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전쟁의 서막 (4)
* * *
뱀, 용, 호랑이가 혈경을 품에 안고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한 달쯤.
오호도독부의 좌도독 척계인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좌도독. 소장 윤관이 찾아뵙습니다.”
“오, 윤 장군. 잘 오셨네. 오는 길에 문제는 없었고?”
명실공히 제국 최고 군정 기관의 사령관과 십만 정병을 거느린 상장군이 나누는 인사치고는 어딘가 이상했다.
말 한마디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자의 행차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아들 집에 들른다는 핑계로 부대를 나왔고, 아들 집에서는 변장을 하고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뒤를 밟는 자도 없었고요.”
“혹시… 아들에게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수십 수백 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요.”
윤 장군이 거듭 안심을 시켰음에도 좌도독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구족이 몰살당할 수 있는 사안이니까.
“휴우. 이것 못난 모습을 보였군. 최근에는 잠도 잘 못 자고,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덜컹하는 것이….”
“마음을 강하게 하시지요, 좌도독. 어떤 결정을 내리시더라도 소장은 믿고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안 그래도 이제 결정의 시간이 된 것 같아 보자고 한 것이네.”
“귀빈을 만나보신 겁니까?”
“아니.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만나지를 못했네. 귀빈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아는 자가 없어.”
좌도독은 보름 전에 의외의 방문자를 맞아야 했다.
야심한 밤을 틈타 마치 도둑이나 자객처럼 은밀히 찾아온 것은 황태자였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라진 곽 공공까지 옆에 끼고 나타난 황태자는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좌도독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황태자와 면담을 했는데, 먼저 곽 공공의 말을 들어야 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곽 공공은 귀빈의 실체에 대해 술술 불었다.
그녀가 실은 미래에서 온 회귀자이며 혈교라는 사교의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이야기.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라 가정할 경우 지난 수년간의 여러 이상한 일들이 모두 설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빈에게 반기를 들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회귀자이면 어떻고 황제가 그녀의 꼭두각시면 또 어떤가?
좌도독은 지는 편에 서서 패가망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호도독부의 좌도독이라는 자리…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하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위치였다.
살짝 고민이 되기 시작한 것은 황태자의 이야기가 시작된 후였다.
동북 지역 국경지대를 거점으로 모이기 시작한 세력들.
변방에서 수십 년간 실전을 치른 범 같은 장수들, 그리고 적으로 돌리기 겁나는 기마 부족들과 고려까지. 그 수가 물경 삼십만에 달했다.
황태자는 황실의 적통과 민초들을 위하여 자신의 편에 서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형제처럼 여기는 몇몇 장군들과 함께 황태자 편에 붙을 경우, 귀빈이 부리는 군대와 한판 승부를 겨뤄볼 만했으니까.
천하의 흥망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생각이 드니 걷잡을 수 없는 열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아끼는 수하들을 모아 은밀히 상의를 해야 했고, 또 귀빈을 직접 만나보고 과연 누가 이기고 질지 감을 잡아볼 생각이었다.
“귀빈을 만날 수 없다면… 결정을 미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군대를 빼내 황태자 편에 합류할 기회를 놓치게 되네. 좋든 싫든 지금 결정할 수밖에 없어.”
윤 장군은 떨리는 마음으로 좌도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한마디에 의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수하들의 운명까지 결정될 테니까.
“우리는 황태자의 편에 서기로 한다. 어디에 숨었는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귀빈에게 목숨을 맡길 수는 없으니.”
* * *
강한월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혈승들과의 싸움을 거듭하면서 악몽과 두통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술이 줄지는 않았다.
그만큼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던 것이고, 지금은 닿을 듯 말 듯 아른거리는 심검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술을 마신다고 막힌 벽이 깨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 고민을 덜어주기엔 술만 한 것이 또 없으니까.
“단장. 아직 안 주무시죠?”
민정화가 찾아왔다.
그녀는 종종 늦은 시간에 찾아왔는데, 강한월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밤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민 소저가 고생이 많으십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그녀는 부쩍 수척해졌다.
그렇다고 그녀의 눈부신 미모가 빛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보다 좀 쉬어 가면서 하라는 말을 할 정도이니….
“제가 무슨 고생을… 현장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는 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전투를 치르는 그 사람들이 민 소저의 노고 덕분에 살 확률이 올라가니까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죄송하기도 하고요.”
“호호, 미안한 줄 아시면 술이나 한 잔 주세요.”
강한월이 따라준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민정화가 보고를 시작했다.
늦은 밤 찾아와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었다.
물론 최근 보고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황태자와 동행하고 있는 제갈윤 대원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좌도독이 합류하기로 최종 확정되었답니다.”
“정말입니까? 굉장히 좋은 소식이네요.”
“좋은 소식이죠. 좌도독이 상장군 두 명과 함께 합류하면 황태자는 이십만의 군대가 보강됩니다. 혈교는 당연히 그만큼의 전력 손실을 입고요.”
“얼추 균형이 맞춰진 겁니까? 전쟁을 억지할 정도로?”
“아직 조금 부족해요. 황태자의 군대는 실전 경험이 많은 강군이니 전쟁이 일어나면 승부를 겨뤄볼 만하지만, 전쟁 발생을 원천적으로 막을 정도로 압도적이진 않아요.”
“황태자가 더 힘을 내야 하겠네요.”
“네. 현재 설득 중인 장군들이 있으니까요. 좌도독이 합류한 것이 나머지 장군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해 봐야죠.”
“알겠습니다. 황태자 스스로가 영민한데다 장 천호와 제갈윤도 최선을 다할 테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황태자가 설득 작업을 끝낼 때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강한월의 지시는 당연한 것이었다.
군대가 동원된 전쟁을 억제하는 것은 이번 싸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황태자가 은밀히 작업을 하고 있는데, 괜히 다른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다 된 밥에 초를 칠 수도….
“휴우. 실은 그 문제를 상의드리려고 찾아뵌 거예요.”
민정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강한월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전쟁 발발을 미루자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것인가?
“혹시… 천마신교가?”
“역시 짐작하셨군요. 맞아요. 천마신교의 행군 속도가 매우 빨라요. 이미 곤륜파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멈추거나, 아니면 곤륜파를 우회하면 될 것 아닙니까?”
강한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쟁의 발발을 미루는 문제도 중요했지만, 곤륜파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무림맹주 호랑이를 적극 지지하는 모습이지만, 소요자와 곤륜일검은 시간만 있으면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으니….
“천마는 멈출 생각도, 우회할 생각도 없다고 합니다.”
“어찌 방법이 없겠습니까? 대공자나 유선 소저가 나서서 설득을 해보면….”
“대공자는 이미 몇 번 시도했다가 면박만 당했다고 해요. 조금 전 유선 소저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일 당장 천마를 만나 뵈러 출발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설득할 자신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죠.”
“물론이에요. 하지만 곤륜은 이미 늦은 것 같아요. 쉬지 않고 달려가더라도 한 달은 걸릴 테니까요. 그리고… 유선 소저의 요청이 있는데….”
“저에게 같이 가달라고 합니까?”
“네. 유선 소저 본인보다는 단장이 직접 설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네요. 곤륜과의 싸움은 막을 수 없더라도 그다음 싸움은 막아야 합니다.”
천마신교의 동선을 예측해보면, 곤륜 다음은 청성이었다.
그리고 청성이 있는 사천부터는 중원 땅인 것이고, 여기서 천마신교와의 전투가 벌어진다면 본격적인 대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함께 가지요. 저 역시도 천마를 설득할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거죠. 저는 사천에서 최후의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가정으로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장학송 문주님은…?”
얼마 전 강한월은 진가린의 사부인 장학송 문주에게 서신을 보냈다.
조만간 전쟁을 있을 것 같으니 척혈단에 합류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흔쾌히 돕겠다는 답신을 받았지만 일정에 대한 말은 없었고, 그 확인을 민정화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이미 장백산을 출발하셨어요. 이동하면서 하오문 지부를 통해 연락을 주고 계시는데, 매우 빠른 속도로 오시는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분이시니 제가 없더라도 잘 맞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리고 무당, 화산, 아미에도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한데 뭉쳐야 하니까요. 소림이 봉문을 풀고 나서 줄 수 있는지도 확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 소저 덕분에 우리 척혈단이….”
“호호, 인사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받을게요. 내일 먼 길 가셔야 하니 이만 쉬세요.”
* * *
곤륜파의 본산 옥허봉에서 오백 리 떨어진 이름 없는 봉우리.
눈발이 휘날리는 그곳에 곤륜의 감시초소와 봉화대가 있었다. 여타의 문파에는 볼 수 없는 이런 군사 시설이 유독 곤륜에는 있었는데, 천마신교가 중원을 침공할 경우 가장 먼저 거치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
날은 춥고 바람도 강한 험한 날씨였지만, 곤륜의 제자들은 초소를 비울 수가 없었다.
“제길, 이런 날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뜨끈한 술이나 마시며 몸을 녹여야 하는데. 이런 눈 폭풍 속에서 무슨 경계가 필요하다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구만.”
“큰일 날 소리 마시오, 사형. 사부님 들으시면 경을 치시겠소. 최근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씀 못 들었소? 중원 백성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이 정도 고생이야 충분히….”
“얼씨구. 사제는 득도하여 우화등선하겠구먼. 어디서 입에 발린 소리를. 우리가 고생하는 거 누가 알아나 주나? 그리고 강호 정세가 불안했던데 어제오늘의 일인가? 수십 년 동안 평안했던 적이 하루도 없었구먼. 아무리 마교 놈들이라도 이런 눈 폭풍 속에선 할 수 있는 것이….”
툴툴거리던 곤륜 제자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두껍게 쌓여 있는 눈 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검이 곤륜 제자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흐억. 치… 침입자다!”
사형의 목에서 피 분수가 터지는 것을 본 곤륜 제자가 급히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는 순간, 소리 없이 날아든 검이 목을 파고들었다.
툭.
놀란 눈을 감지 못한 곤륜 제자의 목이 데구루루 눈 바닥을 굴렀다.
하얀 옷과 복면으로 위장한 마인들이 스으윽 바닥에서 일어섰고, 초소 밖에선 봉화대를 지키던 곤륜 제자들이 마찬가지로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쳇, 쉬워도 너무 쉽군. 명색이 구파일방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약해서야. 남은 초소가 몇 개이지?”
“백오십 리 떨어진 곳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게 마지막 초소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장로급 인사를 포함한 고수들이 지키고 있다 합니다.”
“그래 봤자지 뭐. 우리 임무는 내일이면 끝나겠군.”
초소와 봉화대 습격 임무를 맡은 특임대 조장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몸을 돌렸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