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사천 대립 (3)
* * *
청성파의 주요 도관과 건물들은 청성산 전산에 모여 있었고, 지형이 험해 접근이 어려운 후산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라 할 수 있었는데, 정파 무림과 연합을 결성한 흑사련의 무인들이 이곳 청성 후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위에서 결정했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정파의 자존심 강한 무인들은 사파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따라서 후산은 나무꾼이나 약초꾼도 발을 들이지 않는 금지가 되었다.
어두운 밤.
사파의 악인들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 왠지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후산으로 한 떼의 무인들이 진격했다.
검은 야행복에 복면을 쓴 대략 오십 명의 무인들.
한 명 한 명이 꽤나 고수인 듯 빠른 속도로 산길을 달리면서도 낙엽 밟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정지.”
맨 앞에서 달리던 복면인이 신호를 보내자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절벽 아래쪽 평지에 여러 개의 커다란 장막과 모옥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오늘의 목표. 흑사련의 보급기지인 것이다.
“경비 무사의 수는 삼십 명 정도이고 대부분 일류 수준입니다. 하지만 장막 안에도 고수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먼저 정찰을 나갔던 복면인이 다가와 수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에게 보고했다.
“물론 그럴 것이다. 흑사련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보급기지의 수비를 허술히 하진 않겠지.”
복면인들의 수장, 천궁의 좌호법 황우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목표를 살폈다.
바로 이곳을 타격하고 보급품을 불태우는 것이 궁주에게서 받은 임무였던 것이다.
보급품을 잃은 흑사련은 분명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의 정체를 오해하고 혼란에 빠지게 될 것.
즉, 교란을 일으켜 자중지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후후, 이런 작전은 우리 만검산장 외에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지. 아무렴.’
자존심과 자긍심이 고취되며 황우치가 복면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르치고 키워낸 만검산장의 수하들은 특별한 장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문파의 무공을 감쪽같이 흉내 내는 능력자들이었다.
무학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인 만큼 평생을 바쳐 강호의 유명 무공을 파고들어 그 특징과 장단점을 꿰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데려온 수하들은 각각 무당파, 화산파, 아미파, 점창파 무공을 연구한 자들이었다.
즉, 오늘의 이 습격이 척혈단에 붙은 문파들의 소행으로 오인되도록 하려는 것.
“모두 명심해라. 최대한 빨리 임무를 마치고 퇴각해야 한다. 시간이 지체되어 흑사련 본진의 지원군이 오면 낭패이니까.”
당부를 마친 좌호법이 검을 뽑았다.
뒤따라 검을 뽑은 오십 명의 복면인이 일제히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이익~ 쇄액~.
좌호법 황우치는 무당의 제운종과 거의 흡사하게 경공을 펼쳤고, 다른 복면인들도 각자 무당, 화산, 아미, 점창의 경공을 흉내 냈다.
“사파의 잡것들아! 정의의 칼을 받아라!”
급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흑사련의 경비 무사들을 향해 검기가 날아들었다.
무당파의 양의검이 태극을 그리는 사이로 화산의 매화가 피어났고, 아미파 복호검이 으르렁대며 일으킨 흙먼지를 점창의 관일검이 꿰뚫고 날았다.
“크억.”
습격은 효과가 있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흑사련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도 있겠다고 좌호법이 미소 짓는 순간, 장막 안에 있던 흑사련 고수들이 뛰어나왔다.
“무당? 화산?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무림맹과 흑사련은 연합을 맺었다는 걸 모르는 거요?”
“흥, 연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파의 악적들을 어떻게 믿고 연합을 맺는다는 말이냐!”
좌호법이 코웃음을 치며 답하자 잔뜩 열 받은 흑사련 고수들이 맹공을 가했다.
채앵, 콰아앙, 콰앙!
험악하고 맹렬한 싸움이 시작됐다.
인원수는 천궁 측이 두 배 많았고 개개인의 무공 수위도 높았지만 단시간에 싸움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타 문파의 무공을 흉내 내느라 최상의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무학의 깊이에 비해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
‘그래봐야 시간 문제.’
하지만 좌호법 황우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흑사련 무사들의 무공 수위는 이미 파악이 되었기 때문.
그리고 만검산장 수하들도 조금씩 몸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길어야 이 각이면 상황은 종료될 테니까.
* * *
하오문의 사천 분타인 청류 객잔.
민정화는 보통 척혈단 본부에 머물렀지만 가끔은 이곳을 방문했다.
하오문 정보원들의 정보를 빠르게 확인하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 위함.
민정화는 오늘도 청류 객잔을 찾았다.
강한월이 별동대를 이끌고 작전을 나간 날이라 자신도 열심히 뭔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별관 귀빈실에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정보지를 보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역시 마음이 심란할 때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사실 민정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별관 담벼락 밖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실제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아니고 기감을 펼쳐 안쪽의 광경을 느끼고 있는 것인데, 워낙 술법의 경지가 높다 보니 코앞에서 직접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 여인이구나. 척혈단의 꾀주머니.’
깔끔한 문사 차림의 잘생긴 중년 사내, 바로 양 혈승이었다.
자 혈승이 그에게 은밀히 지시한 것은 척혈단의 두뇌를 제거하라는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민정화를 언급한 것이다.
양 혈승은 이십 대의 젊은 여인을 죽이는 임무가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에서 상대의 군사를 없애는 것은 절정고수 백 명을 제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것.
흐음….
담 밖에서 잠시 고민하던 양 혈승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별관 안쪽에 스르륵 나타났다.
민정화 한 명 죽이는 것이야 밖에서 지풍 한 줄기 쏘아도 가능할 일이었지만 무언가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있어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저 기운은 음양혈인? 뱀의 작품이 분명한데 어째서 이곳에…?’
양 혈승의 눈길을 끈 것은 별관 문밖에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호위무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정화의 부친이 혈령을 잔뜩 주입한 후 민정화의 호위무사로 붙여준 바로 그 음양혈인이었다.
어쨌거나 양 혈승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휘익~.
그와 동시에 음양혈인도 움직였다.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도구로 만들어진 주제에 감히 내 앞을 막는 것이냐? 네 주인은 어디에 있지?”
뱀이 어디 있냐고 물은 것이지만, 말하는 사이 양 스스로가 혼란에 빠졌다.
음양혈인에게서 분명 다량의 혈령이 느껴지지만 뱀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누구의 혈령인지도 구분이 안 갔다.
“주인… 내가… 지킨… 다.”
음양혈인이 떠듬떠듬 말했다.
양 혈승은 더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음향혈인은 원래 말을 할 수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자는 말까지 하고 있으니.
“흥. 네놈이 건방을 떤 잘못은 네 주인을 찾아 따지겠다.”
이곳에 온 목적은 따로 있으니 음양혈인으로 인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단숨에 제압하고 민정화를 처리할 요량으로 양 혈승이 공격을 가했다.
휘이익!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속도로 음양혈인의 혈도를 노렸는데… 소, 말, 원숭이 세 혈승의 혈령이 주입된 음양혈인의 실력은 양 혈승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쐐애액~ 콰앙!
양 혈승 못지않은 속도로 공격을 피하더니 즉시 반격까지 가하는 것이었다.
“이놈!”
양 혈승은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한 양 혈승이 전력으로 뿜어내는 장력은 음양혈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콰아앙!
급히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장력을 막았지만, 음양혈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민정화의 방문은 음양혈인의 몸에 부딪혀 박살이 났고.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참 요란하게 방문하시네요.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될 것을.”
박살 난 문 안쪽에서 민정화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런 급작스러운 상황에 처한 것 치고는 무척이나 차분한 목소리였다.
“역시 보통 여인은 아니군. 도망치지 않는 것이냐?”
“불가능한 일에 힘을 쏟고 싶지는 않아서요. 이 호위무사… 웬만한 문파의 장문인보다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도 당신의 일 장을 못 막았으니, 제 실력에 무슨 도망을 치겠어요?”
대단히 합리적인 말이었지만, 또한 굉장히 비상식적인 말이기도 했다.
누가 그런 것 따져가며 도망친다는 말인가? 위협이나 공포를 느끼면 일단 도망치고 보는 것이 본성인 것을.
“역시… 척혈단의 군사는 남다른 면이 있군.”
“제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고 오셨군요? 그렇다면 본인이 누구인지도 밝히시는 게 예의에 맞지 않을까요?”
어차피 죽일 건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양 혈승은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내 이름을 말해준다고 네가 알겠느냐? 부질없는 일.”
“왜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죠?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데요?”
“흥, 어림없는 소리.”
“어림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시죠. 당신 같은 고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 어디 보자… 아! 그래요. 얼마 전 들었던 정보 중 당신과 부합하는 사람이 있어요. 생명교의 분타에 나타나 천마신교 대공자에게 부상을 입혔던 사람. 제가 틀렸나요?”
양 혈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 놀란 것이다.
천궁을 벗어나 단 한 번 활동했던 일이 그것인데, 그걸 곧바로 떠올리고 연결 짓다니.
“그래, 내가 한 일이 맞다. 하지만 그걸로 내 정체를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
“정체를 알 것 같다니까요.”
민정화는 이제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선 모험을 걸며 시간을 끄는 중이었다.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음양혈인이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 주기를 기대하면서. 양 혈승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증명되었지만, 그래도 지금 믿을 건 음양혈인밖에는 없으니까.
“양 혈승. 맞지요?”
자 혈승과 양 혈승 외에는 이제 모든 혈승들이 드러났고, 눈앞의 사내가 자 혈승일 것 같지는 않으니 남은 것은 양 혈승.
민정화에게는 어려운 추리가 아니었지만, 양 혈승 본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민정화의 실책이었다.
궁금증을 유발시켜 대화를 좀 더 길게 끌고자 한 것인데, 반대로 양 혈승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너무 말을 많이 했군. 이제 그만 죽어줘야겠다.”
뒷골목 건달이나 내뱉을 법한 뻔한 말이었지만 양 혈승의 입에서 나오니 공포스러웠다.
순간 살기가 확 퍼져 나오며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바닥에 누워있던 음양혈인이 심상치 않은 낌새를 차리고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무릎 한쪽 채 일으키기도 전, 강기가 맺힌 양 혈승의 주먹이 하얗게 빛났다.
저 주먹이 뻗어지면 민정화의 머리나 심장은 가루로 변하게 될 텐데….
“위에 계신 분… 누구시오?”
양 혈승은 주먹을 뻗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막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지붕 위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지독히도 위험한 기운이 팍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주먹을 내지르면 오히려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은 느낌.
명백한 경고였는데, 그 경고가 먹힐 만큼 상대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허허허, 이거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게 되는군요. 무명의 촌부라 이름을 말해줘도 모를 테지만… 나는 장학송이라고 하오.”
장학송 문주가 지붕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순간 천지원기가 숨 쉬듯 번지며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양 혈승의 살기를 밀어냈다.
이자가 청송문의 장학송 문주로구나.
양 혈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간을 돌을 뺏으려면 양 혈승 본인이 가야 한다는 옥룡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왜 옥룡이 그렇게 요청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