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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75화 (152/210)

175화. 전쟁의 서막 (3)

* * *

영선곡의 장원.

척혈단과 혈교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지만 지금은 적막만 흘렀다.

원로들은 이미 거처를 옮긴 지 오래.

사천 당문이 대량으로 살포한 독 때문에 수풀은 시커멓게 죽었고, 곳곳에 남은 핏자국만이 그날의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고 있었다.

삿갓을 눌러쓴 누군가가 죽음의 땅으로 변한 그곳을 거닐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매우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사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척혈단의 원로들은 떠났지만 하오문의 현장 요원들이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에 출입이 불가능했던 것.

하지만 삿갓을 쓴 인물은 감시는 아랑곳없이 장원에 들어왔고, 보름달이 훤했지만 누구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삿갓을 쓴 인물, 자 혈승은 싸움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땅에 남아 있는 발자국과 건물 곳곳에 새겨진 파괴의 흔적, 그리고 기의 잔재를 통해 제법 구체적인 싸움의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확실히 자 혈승은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 인물.

몇몇 단서와 미세한 흔적만으로도 백응신장, 수월사태 등이 공력을 뿌리며 초식을 전개하는 모습을 거의 실제와 다름없이 복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장을 둘러보던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특히나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지점.

바로 당문의 독인이 무형지독을 발출하며 싸움을 벌인 곳.

‘당문이 성급했군. 아직 성취가 팔성에 불과한 독인에게 무형지독을 쓰게 하다니.’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며 자 혈승이 감각을 끌어올렸다.

관심이 가는 것은 무형지독이 아니라 아직도 진득이 잔재가 남아 있는 마기였다.

무형지독을 막아낼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특수한 마기. 바로 마신환에 저장되었다가 이곳에 뿌려진 천마의 마신기(魔神氣).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마기를 음미하던 자 혈승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과연 마신환은 대단한 보물이구나. 당대 천마는 이전 천마들에 비해 특출 날 것이 없는 인물인데, 마신환의 도움으로 마신강림을 대성했군. 재밌어. 판이 점점 재밌어지는군.’

천마의 성취에 고개가 끄덕여졌고, 그럴수록 혈승들의 행보가 한심해 보였다.

마신환과 백학을 확보할 수 있도록 안배를 해줬건만, 결국 실패해 강력한 적의 탄생을 방치하다니.

자 혈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무형지독과 마신환의 대결을 복기하고 나니 다른 싸움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 장원 밖으로 향했다.

가장 관심이 가는 싸움의 현장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실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 본능적인 이끌림에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호랑이와 강한월이 맞붙은 곳.

자 혈승으로서 키워낸 제자와 신주의협의 탈을 쓰고 가르친 제자의 대결.

오롯이 자신의 유산을 계승한 자들의 싸움이니, 자 혈승 자신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 강한월 어제의 너에 비해 얼마나 발전했느냐?’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자 혈승은 특수한 심공을 끌어올렸다.

상당한 내력과 심력을 소모하는 심공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 혈승의 상단전에서 기묘한 파장이 흘러나와 주변으로 퍼져갔다.

필연의 법칙과 개연성에 따라 지나간 순간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드디어 호랑이와 강한월의 대결이 펼쳐진 시간대가 자 혈승의 뇌리에 재구성되었다.

조화를 파괴하는 호랑이의 공격, 폭풍우를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강한월의 모습.

그리고 어떤 한순간.

어떠한 연관성이나 조짐도 없이 마치 우연처럼 등장한 예리한 힘.

두 눈을 감은 자 혈승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정녕 문을 연 것이냐?’

하지만 그 흥분은 급격히 가라앉았다.

강한월의 심검이 미완성의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괜한 기대를 한 것일까?

아니,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빠른 시간에 이 정도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지만, 예전보다 기대치가 조금 올라간 것도 사실이니까.

‘천마도 그렇고 강한월도 그렇고. 무게추가 혈교에 기운 줄 알았더니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지만 조금 도와줘야겠는데….’

원하는 정보는 충분히 얻은 자 혈승이 영선곡을 떠났다.

계곡 인근 객잔에 자리를 잡은 그는 점소이에게 지필묵을 부탁했다.

부지런히 붓을 놀리기를 한 시진.

적당한 두께의 책 한 권이 완성되었다.

자 혈승은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에 두 글자를 써넣었다.

책의 제목은 혈경(血經)이었다.

* * *

호랑이가 탄 마차가 황궁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미리 지시가 내려왔는지, 황궁 경비대는 정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차를 통과시켰다.

깊숙한 곳에서 마차를 내린 호랑이는 주위 눈치도 보지 않고 경공을 발휘해 후원으로 달렸다.

그만큼 급한 일이었다.

뱀이 보낸 전서에 ‘초긴급’이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호랑이가 물었다.

밀실에는 뱀과 용이 마주 앉아 있었는데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일단 목을 좀 축이게. 숨 돌릴 시간도 없을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니니까.”

뱀이 내미는 찻잔은 마다하고 호랑이는 탁자 위의 술병을 들었다.

벌컥벌컥 크게 한 모금 들이켠 호랑이가 눈을 부라렸다.

목은 축였으니 어서 이야기를 하라는 듯이.

“뜻밖의 일이 생겼어.”

뱀이 평상시와는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 황당, 기대, 공포가 뒤엉킨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뜻밖이라고? 안 좋은 일인가?”

“글쎄.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이것 좀 보게.”

뱀이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보자기에 쌓여 있는 네모난 물건.

호랑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자기를 풀었다.

“이건…?! 자네들 지금 장난치는 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책자를 집어 든 호랑이가 호통을 쳤다.

아무리 생사를 함께하기로 한 동료라도 이런 장난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장난이 아닐세. 못 믿겠으면 그 책을 읽어보게.”

“흥, 이십 년을 찾아 헤맸지만 조금의 단서도 찾을 수 없었는데, 갑자기 혈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호랑이는 화를 내며 책장을 넘겼다.

뱀 이 녀석이 장난을 치려고 제대로 준비했구나. 호랑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쓰여 있는 내용이 첫 장부터 제법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장을 넘기며 화났던 호랑이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고, 세 번째 장을 넘겼을 때는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거… 설마…?”

“나와 용도 확신하진 못해. 혈경의 존재만 알았지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책에 적힌 내용의 심오함 그리고 우리가 익힌 것들과의 연관성으로 볼 때… 진짜 혈경일 확률이 매우 높아.”

“그래, 내가 보기에도 이건 진짜야. 그런데 이게 어떻게 뱀 자네 수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졌지.”

혈경이 발견된 곳은 뱀의 침실에 붙어있는 응접실이었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깬 뱀은 차를 마시기 위해 응접실에 왔다가 흠칫 놀랐다.

탁자 위에 생소한 물건이 놓여있었기 때문.

궁녀나 환관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잠에 빠져 있었다고 한들, 누군가 들락거리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게다가 조심성이 많은 뱀은 침실 주변에 적의 침입을 탐지하는 비술까지 걸어 놨으니….

자신의 기감과 비술을 피할 정도로 놀라운 고수가 다녀갔다는 이야기인데… 세상에 그럴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뱀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열었고, 이번엔 아예 몸이 굳어버렸다.

책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본 것이다.

‘혈경’이라는….

“그럼… 그 보자기를 가져다 놓은 사람은…?”

“누굴 것 같나? 경비가 철저한 황궁을 제집 드나들 듯할 수 있는 사람. 혈경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 당연히 자 혈승이지.”

호랑이의 물음에 용이 답했지만, 사실 답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너무나 놀라서 물은 것일 뿐 호랑이도 답을 몰랐던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자 혈승이 우리에게 혈경을 준 것이지? 줄 거면 당당히 우리를 불러서 주면 되지 왜 몰래 놔두고 간 것일까?”

천하 제일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혈경을 얻었지만 기쁘기는커녕 공포가 몰려왔다.

자 혈승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 자 혈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나?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혈경이 가짜는 아니라는 거야. 우리에게 혈경을 익히라고 준 것이지.”

“하지만 자 혈승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따를 수는….”

호랑이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했지만 용의 입장은 또 달랐다.

아무리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한들, 꿈에 그리던 혈경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어쨌든 행운이라 생각한 것이다.

“자 혈승의 의도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일부는 추측이 가능하네.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혈경을 준 것은, 모르기는 몰라도 호랑이 자네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내 부상과 연관이 있다고?”

“그래.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심검이 출현했음을 자 혈승도 인지한 것이지. 그러니 우리에게 심검을 상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준 것일세.”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자 혈승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어쨌든 자신들을 키우고 가르친 것은 바로 자 혈승이고 공식적으로 자신들은 그의 부하이니까.

“우리가 다음 단계로 성장할 때가 되었다고 자 혈승이 판단했다는 말이군.”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용의 추측에는 여러 가지 허점이 있었다.

자 혈승이 그런 호의를 가지고 혈경을 준 것이라면 어째서 직접 주지 않고 탁자 위에 몰래 놔두고 간 것인지.

그 이전에, 척혈단과의 싸움에 등장한 마인과 마신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실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지만 뱀, 용, 호랑이는 굳이 그런 의혹을 꺼내지 않았다.

욕심이 눈을 가린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신적인 영역에 들고 싶은 욕망.

오래전부터 꿈꾸고 동경해왔던 자 혈승의 경지.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다름 아닌 혈경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제 그 꿈이 현실이 되었으니 사소한 의문쯤이야 얼마든지 덮어줄 수 있었다.

“우리 뜻이 일치하는 것 같군. 좋아, 나는 혈경을 수련하겠네.”

호랑이가 하나 남은 손을 뻗으며 혈경을 집어 들었다.

기왕 결심을 한 것, 단 한 순간도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지. 하지만 수련에 들어가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전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잊지 말게. 우리 셋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는 말이야.”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설마 전쟁을 끝내 놓고 그 후에 혈경을 수련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고심하는 용과 호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뱀이 미소를 지으며 해결책을 내놓았다.

“자네들은 책의 앞부분만 봤으니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일세.”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고민할 필요 없다는 뜻인가?”

호랑이의 손에서 혈경을 뺏은 뱀이 책장을 넘겼다.

“여기를 보게. 실제 혈경은 책의 삼 분의 일에 불과해. 나머지 삼 분의 이는 일종의 해설서이지. 난해한 내용을 쉽게 풀어놨고 빠르게 수련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적혀 있더군.”

“정말인가? 이런 고마운 일이… 자 혈승이 직접 해석을 해 준거라면 믿을 수 있지.”

“그래서… 뱀 자네가 보기엔 수련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완벽히 대성하는 것까지는 몇 년 걸리겠지. 하지만 일차 수련을 완료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거라면… 백 일이면 가능하다고 보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전쟁이 급하다고 한들, 고작 백 일 늦춰지는 게 문제 될 리 없으니까.

각자의 수하들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혈승들은 그날 밤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것이 척혈단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하게 될지는 상상도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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