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마신강림과 심검 (3)
* * *
홀로 막사로 돌아온 강한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천마가 해준 평가가 워낙 중했기에 오늘 밤은 잠을 이루긴 애당초 그른 듯했다.
마신강림 상태에서 신안까지 발동해 살펴봐 준 것이기에 신뢰가 가면서도 매우 요긴한 정보.
첫째, 강한월의 신검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고 여기서 더 발전할 수는 없다는 것.
둘째, 원하는 위력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과 감정이 가진 한계 때문.
셋째,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강한월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평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천마가 괜히 천마가 아니고, 스승이 괜히 스승이 아닌 것.
때로는 의심하고 홀로 참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경우는 천마의 말을 듣지 않고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세 번째 화두.
강한월 자신에게만 있는 남들과 다른 무엇.
목표하는 위력의 심검을 발동시켜줄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강한월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하나하나 곱씹어봤다.
대부분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간혹 즐거운 기억도 떠올랐다.
문득 든 생각은 자신은 사부님이 준비해준 길로 걸었고 알려주신 대로만 살아왔다는 것.
스스로의 주관으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은 문무대의 대장이 된 후 불과 몇 년.
최근 몇 년은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의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중에도 납득이 안 가는 것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소림에서 중상을 당한 이후의 행동이었다.
왜 갑자기 심검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마불진경의 무공을 잃었지만 대신 역근경을 얻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련을 했더라도 문제는 없었을 텐데 왜 심검에 목을 매게 된 걸까?
사색에 잠겼던 강한월은 어느새 꿈을 꾸고 있었다.
기련산맥 봉우리에서 혈교와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꿈이었다.
수십 번도 더 꿨던 꿈이지만 오늘은 전보다 더 생생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폭음, 피, 죽음.
척혈단 단원들의 단말마, 광신도들의 처연하고도 단호한 눈빛.
꿈은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강한월은 오늘도 천마와 마주 섰다.
어제는 구타와 다름없는 비무가 없었던 덕에 얼굴이 꽤나 정상이었고 굽었던 팔도 곧게 펴져 있었다.
“잠을 편히 잔 모양이구나?”
“푹 잤습니다. 이렇게 편히 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지요.”
“축하할 일이군. 그럼 오늘은 좀 더 강하게 비무를 해도 되겠구나?”
“강한 비무요? 박투술을 겨루자는 말씀이십니까?”
강한월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는 억지로 심검을 쓰게 만들더니 고작 하루 만에 박투술로 돌아간다고?
“네 편안한 얼굴을 보니 좀 더 맞아도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속이 뒤집히는 말을 태연하게 뱉은 후 천마가 다짜고짜 공격을 시작했다.
공력을 잔뜩 끌어올리지도 않은 가벼운 공격이었지만, 정통으로 맞으면 그 순간 세상 하직 인사를 해야 할 수도 있는 주먹.
그야말로 잡생각을 잊게 해주는 공격이었기에 강한월 입장에선 외려 반가웠다.
콰앙, 쾅!
천지가 떠들썩한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평평했던 들판은 순식간에 없던 동산과 분지가 생겨나며 괴상한 지형으로 변해갔다.
하루를 쉬었기 때문일까?
전과는 다르게 강한월은 꽤나 잘 버텼다.
팔다리가 저릿저릿하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정타는 허용하지 않았고, 틈을 노려 몇 번의 반격도 가했다.
예전이 일방적인 구타였다면 오늘은 얼추 박투술 비무의 모양새가 나왔다.
“도대체 잠을 얼마나 잘 잔 거냐? 자면서 수련하는 수면공이라도 익힌 것이냐?”
천마가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강한월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강한월에겐 천마의 농담에 답을 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벼락처럼 날아오는 주먹을 흘려버리고 뒤돌려차기를 한번 날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사실 천마는 강한월이 어떻게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강한월 본인도 알고 있었고.
“명색이 천마와의 비무인데 이렇게 끝나면 재미가 없겠지?”
슬슬 마무리를 지을 생각인 듯 천마가 공력을 배가했다.
마신의 격을 소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세의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강렬한 마기가 뿜어져 나와 강한월의 몸에 달라붙었다.
이런.
역근경 공력을 폭발시켜 마기를 떨쳐내려 했지만 여의찮았다.
퍽, 퍽.
허벅지와 어깨에 연달아 공격을 허용한 강한월이 고통을 참으며 물러섰다.
“휴우. 이번 것은 꽤나 아프군요.”
“고통은 순간일 뿐.”
쾅, 콰앙, 퍼어엉!
천마는 단단히 작심을 한 것 같았다.
스치기만 해도 뼈가 아스러질 맹렬한 기운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이것이 과연 무림 역사상 최정상의 무공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천마신공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격식 없고 종잡을 수 없는 마구잡이식 손놀림이었다.
그야말로 박투.
그럼에도 어떤 현란하고 정교한 초식보다 더 강하고 심각하게 위험했다.
당하는 강한월 입장에서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상황.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쉬익, 콰앙, 쌔애애액!
험악한 공격이 이어졌고, 강한월을 몰골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차려입은 무복은 걸레쪽이나 다름없었고 아물었던 입술은 다시 터졌다.
칼날같이 휘몰아치는 마기 때문에 피부 곳곳이 갈라져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극악한 상황이라도 역시 적응이라는 게 가능한 것인지, 강한월의 몸짓이 조금씩 균형을 잡으며 간간이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천마로서도 가슴이 섬뜩할 수밖에 없는 공격도 있었는데….
“이놈!”
순간적으로 이계의 격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천마가 먹구름 같은 장력을 뿜었다.
콰아앙!
막는다고 막았지만 충분치 않았는지 강한월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갔다.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착지하는 순간 무릎이 꺾였고 쿨럭하고 피를 한 모금 토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된 것 같군.”
“감사합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강한월이 말했는데, 나름 진심이 묻어났다.
“도움이 되었는가?”
“머릿속이 깨끗해졌습니다.”
“좋군. 내일 계속하세.”
천마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강한월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천마는 대단했다.
단순히 무공이 고강한 것이 아니었고, 마신의 격이 덧씌우진 탓인지 보는 눈과 생각의 폭이 달랐다.
오랜만에 푹 잤다고 말했을 뿐인데, 강한월의 상태를 즉각 알아챈 것이다.
실은 어젯밤 사색이 꿈으로 이어진 후 그는 뭔가를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게 된 것은 아니고 알 듯 말 듯 한 상태.
위력적인 심검이 발출되기 위한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더 이상 심검에 대해 집착하거나 고민해봐야 아무런 득이 없다는 것도.
그러니 지금 강한월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었다.
천마는 맨주먹으로 강하게 몰아붙임으로써 딴생각이 안 들게 도움을 준 것이고.
“이것 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많이 아프군.”
강한월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즉각 역근경을 일으켜 요상을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오늘은 천마가 약속한 십오일의 마지막 날.
아쉬움의 표현인지 천마는 예전보다 더 험악하고 강렬하게 강한월을 압박했다.
콰앙, 콰콰쾅, 퍼엉!
샤악, 쐐애애액!
도저히 맨주먹으로 상대할 수준이 아니어서 강한월은 검을 들었다.
확실히 검을 손에 쥔 그는 적수공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마도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포탄이 수백 개는 떨어진 것처럼 험하게 변한 들판에서 강한월과 천마는 마음껏 힘을 겨뤘다.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지 오늘만큼은 유선의 참관이 허락되었는데, 멀찍이 서서 구경하던 유선이 천마의 눈짓을 받고 비무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강한월과 유선이 편을 먹고 천마를 공격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누구 편인지 구분이 안 되게 닥치는 대로 상대를 공격했다.
공방이 오갈 때마다 피가 튀었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강한월과 유선은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강한월은 물론 천마와 유선도 타고난 무골이요 천상 무인.
혈교니 전쟁이니 복잡한 상황은 잊고 이렇게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콰아아앙!
비무의 끝을 알리듯 천마는 강렬한 마기를 사방으로 터뜨렸다.
거센 마기와 흙먼지가 소용돌이쳐 강한월과 유선은 얼굴을 가렸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천마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약속된 십오일은 그렇게 끝났다.
“이제 천마신교의 행군이 재개되겠군.”
“그래. 천마께서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야. 전쟁에 목마른 마가 가주들이 며칠 전부터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거든.”
얼굴에 묻은 피와 먼지를 닦으며 유선이 말했다.
강한월로서는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제는 복잡한 현실로 복귀해야 할 시간.
“민 소저로부터 소식이 있었나?”
“흥, 이제서야 묻는군. 나는 또 비무에 맛 들여 척혈단의 일은 잊은 줄 알았지.”
유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척혈단 단장은 천마와 비무를 하고 천마의 제자인 자신은 척혈단과의 교신업무를 맡아야 했던 것이 꽤나 불만스러웠던 모양.
“사천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다는군. 거리가 먼 문파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가까운 문파들은 이미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고 해. 척혈단과 협력하는 문파들은 아미파로 집결하고 있고.”
“그렇다면 무림맹 호랑이 측 문파들은 청성파로 모이고 있겠군.”
“그래. 그리고 흑사련도 청성파 인근으로 모이고 있고. 천마신교를 상대한다는 핑계가 좋긴 좋은가 봐. 정파와 사파를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으니.”
“황실 소식은?”
“동창과 금의위가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사천으로 이동 중이라고 해. 정체불명이라 했지만 뻔하지 뭐. 뱀이 만들어 낸 괴인들이지.”
“군대가 움직이는 기미는 없고?”
“황군 소식은 없어.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지. 아마도 황태자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 테고.”
다행이었다.
만약 백만 황군이 사천으로 진격한다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테니까.
“그건 그렇고… 유선 너는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는 이제 천마를 모시고 움직여야지.”
“알았다. 그럼 사천에서 만나자.”
* * *
강한월이 천마신교의 군진을 떠난 그 날, 사천으로 이동 중인 척혈단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한 명이 아니고 둘이었는데, 먼저 찾아온 것은 나이 지긋한 어른.
“사부님!”
“하하하, 가린아. 잘 지냈느냐?”
물 찬 제비처럼 날아와 안기는 진가린을 토닥이며 장학송 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자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그는 위무진 맹주, 소요자 등과 인사를 나눴는데, 편안한 표정의 장학송과는 달리 척혈단의 원로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변방 시골에서 온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 노인이 수준을 짐작하기 불가할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
청송문의 장 문주라는 기인이 한 팔 거들 거라는 말은 민정화에게서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기대치 못했던 원로들로서는 매우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몇 시진 후, 제갈윤이 복귀하면서 또 다른 손님을 데려왔다.
장학송 문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 손님도 기도가 남달랐는데, 황태자 측의 소식을 들고 찾아온 장준검이었다.
“장 천호님, 어서 오세요. 황태자의 곁을 지켜야 할 장 천호께서 이렇게 직접 오신 것을 보니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모두 여러분이 지원해주신 덕이죠. 황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싶습니다. 해서… 황태자님께서 제가 이곳에 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고요. 여러분과 함께 최후의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이날 장학송 문주와 장준검 천호가 합류함으로써 척혈단의 전열도 완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