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척혈단의 기지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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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혈승들이 이번 전투에 직접 나설 계획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고, 만약 직접 싸우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정말 최후의 전투에서나 생각해볼 일.
이미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치고받는 싸움이야 아랫것들을 시키면 그만이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움직일 수 있는 고수들이 널렸고, 심지어 백만 황군까지 동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생각이 좀 다른 혈승도 있는데, 그건 바로 호랑이였다.
뱀이나 용과는 다르게 그는 타고난 무공광이었고, 무림맹주라는 지고한 위치에 올랐지만 무공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뛰어난 고수의 실력을 직접 견식하고, 기회만 되면 손속을 겨뤄보고픈 욕망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척혈단과의 전투는 놓칠 수 없는 기회.
소요자, 백응신장, 수월사태 등 남궁세가 태상가주인 자신보다 한두 배분 더 높은 기인들과 겨뤄볼 기회를 언제 또 얻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곽 공공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른 호랑이는 처음부터 대결을 지켜봤다.
강한월과 광군영처럼 그도 철저히 은신을 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몰랐을 뿐.
초반엔 경극단의 기예라도 구경하듯 느긋이 감상을 했는데, 유선이 대결에 참여하는 순간 눈빛이 변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한참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신룡대회에서 마주쳤던 당돌한 여자아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호랑이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는 분명 혈교의 무공을 썼었고 동료 혈승 누군가의 제자일 거라 지레짐작하였었는데, 지금은 마교의 무공을 쓰고 있지 않은가?
동료 혈승, 그리고 마교… 그렇다면 천마로 활동하고 있는 자 혈승의 제자?
아니,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자 혈승의 제자가 척혈단과 편을 먹었을 리는 없으니까.
‘뭐, 좋아. 나중에 붙잡아서 확인해보면 될 일.’
구경하는 호랑이 입장에선 흡족하게도 대결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유선이 무형지독을 막아내는 장면에선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고, 드디어 소요자가 전면에 나서 음양혈인을 공격하자 한 동작이라도 놓칠세라 안력을 돋우었다.
바로 지금이군.
그가 직접 나서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요자의 무위자연한 기운이 점점 상승하는 것이, 이 상태로는 이삼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양혈인이 쓰러질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
양혈인이 쓰러지면 그다음은 음혈인. 그리고 곽 공공, 독인 순서로 차례로 무너질 것이 뻔했다.
물론 그 외에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는데, 소요자의 솜씨를 보니 꼭 직접 겨뤄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호랑이가 세상에 등장하기에 딱 맞는 무대였다.
우선 강호 무림 최고 배분이자 신주의협을 제외하면 정파 최고수로 알려진 소요자를 꺾고, 자신의 전임자이자 현재는 무림 공적으로 수배 중인 위무진 맹주를 제압한 후, 비밀이 무엇인지 파봐야 하는 저 젊은 여인을 생포한다.
머릿속으로 구상을 마친 호랑이가 드디어 은신을 풀고 기도를 개방했다.
파파파팟~
강대하고 거친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위치에 걸맞은 존재감을 드러낸 호랑이가 전장을 향해 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정면에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원으로 가시려던 겁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싸움터는 바로 이곳이니까요.”
천천히 다가오던 젊은 사내가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호랑이는 너무도 황당하여 실소를 터뜨렸다.
감히 자신이 누구인 줄 알고 저따위 건방진 소리를?
“누구냐… 너는?”
“저 같은 무명소졸의 이름은 모르실 것 같은데… 저는 강한월이라 합니다.”
“강… 한월? 너, 신주의협의 제자로구나!”
호랑이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번졌다.
꿩 대신 닭이라고, 오늘 신주의협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제자라도 잡을 수 있다면 뜻밖의 성과이니까.
한편, 강한월이 호랑이의 길을 막고 있는 사이 광군영은 원로들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강한월 혼자 호랑이를 상대하는 것이 영 불안했지만, 강한월의 입장이 하도 단호해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소요자 등을 도와 빨리 전투를 끝내는 것이 강한월을 돕는 길.
달리는 사이 극한으로 마공을 끌어올린 그는 장원의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한 지점을 향해 육합흑철마장을 발출했다.
같은 무공이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위력.
뿜어져 나온 검은 마기가 무쇠처럼 단단해지며 곽 공공의 등을 노리고 돌진했다.
“어떤 놈이냐?”
위기를 느낀 곽 공공이 황급히 몸을 돌리며 청옥수를 휘둘렀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지만 분명한 실수.
가뜩이나 위무진 맹주에게 반 수정도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섣불리 몸을 돌리다니.
“크헉.”
곽 공공의 입에서 짧은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육합흑철마장은 청옥수로 막아냈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위 맹주의 검이 곽 공공의 오른팔을 싹둑 잘랐다.
고수들의 대결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도 승부가 갈리는 법. 팔 하나를 잃었으니 곽 공공은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이어서 왼팔마저 땅에 떨어졌고, 광군영의 강력한 지풍에 혈도 여러 곳을 짚인 후 바닥에 쓰러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결과를 만들어낸 위 맹주와 광군영은 마치 사전에 상의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몸을 날렸는데, 이번 목표는 위청보와 싸우고 있는 음혈승.
위청보 입장에선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이매 다섯을 부리던 소환부(召喚符)는 힘을 잃고 있었고, 무복 안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방신부(防身符)와 속도를 높여주던 풍신부(風神符)도 지속 시간이 반각도 안 남은 상황.
신내림이라도 할 생각이었지만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받던 터라 강신부(降神符)를 쓸 틈도 못 찾고 있던 것이다.
쐐애액, 콰아앙!
위 맹주의 검강과 광군영의 흑철마기가 동시에 음혈인에게 떨어져 내렸다.
서늘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얼음벽이 생겨나며 공격을 막았지만, 한 지점으로 파고드는 절대급의 공세 두 개를 막기에는 역부족.
얼음은 가루가 되어 휘날렸고, 그 틈으로 부적 한 장이 날아들었다.
지옥 같은 불길이 타오르는 염화부(炎火符).
“크으으으윽.”
음혈인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산파의 화염계 부적 중 가장 강력하다는 염화부가 음혈인의 음기를 갉아먹었고, 마지막은 위 맹주가 뿌린 매화송이들이 장식했다.
퍼퍼퍼퍽.
얼음덩이가 깨지듯 음혈인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분명 기쁜 순간이었지만 승리를 자축할 여유도 없이 위 맹주, 광군영, 위청보는 몸을 돌렸다.
기세를 몰아 양혈인도 해치우려는 생각.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 순간 양혈인의 목이 분리되어 공중으로 떠올랐기 때문.
소요자 혼자서 결국 강적을 처리한 것이었다.
“어서 나머지 괴인들을 처치하시오.”
위 맹주와 광군영, 위청보에게 귀장들을 상대하라고 한 후, 소요자는 유선을 향해 달려갔다.
이런, 큰일 날 뻔했구나.
가까이 다가간 소요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독인, 당문주와 뒤엉켜 싸우고 있는 유선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
본인의 것인지 적들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창백한 얼굴에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아직 마신환의 마기가 마르지 않아 무형지독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마교의 아가씨에게 큰 은혜를 입었구나.
소요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약 유선이 독인을 붙들어 놓지 않았다면 원로들의 최소 절반은 무형지독에 당해 사망했을 테니까.
“가린아! 잠시 검을 빌려도 될까?”
소요자는 급히 몸을 돌려 한창 지옥십귀와 격전을 치르고 있던 진가린을 찾았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누구 부탁이라고 안 들어주겠는가?
펄쩍 뒤로 뛰어 지옥십귀와 거리를 벌린 진가린은 발끝으로 근처에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차올려 낚아챈 뒤, 쥐고 있던 백학은 소요자에게 던졌다.
“편하게 쓰세요.”
백학을 손에 쥔 소요자는 그대로 유선과 독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당문주.
수십 년 동안 존경해 마지않던 전설적인 대선배가 돌진해오니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이쪽에 줄을 선 것을.
“이년은 내가 상대할 테니 소요자를 막아라!”
소요자보다는 유선이 만만해 보였기에, 독인에게 소요자를 떠넘기고 유선을 향해 암기를 쏟아부었다.
당문주 입장에선 현명한 판단이었고, 최상의 선택.
아무리 초월경의 고수라도 무형지독을 상대할 방법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소요자는 무형지독이 두렵지 않은지, 거침없이 독인을 향해 쇄도했다.
일 장 거리로 가까워지자 걸음을 멈추고 검을 휘둘렀는데, 명성이 자자한 무당의 태극검이었다.
유선에게 암기를 쏟아부으며 슬쩍 고개를 돌린 당문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태극검이 강호의 일절임은 분명하지만, 맹독을 막는 효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으니까.
숫자 셋을 세기 전에 소요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리라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웬걸… 태극검이 그려내는 수백 개의 원에 반딧불이 점멸하는 것같이 별무리가 생기더니 무형지독을 모조로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어… 어떻게? 이건 말도 안 돼!”
당문주가 암기를 던지던 손을 멈추고 기함을 토했다.
“극에 달한 마기가 무형지독을 막을 수 있다면, 선기나 도기 또한 그러하다네. 내 수행으로는 부족해서 백학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말일세.”
소요자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검마저 친절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작은 원을 그리며 독의 침투를 막던 백학이 갑자기 큰 원 하나를 그려내자, 그 순간 독인의 목이 분리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무형지독이라는 특별함만 없다면, 독인인 당문의 장로는 소요자의 단 일 검도 받아낼 수준이 안 되었던 것.
당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인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당문주의 가슴으로 끈적끈적한 마기가 파고들었다.
천마신공의 저주라 불리는 마형인(魔刑印).
“숨이 멈출 때까지 시간 좀 걸릴 거예요. 금지된 독을 썼으니 이 정도 벌은 받아야죠?”
마형인을 펼치기 위해 기력을 쥐어짰는지, 유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당문주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치 지옥불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부림쳤는데, 이것이 바로 마형인의 저주받은 효능인 것이다.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악몽을 체험하며 서서히 심장이 굳어가는 형벌.
유선의 말마따나 무림공적에 어울리는 최후라 할 수 있었는데, 그 비명이 너무나 끔찍하여 지켜보던 소요자가 검을 휘둘러 목을 베어주었다.
“내가 간섭한 것 같아 미안하군.”
소요자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유선에게 사과했다.
“별말씀을요. 이런 전투에 감정이 개입할 필요는 없는데, 제가 미숙했습니다. 여긴 정리되었으니 어서 귀장들을….”
“아니,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소요자가 말 대로였다.
위 맹주, 광군영, 위청보가 뛰어든 후 전투는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어느새 손발이 척척 맞아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귀장 한 명씩이 쓰러지고 있었고, 도움을 받은 수월사태와 백응신장 등도 한 팔을 거드니 더 이상 변수가 생길 여지도 없어 보였다.
“이제 남은 싸움은 하나인가?”
소요자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강한월과 호랑이가 대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휴우,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네.
유선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호랑이가 나타난 것은 진작에 느꼈지만, 생사를 건 전투 중이라는 핑계로 억지로 생각을 지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까지고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
“저자는 혈승들 중에서도 상위 고수인 호랑이입니다. 함께 가 보시죠. 강한월 단장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유선이 앞장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