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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72화 (149/210)

172화. 호랑이 사냥

* * *

삼 장 거리를 두고 마주 선 강한월과 호랑이.

장원 안에서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든 말든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흥,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호랑이가 강한월을 얕잡아보는 것은 당연했다.

신주의협의 제자라니 제대로 배우긴 했을 거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분명 한가닥 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후기지수.

소위 천재 소리를 듣는 재목이 뛰어난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거기에 더해 몇 번의 기연을 얻는다면 이십 대에 절대경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호랑이 본인도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절대경이라고 다 같은 절대경은 아니다. 세월이 쌓이고 쌓여야 진정한 절대경으로 거듭나는 법. 그리고 그 축적된 땀과 노력의 성과로 초월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 걸어온 길이 그러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자 혈승처럼.

하지만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고수인 자 혈승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

그러니 강한월이 아무리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한들, 호랑이 눈에는 그저 하룻강아지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한월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세월의 연륜이 덧입혀지지 않은 경지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예전엔 불치의 병을 앓았고, 마공과 불공을 동시에 익히는 무리수를 뒀으며, 그마저 치명적인 부상을 치료하느라 모두 잃고 말았으니까.

그 후에 얻은 역근경 공력도 자신이 직접 쌓은 것이 아니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호랑이는 두번의 생을 살며 공력을 쌓고 수많은 실전을 치른 진정한 고수.

지금껏 상대해왔던 혈승들과는 다르게 혈교의 무력을 책임지는 무(武)의 수장.

이렇게 일 대 일로 맞서는 것은 미친 짓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한월은 홀로 호랑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당연히 광군영과 힘을 합쳐야 했고 상황을 보며 작전을 짰으면 소요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일부러 혼자 나선 것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꽉 막혀 있는 심검의 길을 열기 위해 뭔가 극단적인 상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주의협이 전해주고 간 심법을 연마하며 의식이 확장되고 강화되었지만, 그 크고 넓어진 마음이 심검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고, 벽을 깨부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죽기를 각오한 채로.

“새카만 후배에게 직접 손을 쓸 생각은 없지만, 너는 예외로 해야 하겠다. 강한월이라는 이름이 수차례 내 귀에까지 들려온 것을 보니 넌 무림의 공적임이 분명하니 말이야.”

“마치 무림 맹주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흥, 고얀 놈. 아직도 네 사부인 신주의협이 무림맹주라고 착각하는 것이냐? 강호에 큰 혼란이 벌어졌는데 코빼기도 안 비추는 자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 혼란을 야기한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림맹의 맹주인 내가 혼란을 야기했다는 말이냐?”

“맹주로서 일으킨 혼란이 아니라 혈교의 무공 계열 수장으로서 일으킨 것이죠.”

“뭐… 뭐라고?”

호랑이의 기도가 폭발하듯 용솟음쳤다.

당황했다는 증거였는데, 회귀한 혈승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어떠냐는 뱀이나 용과는 달리 호랑이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

정파의 명문인 남궁세가에서 오래 생활했고 무림맹의 맹주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자 체면이라는 게 생긴 탓이었다.

당혹감은 곧 강한월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저 녀석의 귀에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뚫린 입을 닥치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론 목숨을 재촉하기도 하는 법!”

파팟.

호랑이의 거대한 몸이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조금의 시간차도 없이 강한월의 얼굴에 거대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순수하고 정직한 주먹.

극한의 속도로 최단거리를 돌파했기에 현란한 초식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공격이었다.

이 한 번의 주먹질로 입을 뭉개 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강한월은 주먹이 날아드는 것과 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섰다.

자연체에 한 발을 딛은 강한월은 호랑이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것과 얼추 비슷한 빠르기를 낼 수 있었던 것.

호랑이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이어 입꼬리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신이 나는 것, 그것이 바로 무공광 호랑이의 본모습이니까.

“하하하, 좋다. 내가 너를 얕잡아 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군.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역시 신주의협의 제자라는 것이냐? 이제부터는 제대로 상대해주겠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소?”

“이… 건방진!”

분노가 치솟았지만 강한월의 말이 맞다는 걸 호랑이도 알았다.

긴 말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주먹으로 해결하면 될 일.

쐐애액~

조금 전 보여줬던 주먹은 몸풀기에 불과했다는 듯, 호랑이의 속도가 배가되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공기가 찢어지며 땅이 진동했다.

자연체를 이룬 데다가 순후한 역근경의 공력이 끊임없이 힘을 공급했지만, 그럼에도 강한월은 호랑이의 속도를 따라가기 벅찼다.

펑 펑 펑.

자연재해처럼 밀려드는 공격. 비록 정타는 피하고 있지만 강한월의 무복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갈라진 피부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숨 막히는 공격을 쉬지 않고 뿜어내면서도 호랑이는 여유가 있는 듯 입을 열었다.

과연 혈교 무의 수장은 달랐던 것이다.

예전에 상대했던 닭이나 토끼처럼 사이한 비술을 쓰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다. 게다가 강한월이 고전하게 된 이유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특이한 무공이기 때문.

주먹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주변 공간의 음양의 조화가 깨지는 것이었다.

자연체, 초월경… 뭐라고 부르던 그 경지에 오른 고수가 중요시하는 것은 조화. 그 조화를 통해 무한대의 힘을 창출하는 것인데, 호랑이의 무공은 강제로 그 조화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니 강하월의 움직임이 불편해지고 공력의 수발이 방해받는 것은 당연한 일.

불과 숨 몇 번 쉴 시간에 백 번이 넘는 공격이 펼쳐졌고, 적중당하지 않았음에도 강한월의 몸에 선혈이 낭자했다.

“강 소협. 내가 돕겠네.”

마침 장원 안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달려온 소요자와 유선이 강한월의 뒤에 섰다.

강한월이 별다른 큰 부상을 입은 건 없다는 걸 알았지만, 변변히 반격을 못 하는 것을 보니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

유선은 이미 공력이 바닥나기 직전이었지만 소요자는 아직 기력이 충만했고,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호랑이와도 제대로 승부를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흥, 명색이 정파의 최고 원로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군. 하지만 상관없다. 상대가 몇이던 모조리 꺾어줄 테니까!”

호랑이가 서늘한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이 묻어났는데, 정파 최고 배분의 소요자를 상대한다는 것이 싫지는 않은 듯했다.

“대선배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이건 제 싸움입니다.”

하지만 강한월은 기대치 않은 답을 내뱉었다.

“자네의 의지는 높이 평가하네. 하지만 마음만 가지고 승리를 거둘 수는 없어. 저 자의 경지는 나조차도 가늠하기 힘든 수준이니….”

마음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말이 강한월의 귓가를 맴돌았다.

정말 그런 것일까?

마음으로는 안 되는 걸까?

“제가 상대해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강한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강한월이 이렇게 나오니 소요자도 더 이상 다그칠 수 없었다.

“조심하게.”

강한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호랑이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냉소를 날리며 기다려준 호랑이 입장에선 조금은 김이 새는 상황이었다.

소요자와 강한월을 동시에 상대하며 제대로 몸을 써볼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상관은 없었다.

순서만 뒤로 밀렸을 뿐, 강한월을 꺾은 후에 소요자를 상대해주면 되니까. 그 이후엔 위무진, 백응신장, 수월사태….

오늘은 수십 년 묵은 체증을 확실히 풀어줄 날이 될 테니까.

“똑똑한 아이인 줄 알았더니 그 반대로구나. 객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다니. 방금 너는 생명을 부지할 일말의 가능성마저 날려버린 것이다.”

“여전히 말이 많으시군.”

“너는 여전히 건방지고!”

호랑이가 다시 공격을 가했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한 공격이었다.

지켜보던 소요자가 신음을 흘릴 정도였으니, 정면에서 당하는 강한월은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어째서 반격을 안 하는 것일까요?”

유선이 조용한 목소리로 소요자에게 물었다.

호랑이의 막강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강한월이 단 한 번의 반격도 못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강한월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사람인데….

“나도 모르겠네.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기 위해 힘을 아끼는 건 아닐지….”

“하지만 이렇게 피하기만 하는 데에도 막대한 공력이 소모될 텐데요?”

“물론 그렇지. 솔직히 나도 이해할 수 없네. 강 소협이 왜 이러는지….”

대화를 나누면서도 소요자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강한월은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즉시 뛰어들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강한월을 구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호랑이의 힘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인 모습도 호랑이의 전력은 아닌 듯했다.

갑자기 속도가 더 빨라지며 더 강력한 기파를 내뿜기 시작했으니까.

쿠쿠쿠쿠.

주변 공기에서 작은 천둥소리 같은 것이 울리며 시야가 왜곡되었다.

호랑이의 기운에 의해 음양의 조화가 급격히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강한월과는 충분히 놀아줬으니, 이제 끝을 내고 다음 상대와 겨루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강한월도 승부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숨겨둔 한 수가 있다면.

“하하하, 이제 끝이다!”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호랑이의 등 뒤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음양의 조화를 깨는 파괴적인 힘이 유형화되며 강한월의 몸을 옥죄어 왔다.

이젠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옴짝달싹하기 힘든 상황에서 호랑이가 주먹을 쳐드는 것이 보였다.

콰콰콰쾅!

공간을 파괴하며 날아드는 주먹이 점점 확대되었다.

소요자와 유선이 기암을 토하며 쇄도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베어라.

강한월이 반쯤 감았던 눈을 뜨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크아악.”

비명은 호랑이의 입에서 터졌다.

그리고 강한월은 기쁜 듯 혹은 아쉬운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심검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공이었다.

생각해둔 방법대로 마음과 감정을 고조시켜 죽음 직전에 심검을 발출했지만, 심장을 갈랐어야 할 심검은 호랑이의 주먹을 잘라내는 것에 그쳤다.

마지막 순간 낌새를 챈 호랑이가 회피동작을 했기 때문인데, 상대가 공격을 눈치챘으니 이미 심검이라 할 수 없는 것.

내지르던 주먹이 통째로 분해되며 팔 한 짝이 날아간 호랑이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 그 이유를 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주변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호랑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팔을 잃은 동시에 엄청난 내상을 입은 상황에서 소요자를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고, 장원 안에서 위무진 맹주와 백응신장 등도 달려오고 있었으니 이미 승산이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

결심을 한 호랑이가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강한월과 소요자가 뒤를 쫓으려 하는데, 유선이 뛰어들었다.

“한 번만… 이번 한 번만이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오로지 강한월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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