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전쟁의 서막 (5)
* * *
강한월과 유선이 곤륜을 향해 출발한 지 열흘쯤 되던 날.
묵고 있는 객잔으로 하오문 요원이 찾아와 봉투 하나를 건네고 갔다.
민정화가 지속적으로 최신 정보를 보내주고 있었던 것.
“흠… 이건 유선 네가 먼저 봐야 할 내용이군.”
강한월이 얼른 내용을 훑다가 정보지를 유선에게 건넸다.
예상했던 대로 천마신교와 곤륜파의 대결에 대한 내용이었다.
꼼꼼히 읽어가던 유선은 표정에 신경을 써야 했다.
신교의 압도적인 대승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기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으니까.
사실 뭐 너무 당연한 내용이라 큰 감흥이 일지도 않았지만.
“새로울 것은 없네. 신교의 중앙 부대는 나설 필요도 없었고, 검마와 권마 두 장로가 이끄는 선발대만으로 곤륜파를 불태웠으니….”
아무리 천마신교가 강하다고 한들 곤륜파 전체가 죽기를 각오하고 항쟁을 벌였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천마를 포함한 마교의 전력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곤륜파 장문은 첫째 날의 처절한 패배 이후 도주를 택했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문도들은 항복을 선언했고.
매우 부끄러운 결정이 분명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선의 선택이 되었는데, 첫날 전사한 삼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목숨은 부지하게 된 것이다.
맞서는 자는 절대 살려주지 않지만, 항복한 자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 천마신교의 전통이었으니.
“신교의 행군이 더욱 빨라지겠군.”
“그렇겠지. 곤륜이 중원 진입의 방어선인데 그것이 무너졌으니. 이제 사천까지는 아무 저항 없이 탄탄대로를 걷게 된 것이지.”
다음 격전지는 사천이 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소규모 전투가 될지 대전쟁이 될지는 불분명했는데, 청성파가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
“민 소저의 말에 따르면, 현재 무림맹에서 긴급 회의가 열리고 있다네. 그 결과에 따라 사천 상황이 정해질 것 같아.”
“음… 계속 동향에 신경을 써야 하겠군. 어쨌든 우리 임무는 변할 것이 없어. 빨리 천마를 만나 봬야 한다.”
“그래. 안 그래도 이동 속도를 높이자고 할 생각이었어. 청해성에서 신교의 본대와 조우할 수 있을 거야.”
* * *
낙양 무림맹 본부.
대청의 회의실에선 호통과 탄식이 끊이질 않고 터져 나왔다.
원래는 이렇게 소란스러울 수는 없는데, 무림맹주인 호랑이가 자리를 비운 탓에 각 문파의 대표들이 마음껏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수경사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신중하게 상황을 보자니? 마교 놈들이 사천으로 달려오고 있는데 뭘 더 지켜보자는 거요?”
탁자를 두드리며 핏대를 높이는 건 청성파의 감숙균 장로였다.
곤륜파가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마교의 공격에 무너지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사천의 문파들.
마교에 맞설 공동 전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하는데, 아미파에서 좀처럼 동의를 안 해주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마교가 사천에 당도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어요. 당장 맹주님도 안 계신데 우리끼리 무슨 결정을 한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사천에는 아미와 청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당문과도 협의를 해야 하는데, 당문 대표도 나타나질 않고 있으니….”
“당문이 없으니 우리라도 먼저 힘을 합쳐야 할 것 아니오!”
쾅!
청성파 장로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약간의 내공까지 담겨있던 탓에 탁자는 산산이 부서졌고, 지켜보던 타 문파 대표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 장로, 진정하시오. 설마 우리가 청성 혼자 마교를 감당하도록 구경만 하겠소?”
개방의 팔결 장로 호우개가 감숙진 장로를 달랬다.
회의실에 모인 각 문파의 대표들은 진작에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개방은 청성의 편이었다.
사천당가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오대세가 전체와 개방, 청성, 곤륜, 공동, 해남이 한 편이었고, 무당, 화산, 아미, 점창이 다른 한 편을 먹은 것이다.
봉문을 했기에 회의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소림도 아미의 편이라고 보면, 무림맹의 주축인 열다섯 개 문파 중 열개가 무림맹주 호랑이를 지지하고 나머지 다섯이 반대하는 형국.
숫자로만 보자면 맹주파가 절대적 우위이지만, 반대파에는 삼대 문파로 불리는 소림, 무당, 화산이 속해 있기에 결코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편으로 나뉘어 호통도 치고 달래기도 하는 난장판이 이어질 때, 더 이상 두고 보기 힘들었는지 남궁세가의 대표가 벌떡 일어섰다.
“모두들 닥치시오! 맹주께서는 강호를 지키기 위해 연로한 몸을 이끌고 폐관수련에 드셨는데, 당신들은 이렇게 서로 싸움질만 하고 있어서 되겠소? 마교가 중원을 침공한 데다가 척혈단이라는 정파의 배신자들마저 나타난 마당에!”
듣기 거북한 질책이었지만 누구도 반박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남궁세가의 대표는 남궁석이기 때문.
무림맹에 파견나와 있는 각 문파의 대표들은 모두 장로급인 반면, 남궁세가의 대표 남궁석은 세가의 현 가주. 게다가 무림맹주 호랑이의 아들이니 다른 문파 대표들과는 급이 달랐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남궁 가주님! 하나로 힘을 합쳐 마교에 맞서야 하는데 아미파에서 저렇게 똥고집을….”
“감 장로 당신도 잘한 것이 없소! 아미파의 입장이 다르면 차분히 설득하면 될 일. 그렇게 역정만 내서야 일이 해결될 리 없지! 어서 수경사태에게 사과하시오!”
듣기엔 아미파의 편을 드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노련한 각 파의 대표들은 즉각 눈치챘다.
별 의미도 없는 청성파의 사과를 던져주고 대신 아미파의 협조를 압박하겠다는 뜻.
역시나 형식적인 사과가 끝난 후 남궁 가주는 단호하게 외쳤다.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토의나 토론보다는 단호한 결정과 행동이 중요한 법. 내 무림 맹주님을 대신하여 명을 내리겠소. 무림맹 소속의 모든 문파는 당장 최강의 전력을 꾸려 사천으로 향하시오. 만약 이에 불응하는 문파가 있다면 정파 무림의 적으로 간주될 것이오!”
아무리 맹주의 아들이라고 한들 남궁세가의 가주에게 맹주를 대신해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없었다.
그럼에도 반대를 표하는 문파는 없었는데, 남궁 가주의 기백에 주눅이 든 탓도 있었지만 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뿔뿔이 제 갈 길로 흩어지는데, 무당, 화산, 아미, 점창의 대표가 몰래 모였다.
“다들 수고 많으셨소.”
“휴우, 남궁 가주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걸 참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어쨌든 다행 아닙니까? 우리가 원하던 결론이 났으니.”
“내 말이요. 표면적인 이유야 무엇이던 사천으로 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실은 무당, 화산, 점창의 대표에겐 자파의 장문인들로부터 하달받은 임무가 있었다.
조만간 사천으로 출동을 할 것인데 무림맹 본단에 둘러댈 핑곗거리를 찾으라는 것.
남궁 가주의 명령에 의해 그것이 자연스레 해결된 것이다.
무림맹의 회의가 열린 이 날, 흑사련 소속의 문파들도 사천행을 명 받았다.
깊은 계곡과 외딴 섬에 은거하던 사파의 고수들은 물론, 도시 암흑가를 누비던 흑도의 건달들까지 길 떠날 차비를 시작했다.
각자의 사연과 속셈은 달랐지만 사천행의 결론은 같았다.
그리고… 실은 이들보다 먼저 사천에 도착해 있는 세력도 있었다.
* * *
사천에 마련된 천궁의 임시 본부.
궁주인 자 혈승의 명을 받들어 진작에 모든 천궁 전력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천궁에 속해 있지 않았던 대리 단가와 천룡사의 무사들, 그리고 만검산장의 검사들까지 사천으로 불러들였다.
매우 은밀히 진행한 데다 마교의 침입으로 강호가 떠들썩한 탓에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현재 사천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구축한 곳은 청성도 아미파도 아닌 바로 천궁이었다.
“정말로 궁주님의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군요. 마교가 침공할 것을 어찌 아시고 미리 사천으로 본부를 옮기라 명하시다니.”
좌호법 황우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주의협을 신처럼 떠받드는 그였기에, 이번 일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분의 초월적인 능력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이런 대혼란 속에서도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궁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우호법 수인대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도 최근 들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처음 신주의협에 동조하여 천궁을 설립했을 때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강호에 무슨 재앙이 닥칠 거라고 이런 비밀 조직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 후로 계속해서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고, 이름을 숨기고 음지에서 전력을 양성하면서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주의협과 담판을 지어야겠다 생각한 순간, 세상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멀쩡하던 무림맹주가 갑자기 무림 공적이 되더니 동시에 무림맹, 황실, 흑사련의 주인이 바뀌질 않나, 단체로 노망이라도 난 것인지 명망 높은 무림의 대선배들이 척혈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무림 전복을 꿈꾸질 않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사태가 터진 것이다.
천마신교의 중원 침공.
시대를 막론하고 중원 무림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 같은 사건이.
“두 분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지요. 그만큼 우리 천궁의 어깨가 무거워졌으니까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모를 이 혼돈의 시대에 세상을 구할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역시나 직급이 높은 만큼 책임감도 더 큰 것인지, 천사장 양 혈승이 흥분한 좌우호법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양 혈승 또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실은 좌우호법보다 훨씬 더 흥분된 상태였다.
천궁의 다른 인물들이야 채 십 년도 안 되는 기다림이었지만, 그는 두 번의 생을 관통하는 긴 시간을 갈망해 온 순간이니까.
그 끝이 멀지 않은 것이다.
“천사장님. 우리의 임무가 막중함을 알기에 여쭤보는 것인데… 현 사태를 해결하기엔 우리의 전력이 부족한 것 아닙니까? 정사마가 모두 사천을 향하고 있는 데다가 여차하면 황실의 군대마저 참전할 상황이니까요. 물론 우리에겐 궁주님이 계시지만 인원수에서 너무 현격한 차이가….”
“좌호법의 우려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 모두와 전면전을 벌일 일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전면전이 아니라면… 그럼 어떻게 혼란을 수습한다는 말입니까? 궁주님이 신분을 밝히시면 정파야 설득이 되겠지만, 마교와 흑사련은 말을 듣지 않을 텐데요?”
“그들끼리 먼저 전쟁을 치르도록 해야겠지요. 누가 이기던 심대한 타격을 받았을 터, 우리는 마지막에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면 되는 겁니다.”
천사장 양 혈승이 당연하다는 듯 전략을 설명했지만, 좌우호법은 서로 얼굴만 뻔히 바라보는 것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천사장님… 그럴 경우 무림의 피해가 너무 크지 않을까요? 정사마가 전면전을 벌일 경우 강호인의 칠팔 할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텐데요?”
우호법 수인대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천궁의 우호법이기 이전에 천룡사의 승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불자의 입장에서 천사장의 전략을 수긍하기란 애당초 무리였다.
“가급적 많은 생명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소수이고 이 사태를 원천적으로 해소하기엔 힘이 부족하니까요.”
“흠… 대리 왕부의 군병을 동원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장에 이삼만 명은 불러올 수 있는 데요.”
“그건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킬 겁니다. 대리의 군대가 움직이면 황실의 대군이 몰려올 테니까요.”
천사장의 말이 모두 옳았기에 좌우호법은 반박할 수 없었다.
어두운 표정을 짓는 그들을 향해 천사장이 부드럽게, 하지만 엄중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쓰러져 피가 강처럼 흐른 이후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 겁니다. 궁주님이 만드실 세상은 분명 더 좋은 세상일 테니 약간의 피해는 감수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