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사천 대립 (5)
* * *
좌호법 황우치의 돋보이는 활약 덕에 흑사련의 고수들은 속속 무너졌다.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은 고작 대여섯 명.
실은 좀 더 빨리 끝날 수도 있었지만, 만검산장의 고수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검술을 펼치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실전에서는 최대한 빠르고 간결한 초식을 펼치는 것이 상식인데 왜 화려한 초식을 펼치냐고?
수하들이 그런 겉멋 든 것 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어째서 황우치는 만류하지 않냐고?
왜냐하면 이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흑사련 시체들의 몸에 무당, 화산, 아미, 점창 무공의 흔적을 남기는 것.
분노한 흑사련이 척혈단에 붙은 문파들에게 복수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천마신교가 사천에 도착하기 전에 전쟁이 시작되도록.
“불에 타버리면 안 되니 장막 근처의 시체들을 공터로 옮겨라!”
마지막 흑사련 무사가 점창파의 사일검법을 흉내 낸 검에 심장이 꿰뚫려 쓰러지자 좌호법 황우치가 수하들에게 외쳤다.
이제 보급품이 들어있는 장막에 불을 지르고 자리를 뜨면 임무 완수.
화르르르.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막에서 연달아 불길이 치솟았다.
만검산장 무사 몇이 횃불을 들고 세 번째 장막으로 다가가 막 불을 붙이려 할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장막의 문이 안에서부터 젖혀지며 바람막이로 온몸을 감싼 몇몇이 걸어 나온 것이다.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있었구나!”
황우치는 적잖이 놀랐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바람막이 사내들은 고작 다섯. 위협이 될 리 없던 것이다.
“너희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아는가? 아니, 알 리가 없지.”
“무슨 일을 했냐고? 흥, 사파의 잡것들을 해치우는 협객행을 한 것이지.”
“역시 어리석은 것들이군. 자기 무덤을 판 줄도 모르고.”
“무덤? 어이가 없군. 형편없이 패한 주제에 무얼 믿고… 아니? 잠깐!”
바람막이 사내의 말을 받아주던 황우치가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이것들이 고의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끄는 이유는 뻔했다.
아마도 흑사련 본진의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일 터.
“흥, 시간을 끌겠다? 너희의 얄팍한 속셈에 속을 줄 아느냐? 얘들아. 어서 저것들을 처치하라!”
제법 눈치 있는 행동이었지만 황우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바람막이 사내가 떠들어댄 것은 시간을 끌려는 것이 맞았지만, 흑사련의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누가 구하러 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바람막이 사내들을 구해줄 힘은 이미 이곳에 있었다.
“고결한 희생으로 흘린 피. 혈제가 올려진 이곳에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한다! 형제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와 교의 적을 섬멸하라!”
맨 뒤에 서서 몰래 주문을 외우던 바람막이 사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황우치와 만검산장 무사들은 이건 또 무슨 웃기는 말인가 코웃음을 쳤지만, 숨 몇 번 쉴 시간도 지나지 않아 웃음기가 싹 가셨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 중 일부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사파의 잡것들이 사술을 쓴다. 이미 죽은 시체에 불과하니 겁먹을 것 없어!”
황우치의 독려에 용기를 얻은 무사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죽지 않는 놈들이라도 팔다리를 모조리 자르면 지들이 어쩔 건데라는 생각.
하지만 이것은 성전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저지른 큰 실책이었다.
샤악~
시체의 발 한쪽이 잘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시체의 붉게 충혈된 눈이 앞으로 돌출되며, 열병에라도 걸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퍼어엉!
시체가 폭발했다.
몸 안에서 부풀어 오른 핏방울들이 터져 나오는 폭기(爆氣)와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고, 방금 검을 휘둘렀던 만검산장 무사가 폭발에 휘말렸다.
퍼어엉! 퍼엉!
폭발은 여기저기서 동시에 일어났다.
놀란 황우치가 넓게 검막을 펼쳐 몇몇을 구했고 경지가 높은 자들은 경공으로 몸을 피하거나 호신강기를 펼쳐 폭발을 막았지만, 그렇지 못한 무사들이 더 많았다.
크아아악.
폭발음 이후에 들려온 것은 처절한 비명.
만검산장 무사들 중 절반이 폭발에 휘말렸는데, 상당수가 즉사했고 나머지도 전투 불능의 부상을 입었다.
“이… 이런 잔인무도한 놈들!”
분노로 눈이 뒤집힌 황우치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과연 만검산장의 장주이자 천궁의 호법은 고수 중의 고수.
아직 폭발 전의 시체들에게 빛줄기가 떨어졌고, 거의 동시에 시체들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네놈들… 너희는 곱게 죽여줄 수 없다!”
추가 폭발의 위험을 제거한 황우치가 바람막이 사내들을 향해 매섭게 외쳤다.
하지만 바람막이 사내들은 기죽은 표정이 아니었는데, 그들의 진짜 구원자는 따로 있었기 때문.
몰살을 당하면서까지 성전 선포를 미뤘던 진짜 이유가 이제 막 눈을 뜨고 있었다.
쿠오오오.
바람막이 사내들이 나온 바로 그 장막 안쪽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신경이 곤두서는 섬뜩함에 황우치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괴물이…?
장막 안쪽의 어둠으로부터 기괴한 울부짖음의 주인공이 걸어 나왔다.
황우치와 만검산장 무사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야수 같은 괴인이 튀어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등장한 것은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보기 드문 미녀.
습격이 시작된 후 바람막이 술법사들이 각성 의식을 행해,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난 흑사련의 비밀무기였다.
“갈! 모두 정신을 집중해 요녀의 사술에 대비하라!”
괴여인의 미모에 수하들이 정신을 못 차리자 황우치는 내공을 담은 호통을 내질렀다.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여인이 본능적으로 뿜어내는 염기가 순간 옅어졌다.
“대공녀님의 휴식을 방해한 죄를 청합니다. 피를 받치오니 적들을 물리쳐주십시오.”
바람막이 술법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본인들의 왼팔을 잘랐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
도대체 어떤 괴물이기에 같은 편의 피까지 흘려야 한다는 말인가?
잔인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황우치가 수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저 요녀는 내가 상대하겠다.”
황우치가 검에 묵직한 검강을 두르고 달려 나갔다.
교란작전이고 뭐 고는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았고 오로지 단숨에 이 기괴한 요녀를 요절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커억.”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쇄도했던 황우치의 몸이 일시에 정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괴여인에게 목을 붙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으니까.
“너는… 강한월의… 수하… 인가?”
여인의 입에서 탁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인은 다짜고짜 강한월을 언급한 것일까?
그리고 왜 바람막이 술법사들은 그녀를 ‘대공녀’라고 부른 것일까?
흑사련 내에서 ‘대공녀’라는 호칭을 쓰는 여인은 정옥수 한 명뿐.
정옥수는 강한월이 흑사련 비밀 기지를 습격했을 때 천뢰의 폭발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였는데… 천뢰가 폭발할 때 지하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맞지만, 아슬아슬하게 수조 속으로 몸을 던져 즉사는 면한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기적에 가까웠다.
내공이 바닥나고 출혈도 심해 수조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어야 했지만, 수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주교 비술의 영약이 정옥수의 몸을 치료했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술 영약은 오로지 비술 재료로 준비된 몸에만 반응을 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기적은 일어났고, 정옥수는 생명을 연장받는 대신 비술 괴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흑사련주 용 혈승은 돌연변이 괴인의 탄생이 황당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온갖 진귀한 재료를 퍼부어 정옥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최후의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특수한 관에 넣어두었는데, 이번에 흑사련 술법사들이 사천으로 가져온 것이다.
“말… 하라. 강한월은 어디… 에 있지?”
“크윽. 나는 강한월의 수하가 아니오.”
“거짓말. 그렇다면 왜… 우리를 공격한 것인가?”
비술로 제조된 괴인은 독자적인 사고능력 없이 오로지 명령에만 복종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옥수는 아직도 의지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강한월에 대한 복수의 일념뿐이라는 것.
“믿, 믿어주시오. 난 천궁의 호법이오. 신주의협의 수하라는 말이오.”
“신주… 의협? 흥, 강한월과… 한패가 맞군.”
뚝.
정옥수가 손에 힘을 주자 황우치의 목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만검산장의 장주로 수십 년간 쌓아온 명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손에 쥔 황우치의 시체를 휙 던져버린 정옥수가 만검산장의 무사들을 돌아봤다.
화들짝 놀란 무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정옥수가 더 빨랐다.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휙 사라진 그녀의 모습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죽어라 달리는 만검산장 무사들 앞에 나타났고, 이후 진득한 피의 향연이 펼쳐졌다.
* * *
양 혈승과 장학송 문주는 서 있는 위치도, 옷매무시도, 그리고 표정도 변한 것이 없었다.
누군가 지금 모습만 본다면 서로 아무 일 없이 멍하니 서 있는 것으로 알겠지만, 실은 둘은 이미 백여 초를 겨룬 상태였다.
워낙 상식을 벗어나는 고차원의 대결이고, 둘 다 파괴적인 성격은 아니기에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파이는 결과를 피했을 뿐.
“나이가 드니 금방 지쳐서 말이오.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가는 게 어떻겠소?”
장학송이 휴전을 제안했다.
지치고 팔다리가 쑤시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이 아님은 양 혈승도 알았다.
장학송 주변의 천지원기가 숨 쉬듯 들락거리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고, 천지원기를 마음대로 끌어다 쓰는 초인이 힘이 달릴 리가 없으니까.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만… 맡은 임무가 있어서 말이오.”
양 혈승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진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은 더더욱 없었으니 굳이 싸움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자 혈승의 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이것 참 난처하군. 당신의 임무는 민 소저를 해하는 것이고 내 임무는 그녀를 지키는 것이니.”
“내가 손해를 감수하고 그녀를 죽이려 한다면 당신이 막을 수 있겠소?”
양 혈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정화를 쏘아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
장학송으로서는 본인과 민정화 둘을 방어해야 하니 두 배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번 해보시구려.”
장학송이 태연하게 답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정말로 자신 있는 것인지는 양 혈승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자 혈승이 내린 임무이니 수행할 수밖에.
“잠깐만이요. 두 분 이렇게 다투실 필요가 없어요. 두 분 같은 초인의 대결을 보는 것은 평생에 없을 기회라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제가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도망을 치겠다는 말인가?”
“네. 맞아요.”
양 혈승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러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도망치는 자를 쫓는 것보다 쫓는 자를 방해하는 것이 훨씬 수월한 일.
장학송이 방해하는 이상 자신이 민정화를 쫓아가 죽일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게다가 쓰러졌던 음양혈인도 어느새 몸을 일으켜 민정화 앞을 단단히 지키고 섰으니….
“그럼 두 분 말씀 잘 나누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민정화가 예쁘게 인사를 마치자, 음양혈인이 한쪽 팔에 그녀를 안더니 지붕을 뚫고 사라졌다.
“허허… 이런….”
아쉬운 한숨을 내쉬는 양 혈승과 재밌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학송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