 귀장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선천지기를 불태우는 귀장들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노련한 원로들은 그사이 각자의 해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누구는 귀장에게 지지 않겠다고 선천지기를 불태웠고, 누구는 동귀어진의 수법을 감행하여 살을 주고 뼈를 취했다.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절실함은 똑같았고, 죽을힘을 다하는 노장들은 비술로 급조된 괴인들에게 져줄 마음이 없었다.
마신환을 통해 중독의 위험을 돌파한 유선은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무형지독이 통하지 않는 것에 좌절한 당문의 고수들은 미친개를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당문주는 이미 왼팔이 너덜너덜해졌고, 독인도 허벅지에 허연 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유선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마신환이 천고의 보물이라고 하지만 무한대로 마기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니까.
무형지독을 막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마기를 발출하고 있는데, 마기가 소진되는 순간이 자신이 죽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곽 공공 주변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수준 높은 공방이 펼쳐지고 있었다.
맹주의 화산검과 곽 공공의 청옥수가 맹렬히 맞붙었고, 소요자와 위청보도 음양혈인을 상대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싸움을 펼쳤다.
하지만 조금씩 상황이 변하고 있었는데, 무형지독을 염두에 두고 힘을 아끼던 소요자가 제대로 힘을 내기 시작한 것.
양 혈인이 내뿜은 살을 태울 듯한 열기를 극유의 기운으로 흩어버리며 차근차근 압박해갔다.
마지막은 위청보와 음혈인의 대결이었는데, 이것이 가장 화려했다.
음혈인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얼음 기둥이 쑥쑥 솟아오르며 송곳처럼 위청보를 위협했고, 위청보가 소환한 이매 다섯이 얼음을 박살 내며 음혈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섣불리 승패를 논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거의 막판에 도달했음은 분명했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이상 지칠 수밖에 없었고, 하나라도 무너지면 그 편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것이 분명한 상황.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는데, 점점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소요자가 양혈인은 처리한 후 다른 혈교의 무리를 하나하나 무너뜨리던가, 아니면 귀장들을 상대하고 있는 원로들이 기력이 다해 무너지기 시작하던가.
―드디어 나타났군.
극도로 집중하며 주변을 살피던 강한월이 나직이 말했다.
저 멀리 숲속에서 지금껏 없던 움직임이 감지된 것이다.
아직은 은밀하지만 매우 위협적인 기운이.
―설마 단 한 명? 아니… 잠깐… 이 기운은…?
―아는 사람인가?
―아마도. 유선이 흔들릴까 봐 걱정이군.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을 텐데.
은밀했던 기운이 점차 강하게 퍼져왔고, 광군영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직접 상대해본 적이 있는 자이니까.
신룡대회 사건 때 마주쳤던 인물.
현 무림맹주이자 십이혈승 중 무의 수좌.
바로 호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