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사천 대립 (4)
* * *
양 혈승은 자신이 이룬 경지에 자부심이 있었다.
전생에서는 호랑이에게 무공 담당 혈승의 수좌 자리를 양보해야 했지만, 현생에서는 자 혈승을 곁에서 모시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자 혈승의 다음 자리는 바로 자신이니까, 마신강림을 완성한 천마와도 승부를 겨룰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자 혈승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생각한 것.
그런데… 이 촌티 나는 늙은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유명하지도 않고 거대문파 출신도 아닌데 참으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격이 다른 절세고수의 분위기를.
“장학송 문주. 나를 막을 생각이요?”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술이라도 나누며 무학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상대.
하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귀하가 무엇을 하려 하는가에 달렸지요.”
“나는 저 여인을 죽이려고 하오.”
“그건 절대 안 되겠소이다.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임무가 우리 군사를 보호하는 것이라….”
“그렇다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겠군.”
양 혈승이 유연한 보법을 밟으며 짓쳐들어왔고, 장학송 문주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주 다가섰다.
* * *
동창의 비밀 창고였던 건물은 순식간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뱀이 제조하고 키운 괴인들과 척혈단 별동대의 싸움은 그만큼 경천동지할 것이었다.
검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도가 벼락을 뿜어내는 대결.
검기는 명함을 내밀 수도 없었고, 검강과 검막이 애들 장난이나 된다는 듯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콰아앙!
지금까지의 전황은 척혈단에게 유리해 보였다.
동창의 무사들은 진가린에게 제압된 지 오래였고 불사신 같던 귀장들도 원로들과 광군영의 활약에 하나하나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 승패를 논하기에는 일렀는데, 다수의 음양혈인이 버티고 있기 때문.
“쳇,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음양혈인의 폭풍 같은 장력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위 맹주가 격한 놀람을 토했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소림이 봉문까지 하게 된 것이 바로 저들 때문입니다.”
원로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며 강한월이 검을 휘둘렀다.
방향은 음양혈인이 아닌 귀장을 향했다.
음양혈인을 제외한 나머지 괴인들을 먼저 처리해 장내를 정돈하는 것이 유리하겠다 판단했기 때문.
소요자, 수월사태 등이 애를 먹고 있었지만 명색이 최고의 원로들이니 금방 낭패를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휘익.
가볍게 휘두른 검이었고 그 흔한 검기도 맺히지 않았지만, 귀장 한 명의 목이 북풍을 맞은 낙엽이라도 되는 것처럼 뚝 떨어졌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자기 몸 간수에 바쁜 원로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한편에서 구경하고 있던 위청보만 탄성을 질렀는데….
“단장! 방금 그건 뭐였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검강이라도 뿜은 거예요?”
당연히 답변할 필요 없는 질문이었고, 그 순간 강한월의 검에 또 다른 귀장의 목이 날아갔다.
한 명 또 한 명….
강한월이 세 명의 귀장을 처리하는 동안 광군영이 한 명을, 그리고 남해의선과 진가린이 합심하여 마지막 한 명을 잡았다.
이제 뱀의 괴인들 중 두 발로 서있는 것은 음양혈인 여섯 명뿐.
휘이익~
차가운 밤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양측은 잠시 손을 멈추고 상대를 노려봤다.
“이것 참… 이렇게 많이 쓰러트렸는데도 상대의 전력은 줄어든 것 같지를 않으니….”
진가린의 투덜거림은 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남은 여섯의 음양혈인은 두려운 표정이 전혀 없었고, 실제로 척혈단이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
“소요자 어르신께서 한 명을 맡아주셔야 하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작전을 구상하던 강한월이 말했다.
“그건 걱정 말게. 하지만 나머지 다섯은…?”
“맹주님과 수월사태, 백응신장 선배님들이 한 명, 광군영과 위청보가 한 명… 나머지는 제가 맡겠습니다.”
깜짝 놀란 원로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보다는 이것이 가능한지가 더 중요했는데,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단장. 자네 제정신인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은데…?”
맹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광군영은 이미 후기지수라 할 수 없는 대단한 고수이고 위청보도 부적의 도움을 받는 시간 동안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그렇다고 여기 있는 원로들보다 더 강한 것은 아닌데….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강한월 혼자서 셋을 상대한다고?
“생각 없이 짠 계획은 아닐 테니 믿고 따릅시다. 정 걱정이 된다면 우리가 맡은 적을 빨리 제압하고 젊은이들을 도와주면 될 일.”
무슨 생각인지 소요자가 이렇게 나오니 다른 원로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음양혈인들이 잔뜩 공력을 끌어올리고 다가오기 시작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시간도 없었고.
“하압!”
기합 소리와 함께 먼저 몸을 날린 것은 광군영과 위청보.
얼음장 같은 냉기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음혈인을 향해서 광군영의 육합흑철마장이 쇄도했다.
콰아앙!
대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음혈인의 가슴에 적중되었지만, 음혈인은 잠시 주춤했을 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콰아앙!
또다시 울리는 폭음.
이번에는 천뢰마형권이었고 폭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 번째 공격을 날렸다.
그야말로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 연속 공격.
하지만 상대가 타격을 받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게 공력을 낭비하는 것에 불과한데?
물론 광군영에게는 생각, 아니 미리 준비한 작전이 있었다.
연속 공격을 펼쳐 적의 손발을 묶어 놓는 이유는 위청보가 부적을 쓸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화악~
중얼중얼 주문을 마치고 공중으로 띄운 부적에서 밝은 빛이 뿜어졌다.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부적이었는데, 지속시간은 촌각에 불과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순간적으로 음혈인의 몸에서 음기가 빨려 나왔고 반대로 양기가 충만해졌다.
보통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음혈인에게는 끔찍한 일.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순간 광군영의 마기가 끈적한 아교풀처럼 음혈인의 몸을 감싼 것. 그 때문에 몸 밖으로 빠져나간 음기를 다시 흡수할 수가 없었다.
쐐애액~
온 힘을 쥐어 짜낸 천마반월참의 둥근 마기가 음혈인의 목을 갈랐다.
음기가 빠져나간 음혈인의 몸은 더 이상 금강석 같은 단단함을 유지하지 못했고….
휙, 떼구르르르.
잘려 나간 음혈인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원로들의 우려가 무색하게, 광군영과 위청보는 가장 먼저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위 맹주, 수월사태, 백응신장이 양혈인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소림사 방장도 압도했던 음양혈인이지만 세 원로의 합공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위 맹주만 소림 방장과 실력이 비슷할 뿐, 수월사태와 백응신장은 소림 방장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
워낙 경륜이 넘치는 그들이기에 마치 동문 사형제나 되는 것처럼 손발도 척척 맞았다.
쐐애액, 콰아앙, 쾅!
적 하나를 상대로 셋이 나섰다는 민망함을 제외하면 탄성이 절로 터지는 멋진 공격.
결국 강철같이 단단한 양혈인의 몸에도 하나둘 생채기가 늘어났다.
이대로 십여 차례 더 공격을 가하면 꼼짝없이 무너질 상황.
그 순간 소요자는 음혈인 하나를 상대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운이 없는 건지 소요자가 맡은 상대는 다른 음양혈인들보다도 한 수 위.
특수한 초상능력을 보유한 자였는데 바로 속도였다.
안력을 돋구어도 움직임을 따라잡기 힘들었고, 귀를 찢는 파공성이 쉬지 않고 울렸지만 음혈인의 몸이 소리보다 먼저 당도했기에 소리로 듣고 대응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소요자는 당황하지 않고 잘 상대했는데… 후발선착, 능유제강, 면면부절 등 온갖 표현을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고절한 검을 휘둘러 음혈인의 속도를 무력화했다.
하기야. 소림 혈사 때 양혈인을 가지고 놀았던 송목대사 만은 못하지만 소요자도 무당파의 전전대 기인이니까.
소요자의 검이 그려내는 부드러움이 점차 태극을 이뤄갔고,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음혈인은 장기인 속도를 잃고 무너질 것이 뻔했다.
이제 남은 것은 강한월과 세 명의 음양혈인과의 대결.
당장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진가린과 장준검 그리고 남해의선의 눈은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가장 위태로운 싸움이 될 것이기에 걱정이 되었으니까.
“진 소저. 강 단장이 소림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걱정스런 목소리로 장준검이 물었다.
소림 혈사는 고작 일 년 전 일. 그사이 강한월이 대단한 발전을 이뤘다고 하더라도 음양혈인 셋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아닐 텐데….
“거의 죽을 뻔했지요. 그것도 음양혈인보다 한 수 아래인 혈질과의 싸움이었어요.”
“그렇다면 말려야 하는 것 아니오?”
안달이 난 장준검을 향해 진가린이 고개를 돌렸는데,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말린다고 말을 들을 사람인가요? 너무 걱정 마세요. 일 년 전 소림에서는 음양혈인보다 못했지만, 몇 달 전에는 호랑이를 꺾었으니까요.”
“그것이… 정말이요?”
진가린과 장준검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강한월과 음양혈인의 대결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
광군영은 벌써 상대의 목을 베었고 소요자와 원로들의 싸움도 슬슬 끝이 보일 때까지 이쪽은 시작도 못 했다.
일부러 시간을 끌거나 상대를 봐주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니, 실은 이미 치열한 싸움은 시작된 지 오래.
다만 육체의 움직임이 없어서 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또르르르.
음혈인 한 명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흐르다가 극한의 음기를 못 이기고 얼음으로 변했다.
감정이 제거된 음혈인이 긴장해서 땀을 흘린다는 자체가 놀랄 일.
사실 세 명의 음양혈인이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굳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 명의 혈인 중 한 명이 극도로 예리한 감각을 초상능력으로 보유하고 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죽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음양혈인끼리 통하는 공감력으로 다른 두 명의 혈인에게도 경고를 날리고 있는 중.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강한월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특별히 무엇을 한 것도 없는데 음양혈인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저러고 있으니까.
아마도 심검과 관련된 이유일 테지만, 그건 완성도 안 된 것인데?
어쨌든 강한월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원래는 초월경의 움직임으로 육탄전을 벌이며 역근경으로 타격을 가해 적을 제압할 생각이었고, 심검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소림 혈사 때 음양혈인들이 사념체를 뿜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순간이 온다면 재빨리 심검을 날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강한월이 결심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세 명의 음양혈인이 움찔했고, 동시에 둥그런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지켜보던 장준검과 남해의선의 입에서 경악이 터졌다.
강한월이 심검을 수련 중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강한월은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심 실망한 표정.
심검이 발출되고 음양혈인들이 움찔하는 순간 이미 안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했음을.
사실은 음양혈인이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 순간에 알았어야 했다.
심검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초감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가 미리 예감하고 경계를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심검이 아닌 것이다.
“하하하, 강 단장 정말 대단하군. 대단한 신위야. 완벽한 승리일세.”
상대하던 음양혈인을 막 제압한 위 맹주가 찬사를 보내며 강한월에게 다가왔다.
완벽한 승리가 맞았다.
조금의 피해도 없이 적들을 모두 제거했으니까.
“이상합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는데. 음양혈인들이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강한월도 승리가 기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응? 적들이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인가? 어째서…?”
“확실한 것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금제를 풀어서 혈령을 각성시킬 권한을 가진 뱀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