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전쟁의 서막 (2)
* * *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뱀과 용은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는 저 말을 믿느냐는 듯이.
“호랑이. 자네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야. 특히나 무공을 알아보는 안목은 자네가 우리 중 가장 뛰어나니까. 하지만… 심검은 말이 안 되네.”
“맞아.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우리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고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바로 자 혈승이잖아? 하지만 자 혈승도 심검을 쓰지 못했다고.”
뱀과 용이 부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 혈승은 물론 달마대사나 장삼봉도 심검을 썼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까.
“자 혈승이 심검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 진정한 실력이 어떤지 우리에게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호랑이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맞아. 굳이 자 혈승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자네가 겪은 일에만 집중해보자고. 도대체 어째서 심검이라고 생각한 거지? 심검이 어떤 것인지는 솔직히 자네도 모르지 않나?”
“심검이 아니라면 이건 어찌 설명할 건가?”
호랑이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팔꿈치 부분 아래가 사라져서 소매가 축 늘어진 오른팔을.
“강호에 심오한 무공이 심검 하나뿐은 아니지. 금지된 암기나 전설적인 무기를 사용한 것일지도….”
“내가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줄 아는가?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호랑이가 언짢은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사실 뱀과 용도 호랑이의 안목과 분석을 믿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기 때문.
“좋아. 자네 말이 맞다고 치고. 그것이 정말 심검이었다면 과연 팔 하나 상한 걸로 끝날 수 있었을까?”
“불완전한 심검이었기 때문이지. 만약 강한월 그 녀석이 심검을 제대로 완성했다면 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야.”
“아직 연마하는 과정이라는 말이군. 미완성이지만 자네가 패배를 인정할 정도로 강력하고.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군. 강한월은 누구에게서 심검을 배웠을까?”
용의 질문은 너무나 뻔한 것이었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 답이 가져올 변수가 너무나 중요했기에.
“당연히 사부에게 배웠겠지. 신주의협.”
“그렇겠지. 그렇다면… 신주의협은 심검을 완성했을까?”
“서른도 안 된 제자 놈이 심검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오랫동안 천하제일로 인정받아왔던 사부는 완벽한 심검을 펼칠 수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뱀, 용, 그리고 호랑이는 말을 멈추고 술잔을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신주의협이 심검을 완성했다는 것은 새로운 가정, 새로운 질문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신주의협이 자 혈승을 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의 확신에 근거해서 모든 전략을 수립했네. 자 혈승이 천하무적이며 누구도 자 혈승과 겨룰 수 없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였지. 하지만 신주의협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고수이고 자 혈승과 자웅을 겨룰 수준이라면… 모든 전략을 새로 짜야만 하네.”
호랑이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뱀과 용의 생각도 어느 정도는 일치했다. 그럼에도 자 혈승 쪽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호랑이 자네 이번에 부상을 입은 것 때문에 너무 위축된 것 아닌가? 신주의협이 상상을 뛰어넘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자 혈승을 이길 수는 없어. 신주의협에겐 늙어서 골골대는 원로들밖에 없지만, 자 혈승은 강호 최강의 무투집단인 천마신교를 장악하고 있어.”
“흥,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했을 줄 아나? 천마신교도 의문투성이란 말일세. 도대체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건지 알 수가 없어.”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자네들… 당문의 무형지독을 막은 게 누구인지 아는가?”
뱀과 용은 사실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곽 공공과 동창의 역할이었으나 아무도 복귀하지 못했으니까.
“갑자기 무형지독 이야기는 왜? 강한월이나 소요자에 당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야. 천마신교의 마인에게 당했다네.”
뱀과 용의 표정이 굳었다.
천마신교가 척혈단의 편을 들었다는 것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강한월 주변에 마공을 쓰는 동료가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마공을 쓴다고 모두 천마신교인 것은 아닌지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천마신교가 확실한가? 무형지독을 막을 정도면 보통 마인이 아닐 텐데?”
“확실해. 그 마인이 마신환을 가지고 있었거든.”
“무엇이?”
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용은 쥐고 있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이건 심검의 출현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였다.
마신환은 천마, 그러니까 자 혈승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 마신환을 가지고 와 척혈단을 도왔다는 것은 즉 자 혈승의 의지라는 것과 매한가지.
“말도 안 돼! 자 혈승이 왜 척혈단을 돕는다는 말인가?”
“나에게 묻지 말고 자네들이 생각해보게. 머리 쓰는 일은 나보다는 자네들이 더 잘하지 않나?”
* * *
척혈단 단원들과 원로 대표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민정화와 제갈윤이 보고를 하는 자리.
핵심 주제는 포로로 잡은 곽 공공을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아시다시피 곽 공공은 혈승 본인들을 제외하면 적 최고위 인사입니다. 그가 가진 고급 정보들을 빼낼 필요가 있는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더군요. 어쩔 수 없이 소영영 대원의 도움을 받아 곽 공공을 심문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섭혼술을 썼다는 말이오?”
소요자가 조금은 불편한 어조로 물었다.
섭혼술을 포함한 정신 계열 비술은 분명 금지된 것이었으니, 정파의 큰 어른인 그로서는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네, 섭혼술을 썼습니다. 금지된 방법임은 알지만 전쟁이 시작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단독으로 결정하고 소 대원에게 지시한 것이니, 혹 문제가 된다면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휴우. 누가 민 소저를 탓할 수 있겠소? 아무쪼록 곽 공공에게서 확보한 정보가 유용하여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원리원칙에 민감한 무당파의 원로이지만, 소요자는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은 아니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바보도 아니었고.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알아낸 내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민정화와 제갈윤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곽 공공을 통해 혈승들의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뱀, 용, 호랑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만약 자 혈승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하지만 안타깝게도 혈승에 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강력한 정신 금제가 걸려있어 혈승에 대한 기억에 접근하려고 하면 곽 공공의 뇌가 파괴될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혈승 이외의 부분에선 꽤나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황군에 대한 정보인데 뱀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군들이 누구누구인지, 반대로 뱀이 황실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장군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허허, 예상은 했지만… 결국 무림의 일에 황실의 군대가 개입하는 것인가?”
“소요자 선배님. 그들에겐 이건 처음부터 무림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림, 상계, 종교, 정치 모든 것을 아울러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죠.”
“그야말로 전쟁이군. 뱀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이 보유한 군대가 백만이라고? 상상이 안 가는 숫자야. 물론 군병 하나하나의 실력은 보잘것없겠지만.”
“그렇지요. 대다수의 군병들은 삼류도 안 되는 수준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림이 황제의 군대와 싸우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이기기 어려울뿐더러, 설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피를 봐야 합니다. 지금껏 천하제일 고수가 황제에 등극한 예가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지요.”
무척이나 무거운 이야기였다.
이곳에 모인 누구도 군대를 상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고, 백만이라는 숫자가 주는 압박감도 엄청났다.
“민 소저. 겁주는 건 그 정도면 되었으니 이제 해결책도 풀어 놓으시지.”
위무진 맹주가 장난꾸러기 아이를 타이르듯 민정화에게 말했다.
“맹주님 보시기엔 제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셔요?”
“당연히 있겠지. 백만 명의 목숨을 이야기하면서도 표정이 편안한 것을 보니. 내가 아닌 민정화 소저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닌데.”
“제 표정이 그랬나요? 사실 뾰족한 해결책은 아직 없습니다. 시도해봐야 할 방안이 하나 있을 뿐이죠.”
“그것이 무엇이오?”
“무림의 일은 무림이 해결하는 것이 좋듯이, 군대는 군대가 막게 하는 것이지요?”
“군대가 해결한다고? 우리에게 군대가 있었던가?”
“아직은 없지요. 하지만 군대가 생길 가능성은 있습니다. 황태자가 저희 편이니까요.”
“황태자!”
소요자와 위무진 맹주가 무릎을 쳤다.
이미 그 방안을 생각하고 있던 강한월에게는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민 소저. 황태자 측과는 연락을 하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단장님. 장 천호와 꾸준히 교신을 하고 있습니다.”
“황태자가 지금까지 확보한 군세는 어느 정도요?”
“동북 지역 국경을 수비하는 몇몇 장군들이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십오만 정도이고요.”
“아직 많이 부족하군요. 게다가 국경을 비우고 내전을 벌일 경우 외세가 침략할 위험도 있고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오히려 그 반대 상황입니다.”
강한월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태자가 무슨 특별한 수라도 썼다는 말인가?
“황태자를 지원하는 고려에서 외교 역량을 발휘해줬어요. 물론 황태자가 직접 발품을 팔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영향이 크지만. 동북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황태자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기로 했답니다. 그 인원이 합쳐질 경우 황태자의 군대는 총 삼십만에 육박합니다.”
“황태자와 박위 도사가 애를 많이 썼군요. 하지만 그래도 많이 부족한데….”
“부족하죠. 하지만 삼십만 군세를 확보했으니 새로운 길이 열린 거예요. 전면전을 피할 수 있는 길이요.”
민정화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길이 열렸다고 했으나 가능성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뜻.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시도해야만 했다.
군대가 동원된 전쟁을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금지된 술법인 섭혼술까지 써가며 곽 공공에게서 빼낸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뱀의 편에 선 장군들 중 아직까지 눈치를 보고 있는 자들이 있어요.”
“전향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까?”
“원래는 매우 낮은 가능성이었는데, 황태자가 삼십만 군세를 확보해서 가능성이 올라갔어요. 뱀의 득세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대세라 판단하고 줄을 선 기회주의자들. 그들 중 서너 명만 회유할 수 있다면 황태자의 군세는 오륙십만으로 올라가고 반대로 뱀의 군세는 칠팔십만으로 줄어들죠.”
“차이가 많이 줄어드는군요. 하지만 그래도 뱀이 앞서는데….”
“황태자의 군대는 야전에서 단련된 강병입니다. 지원에 나선 부족들도 용맹한 기마부대고요. 대부분이 후방에서 수도를 방위하던 뱀의 군대와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 이 정도 숫자면 거의 균형을 맞췄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군요. 균형이 맞춰진다면….”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죠. 계획을 잘 세우면 팽팽히 대치하되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거예요.”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법이자 성공만 한다면 최상인 전략이었으니까.
“촉각을 다투는 일이 되겠군요. 장군들을 설득할 계획도 세웠겠죠?”
“황태자께서 오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장군들에게 확신을 주려면 황태자 본인이 직접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요. 포로로 잡은 곽 공공을 데려갈 거고요. 뱀의 오른팔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면 마음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좋습니다. 이 작전은 민 소저께 일임하겠습니다. 반드시 성공시켜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