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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78화 (155/210)

178화. 마신강림과 심검 (1)

* * *

천하의 모든 무인들이 사천으로 몰려들 때, 강한월과 유선은 청해성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천마신교가 사천에 진입하기 전에 천마를 만나려 서두른 것인데, 실은 그럴 필요는 굳이 없었다.

기습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천마신교는 매우 느린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당당함의 표현이기도 했고, 물리적으로도 속도를 올리기 힘들었다.

이번 중원 공략에 동원된 마인의 수가 무려 오천에 육박했으니까.

흔히들 마교의 전력이 일만 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과장된 것이고, 제대로 마공을 익히고 훈련받은 마인 무사의 수는 육천. 그중 천 명만 광명정을 지키게 남겨 두고 모두 이번 중원행에 참여한 것이다.

“장관이군.”

저 멀리서 자욱이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며 강한월이 감탄했다.

천마신교 본대의 행렬이 주는 박력과 위압감은 예상을 초월했다.

십 리 넘게 떨어져 있는데도 흙먼지 안쪽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거대한 마기가 생생히 느껴진 것이다.

정통 마공을 수련한 수천의 마인이 동시에 뿜어내는 마기.

마치 숨을 쉬듯 꿈틀거리는 마기의 구름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단일 조직으로는 강호 최강이라는 말… 이제 실감이 되나?”

뿌듯함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로 유선이 물었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소림, 무당, 화산 셋을 합쳐 놓아도 천마신교에는 상대가 안 되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곤륜파의 장문인이 하루 만에 도피를 택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신교가 최강임이 이렇게 감사하게 느껴질 줄은 미처 몰랐군.”

말을 마친 강한월이 천마신교 행렬을 향해 달려갔다.

거대한 산을 이룬 마기의 구름 속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압도적인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향해.

* * *

강한월이 천마신교의 행렬에 들어선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지만, 정작 천마를 만난 것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행렬이 멈춘 후였다.

먼저 대공자를 만나야 했고, 이후 부교주에게 한참을 붙잡혔기 때문이었는데, 둘 다 적잖이 흥분한 상태였다.

전투를 즐기는 마인들의 기본 습성 때문이기도 했고, 중원 진출이라는 교의 오랜 염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설레임 때문이기도 했다.

천마신교의 전진 속도를 늦춰야 하는 강한월 입장에선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전투를 치르며 중원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무슨 방법으로 설득한다는 말인가?

“들어오게.”

야영지 중앙의 거대한 막사로 들어간 강한월은 인사도 잠시 미루고 천마를 바라봤다.

다행히 부교주나 대공자에게서 엿보였던 흥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릇이 크기가 달랐다.

더군다나 마신강림을 대성했으니….

“십만대산 밖에서 천마를 뵈니 감회가 새롭네요.”

“설마 신교가 중원을 넘본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천마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걸요.”

“흥.”

천마가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유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곤륜을 공격한 것을 두고 뭐라고 하면 단단히 화를 내줄 생각이었는데, 강한월이 아무 말도 안 하니 김이 빠진 것.

“유선. 당문의 무형지독을 상대했다고?”

“네. 천마께서 마신환에 마기를 담아 주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의상 겸양 떠는 것은 아니었다.

마신환이 없었으면 분명 무형지독에 중독되어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천마의 생각은 조금 달랐는데….

“무형지독은 보물이 있다고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신환에 담았던 내 기운도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천마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대단한 칭찬이었다.

그리고 칭찬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천마가 말을 하는 사이 마신환에 기운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천마가 격체전공의 수법으로 마신기를 전송해준 것.

“천마님, 어째서…? 마신환은 반납 드리려던 참인데요?”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다.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진 네가 사용하도록 해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차기 천마 후계자로 유선을 지목한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선은 오해 따위는 하지 않았다.

천마의 성격이 어떤지, 그리고 이번 전쟁이 얼마나 엄중한지 잘 알았으니까.

최고의 공격력을 갖춰 천마신교의 날카로운 칼로 활동하라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든 감격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천마신교의 최고 보물을 맡길 실력은 된다는 걸 인정받은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되었다. 난 강한월 이 녀석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넌 이만 나가 보거라.”

유선은 조용히 물러갔고 천마는 강한월을 탁자에 앉혔는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듯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이유가 무엇이지? 속도를 늦춰 달라는 건가? 내가 사천을 쑥대밭으로 만들까 봐 걱정이 돼서?”

“천마께 감사를 표하러 온 것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천마신교의 행보에 이래라저래라하겠습니까?”

“흥, 허례는 집어치우고 솔직히 말하라.”

“물론 속도를 좀 늦춰 주시면 더욱 감사하긴 하지요. 척혈단이 아직 전열을 갖추지 못했고, 사천의 문파들 중 누가 적인지도 확실히 구분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신교와 같은 큰 조직은 쉽게 움직일 수 없고, 또한 쉽게 멈출 수도 없는 법. 애써 일으킨 기세가 꺾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모르지는 않겠지?”

“알고 있습니다. 하여 무리하게 부탁드리지 않는 것이고요.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분할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무표정하던 천마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재밌다는 표정 같기도 했고 비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적군과 아군을 구분한다… 그래, 너는 구분이 되더냐?”

“일부 불분명한 문파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회귀자와 혈교가 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천마신교는?”

“천마신교는 적이 아닙니다.”

“푸하하핫.”

천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신강림을 이룬 후 이처럼 호통하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강한월에겐 그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천마신교도 적이라고 말할 때가 올 것이고, 그때도 천마가 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마신강림을 대성한 것은 일정부분 너의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 너하고는 가감 없이 대화를 나눠줄 용의가 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천마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신강림이 어떤 것인지는 너도 대충은 알겠지? 이 경지를 이룬 후 세상을 보는 눈이 변했다. 이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예전에는 중요했던 것들이 실은 의미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강한월은 천마의 말뜻을 새겨들었다.

이건 단순히 인격이 성숙해서 세상을 너 넓게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마신의 신격이 접목되면서 그야말로 신안(神眼) 혹은 초월적 통찰력이 생겼다는 뜻.

그렇기에 천마가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인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것을 보게 되셨습니까?”

“모호하고 흐릿하다. 똑 부러지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 경지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네 마음처럼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궁금증을 더욱 가중시킬 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강한월이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천마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되었다. 더 이상 해줄 말이 없구나. 그것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이 전쟁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느냐?”

“자 혈승을 잡아야 합니다.”

“맞다. 수만 명이 맞붙는 전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백만이 넘는 군대가 충돌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의미 없는 싸움. 결국은 자 혈승에 달렸지.”

“천마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나머지 싸움도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흘려야 할 피의 양이 달라질 테니까요.”

“후후, 그래. 너에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그 부분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머리 쓰는 군사들도 많이 있으니 도움이 되겠지. 어쨌든… 승패는 자 혈승에 달렸다. 말해보거라. 자 혈승을 상대할 계책을.”

“천마께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자 혈승을 천하제일 고수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천마는 기분 나빠 하지 않는 듯했고, 강한월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아는 고수 중 자 혈승과 겨뤄볼 수준에 오른 분은 단 세 분뿐이고요.”

“나와 신주의협이 포함되겠지.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가?”

“장백산 청송문의 장학송 문주이십니다. 진가린의 사부 되시지요.”

“청송문의 장 문주… 동방선도의 계승자이신가?”

“맞습니다.”

“좋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셋 중 누가 자 혈승과 겨뤄야 한다는 말인가?”

강한월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도 천마는 짓궂게 질문했다.

“외람되지만… 세 분이 힘을 합쳐 자 혈승을 상대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 정, 선의 최고수가 힘을 합쳐야 자 혈승을 상대할 수 있다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더욱 자 혈승과 겨뤄보고 싶어지는군. 물론 나 혼자서.”

강한월은 속으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천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개인의 호승심은 접어 둬야 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다고 천마의 생각이 바뀔 리는 없으니까.

“내가 빠진다면 신주의협과 장 문주라도 힘을 합치기를 기대할 테지? 하지만 그것도 헛된 기대일 거야.”

강한월의 눈빛은 어째서 그런 거냐고 물었지만 천마는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천마의 입을 억지로 열개할 방법은 없었다.

“강한월. 네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의 네 노력과 성과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지. 하지만… 일이 네 뜻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말이지.”

강한월 입장에선 매우 쓰린 예측이었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너 스스로의 힘을 키워라. 다른 고수들이 너를 대신해 싸워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마신강림이 나에게 허락한 영감으로 인해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이번 전쟁의 열쇠는 강한월 바로 너 자신이라는 말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믿던 안 믿던 그것은 너의 선택. 자, 내가 할 말은 모두 했으니 이제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이뤄야겠지?”

“제 목적이라 하심은…?”

“천마신교의 행군을 늦추려고 온 것이지 않느냐? 너는 부족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보름쯤이라면 행군을 늦출 수 있지. 천마가 비무 수련을 한다는 핑계로.”

강한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마가 비무를 한다면 누구랑 하겠는가? 바로 자신이지.

마신강림을 대성해 마의 종극에 다다른 천마가 비무를 하겠다는 것은 곧 자신을 지도해주겠다는 의미.

어쩌면 막혀 있는 벽을 넘을 수도 있는 기회인데다 겸사겸사 천마신교의 행군도 늦출 수 있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비록 몸 성히 끝나기는 힘들 테지만.

“호랑이의 팔 한 짝을 잘랐다고 들었다. 어떤 수법인지는 모르지만 실패한 것이지? 제대로 되었다면 팔이 아니라 목이나 심장을 갈랐을 테니.”

“맞습니다.”

“보름은 짧은 시간이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두세 번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시간. 너에게 마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천마가 장막을 나가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강한월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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