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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73화 (150/210)

173화. 전쟁의 서막 (1)

* * *

전투는 끝났다.

호랑이는 도망쳤고, 곽공공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모두는 죽거나 회복하기 힘든 부상을 입었다.

반면 척혈단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무형지독에 당한 혼천도를 포함해 다섯 명의 원로가 사망했고 나머지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완벽한 승리를 거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승패에 일희일비하기엔 다들 나이 지극한 원로들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혈교라는 적이 주는 중압감이 컸기 때문이고 또한 정파의 기둥 중 하나였던 사천당문을 직접 베어야 했던 것에서 오는 씁쓸함 때문이기도 했다.

민정화가 보낸 하오문의 요원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사이 원로들은 부상을 치료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물론 모두가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는데, 당연히 강한월에게도 휴식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유선.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호랑이를 보내준 것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나도 진이 다 빠진 상태라 더 이상 싸울 수는 없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여서 유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강한월 본인은 지쳤더라도 소요자나 위무진 맹주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으니까.

“뭐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아까 그 한 번이 마지막이니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마음의 부담은 다 턴 건가?”

유선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강한월이 물었다.

원래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려 했지만, 유선의 눈빛이 편안해 보여서 이 정도는 물어도 될 것 같았다.

“글쎄.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아까 강한월 너와 그자가 대결할 때 네 걱정이 더 되더군. 그거면 된 거겠지.”

강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라도 토닥여주고 싶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느낌이 왔으니까.

“이야기하는 김에 나도 감사를 표해야겠네. 오늘 유선 네가 활약해준 덕에 분위기가 좋아졌어. 원로들의 천마신교에 대한 반감이 많이 풀어진 것 같더군. 앞으로의 동맹에 크게 도움이 될 거야.”

“활약은 무슨. 그런 감사를 들어야 한다면 그건 광군영과 영영 언니의 몫이지. 원로들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조만간 다들 알게 되겠지. 정마를 떠나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뭐, 몰라줘도 상관없고. 정파에서 인정받는 게 우리 입장에선 명예로운 것도 아니니까.”

강한월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와의 동맹은 매우 한시적인 것. 혈교와의 전쟁이 끝나는 순간 동맹도 끝나는 것이니까.

동맹이 끝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과 마 사이의 대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컸다.

천마가 이성을 잃는다면 더더욱.

“천마의 상태는 어때?”

“뭐야? 설마 나한테 첩자 노릇을 하라는 거야?”

유선이 눈을 부라리며 되물었는데 물론 농담이었다.

강한월이 어떤 뜻으로 질문한 건지 잘 알았으니까.

“아직은 이성을 유지하고 계시지?”

“물론이지. 앞으로도 천마께서 이성을 잃을 일은 없을 거야. 마기가 뇌수에 침투해서 마성의 노예가 될 일은 없어. 오히려 그 문제는 깨끗이 치유되었다고 보는 게 맞지.”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마신강림을 대성했잖아. 신이 강림하는 상태가 반복되고 길어지면서 인간의 감정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 대신 신의 감정이 그 자리를 대체한달까?”

“신의 마음이라… 그건 좋은 것 아닌가?”

“모르지, 신이 좋은지 나쁜지. 신은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는지 신경도 안 쓸 테니까.”

무슨 말인가를 덧붙일 듯 유선의 입이 움찔거렸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유선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완전히 다른 차원에 올라, 생각과 마음과 감정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바로 자 혈승.

“전투가 끝난 지 반나절도 안 지나서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서두르는 게 좋아. 천마께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지 말라고.”

부담스러운 주문을 마지막으로 유선과의 만남은 끝났다.

그다음 순서는 소요자였다.

내공을 쏟아부어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온 것이라 매우 피곤해 보였다.

“어르신. 좀 쉬시지 않고요?”

“쉬기는. 나이가 들면 이렇게라도 움직여주는 게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는 법일세.”

소요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강한월의 상태가 어떤지 진맥을 해보겠다는 뜻이고, 당연히 내상 치료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력 소모가 크실 텐데 저까지 부담을 드릴 수는 없지요.”

“내가 보기엔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호랑이의 공격… 음양의 조화를 파괴하는 기괴한 공력이었어. 정통으로 당한 것은 없다지만 그래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거야.”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대결하는 동안에는 여파가 컸는지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더군요. 하지만 제 몸속의 역근경이 그런 종류의 공격을 막는 데 특별한 효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근경이 알아서 자가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회복이 되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라며 강한월이 손목을 내밀었다.

잠시 진맥을 해본 소요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군. 과연 소림의 역근경은 명불허전이야. 내상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하지만….”

소요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왜 그러는 것인지는 강한월도 알고 있었다.

“중단전이 많이 격동되어 있군. 상단전도 영향을 받은 것 같고. 이건 뭐 내상이라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조심해야 하는 상태야. 이유가… 혹시 마지막에 펼친 그 수법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심검… 이었지?”

소요자가 물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격동과 기대가 담겨있었다.

전설의 무공. 모든 고수들이 한 번쯤은 꿈꿔봤지만 도저히 닿을 수 없었던 경지.

과연 자신이 본 것이 그것이 맞는지 꼭 확인하고 싶었고, 실은 강한월을 찾아온 본 목적이 이것이었다.

“심검을 시도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죠.”

강한월이 씁쓸하게 답했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다짐했는데, 결국 제대로 된 심검을 발출하지 못한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경지의 무공에게는 절반이란 의미는 없었다.

실패는 실패일 뿐.

“어째서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이지? 내가 본 바로는 심검이 맞았는데?”

“무형의 기운이 발출된 것은 맞습니다. 덕분에 호랑이의 공격을 막고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정녕 심검이었다면… 베어진 것은 호랑이의 팔이 아니라 심장이었을 겁니다.”

강한월은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본인도 답답했던 차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사부 신주의협이 없는 상황에서는 소요자는 대화를 나눌 최적의 상대이니까.

“심검의 발출에는 내공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단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역근경의 공력은 심검과는 상관이 없는데….”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전혀 상관이 없는 건 아닐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심검을 발출을 시도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어준 것은 역근경 아니겠는가?”

“기본 바탕을 이뤄준 것은 역근경이 맞습니다. 덕분에 초월경과 자연체의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기(氣)가 아닌 의(意)로 행하는 기틀이 마련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 심검을 발현하는 것은 공력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무언가인데… 제 경우에는 감정이고, 이상하게도 심검의 발동되고 나면 기억의 일부가 사라지더군요.”

지극한 경지에 오른 소요자로서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이치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상의 무리(武理)와는 맞지 않는 황당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더 그럴듯하군. 어쨌든 심검 발동에 필요한 감정상태를 얻기 위해 호랑이에 홀로 맞섰던 것이겠군? 일부러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까지 만들면서.”

강한월이 상정한 조건은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은 아니었다.

실제로 노렸던 것은 간절함이 극대화되는 순간인 것인데,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도 그에 해당될 수는 있으니 굳이 소요자의 추측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어쨌든 실패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며 검이 생겨나는 순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제대로 된 심검이 아니라는 것을요.”

“당사자인 자네가 그리 생각했다면 그것이 맞겠지. 하지만 대단한 한 수였어. 비록 완벽한 심검은 아니라고 한들 내 눈엔 심검으로 보였으니까.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네.”

순수한 감탄과 위로가 섞인 소요자의 말이었다.

강한월에게는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아까의 그 공격이 소요자 어르신을 향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내가 상대해야 했다면?”

소요자가 눈을 감고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았다.

곁에서 지켜본 것일 뿐이라 십할 정확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 날카로움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으니 막아 내기는 힘들었겠지만… 피하는 것은 가능했을 듯싶네.”

“역시 그렇군요.”

침울해하는 강한월을 보니 소요자의 마음이 안 좋았다.

격려를 해주려고 온 것인데 반대의 결과가 되었으니 말이다.

“상심할 필요 없네. 비록 절반의 성공이라 한들 대단한 성과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어. 말 그대로 전설의 무공 아닌가? 당금 무림에 자네 외엔 그 누구도 시도조차 못 하는 것이고. 계속 정진하게. 언젠가는 분명 뜻하는 데로 심검을 펼칠 수 있게 될 거야.”

위로의 말을 남기고 소요자는 물러갔다.

강한월은 더 이상의 방문객은 받지 않고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천마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빠르게 확대될 것이었다.

언젠가는 심검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그 언제가 과연 전쟁이 끝나기 전에 찾아올까?

혹시 내가 굳이 심검을 완성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만약 사부 신주의협이나 천마가 자 혈승을 상대할 수 있다면….

* * *

덜컹.

급하게 방문이 열리고 뱀과 용이 들어왔다.

왼손으로 술병을 기울이고 있던 호랑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봤다.

“허허, 보고를 받았지만 믿을 수 없었는데… 사실이었군. 자네 그 팔이….”

“팔 한 짝 없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어.”

호랑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속이 쓰렸다.

최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는 한 팔만 쓰더라도 얼마든지 엄청난 무공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두 팔이 다 있을 때와 비교하면 크든 작든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

자신은 약해진 것이고, 뱀과 용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가 질 수 없는 싸움이었잖아? 사천당문의 무형지독에 음양혈인, 무엇보다 호랑이 자네까지 지원을 갔는데….”

“무형지독은 마신환과 백학에 막혔네. 그 천고의 보물들이 등장할 것을 예상 못 한 우리 잘못이지.”

“백학은 그렇다 쳐. 하지만 마신환이 어째서 등장한 것이지? 천마… 그러니까 자 혈승이 보관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이유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천마신교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뱀과 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형지독이 실패한 거야 별일 아니지만 천마신교에 관련된 것이라면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자 혈승의 존재가 변수가 되어서는 전쟁을 치를 수가 없으니까.

“동창에 지시해서 천마신교의 동향을 다시 파악하겠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를 능가하는 고수가 있을 리 없잖아? 설사 소요자와 위무진이 협공을 가했다 하더라도….”

“협공이 아니었네. 일 대 일로 싸워서 진 거야.”

“일 대 일? 설마… 신주의협이 나타난 것인가?”

“신주의협이 아니야. 그 제자, 강한월에게 당했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돼. 강한월 그 녀석이 심검을 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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