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삼혈승 출동 (1)
* * *
장학송과의 승부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린 양 혈승.
가뜩이나 불편했던 마음은 천궁 사천 본부에 도착한 후 더욱 무거워졌다.
좌호법이 이끌었던 습격조가 대부분 사망하고 불과 두어 명이 생환했다는 정보를 들은 것이다.
자 혈승이 직접 내린 명령이었고, 천궁 대외 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임무였는데 둘 다 실패한 것.
“자 혈승님.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자 혈승은 태연했다.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실패한 것을 알고도 태연할 수 있을까…?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양 혈승은 저간의 사정을 간략히 보고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는데, 장학송을 이길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온 것이 다이니까.
“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동방선도의 정통을 계승한 자를 이기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 무슨 이유로 세상에 나온 건지 모르지만, 수행에만 집중했다면 신선이 되었을 사람이니.”
“하지만 중요한 임무를 실패하여 자 혈승님의 계획을 망친 것은 사실이지요.”
“임무는 실패하지 않았고, 내 의도대로 되고 있다.”
양 혈승은 자 혈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 혈승의 성품을 생각하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빈말일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실패하지 않았다니요? 저는 물론이고 좌호법도 완패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오늘의 행동은 혼란을 일으켜 빠른 전쟁을 촉발하기 위한 것. 과정에는 변화가 있지만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자 혈승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 양 혈승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혼란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위해 수하들이 희생된다면 손해가 더 큰 것 아닌가?
“좌호법의 죽음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복수를 해줘야 한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천궁의 사기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아무런 조치가 없다면 천궁의… 특히나 만검산장 출신들의 불만이 생길 겁니다.”
자 혈승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 혈승을 빤히 바라봤다.
“네가 혹시 장학송에게 패해 죽었다면… 네 복수도 해줘야 한다는 말이냐?”
“무슨… 그런 말씀을….”
양 혈승은 당황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어쨌거나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후후. 이번 작전은 기대보다 성과가 좋군. 천궁 내부의 혼란도 유발하게 생겼으니.”
“자 혈승께서 계시는 한 천궁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글쎄… 너는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뭐 상관은 없겠지.”
자 혈승은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무언가를 툭 던졌다.
표지에 ‘혈경’이라고 쓰인 책자를.
“이… 이것은…!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익혀라. 동방선도의 선인이나 마신강림을 이룬 천마를 상대하려면 필요할 거다.”
* * *
청성산 정상의 암자.
천마신교에 대항하는 정사 연합의 수장들을 위한 장소였는데, 지금까지는 비어 있었다.
무림맹주와 흑사련주 모두 폐관수련을 이유로 사천에 당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이야기.
오늘부터는 더 이상 주인 없는 장소가 아니었다.
“청성산이 도교의 성지인 것이 이해가 가는군. 역시 천지의 기운이 남달라.”
봉우리에 우뚝 서서 산세를 감상하는 호랑이의 말이었는데, 이것이 뱀과 용의 신경을 자극했다.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 할 때인가?”
“흥, 도교의 성지는 개뿔. 제대로 된 고수 하나 배출하지 못하는데 무슨.”
황실과 흑사련의 사천 기지가 습격을 받았는데 무림맹만 아무 일 없이 멀쩡하니 뱀과 용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호랑이와 함께 폐관수련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호랑이와 무림맹이 수작질을 부린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상황.
“그렇게 빈정댈 필요 없어. 조만간 마교와의 싸움이 시작되면 불타고 파여서 망가질 곳. 그전에 마지막으로 감상한 것뿐이니까.”
그들이 왜 화가 나 있는지 잘 아는 호랑이는 풍경 감상을 중단하고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전생에서부터 동료였던 몸. 좋든 싫든 기분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뱀과 용의 기분을 맞춰줄 방법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피의 향연을 벌이는 것.
다만 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그 대상이 누구냐는 것일 뿐.
“각자의 수하들에게서 자세한 보고를 받았겠지? 말해보게. 피해는 얼마나 크고, 흉수는 누구인가?”
피해가 없었기에 정보도 부족한 호랑이가 물었고, 답은 뱀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음양혈인 여섯 구, 귀장 열두 구가 폐기되었어. 반면 쓸모없는 동창 놈들은 살려두었더군.”
“허허. 그 정도면 거대 문파 하나를 하룻밤 사이에 도륙할 수 있는 전력인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들이 쳐들어왔길래?”
“고작 열 명이었다더군.”
호랑이는 쓴웃음을 삼켰다.
진작에 아물어서 통증이 남았을 리 없지만, 팔의 잘려 나간 부분이 괜히 찌릿찌릿했다.
열 명이 쳐들어와 그 난리를 쳤다면… 묻지 않아도 누구 짓인지 뻔했으니까.
“강한월과 척혈단의 늙은이들.”
“맞아. 바로 그들이지. 잘근잘근 씹어 죽여도 성에 안 찰 놈들.”
“그럼 흑사련은…? 역시 척혈단에 당한 것인가?”
호랑이는 용을 돌아보고 물었는데, 답변하는 용의 표정은 뱀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한편으로는 재밌다는 표정.
“틀렸네. 척혈단도 아니고, 엄밀히 따지자면 당한 것도 아니야.”
“뭐가 어찌 된 일인데 그러나?”
“보고에 의하면 적은 무당, 화산, 아미, 점창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용은 자신이 직접 시체를 살펴본 결과를 이야기했다. 뚜렷한 각 문파의 무공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정교히 꾸며진 것임을.
그래서 적들의 시체까지 확인해 보았고 무당, 화산 등 출신이 아님은 더더욱 분명해졌다는 것을.
“그래서… 적이 누군지는 밝혀냈나?”
“알아냈지. 나름 유명한 자의 시체도 있었거든. 만검산장 장주 황우치.”
호랑이는 제법 놀랐다.
그 스스로도 알아주는 무공광이기에 과거 황우치와 몇 번 교류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황우치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능가하는 고수인데… 그가 죽었다고? 도대체 누구에게?”
“후후후. 딸아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한 괴물이 되어 있더군.”
용이 사정을 마저 설명했다.
정옥수가 무적의 신위를 발휘하여 적들을 쓸어버린 통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는 찝찝함이 남았는데… 황우치의 만검산장이 어째서 흑사련을 습격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숨은 속사정까지야 알 수 없지만,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군.”
“무당, 화산, 아미, 점창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그래. 우리와 그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려는 것이지.”
“흥. 이런 어설픈 속임수에 우리가 넘어갈 거라 기대했다는 건가?”
만만히 보였다는 생각에 호랑이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만 혈승 셋의 생각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피해를 본 뱀과 용은 분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설사 그 대상이 이간계에 의한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원하는 만큼의 피를 볼 수 있으면 그뿐.
“난 무당, 화산, 아미, 점창을 치는 것에 찬성이네.”
뱀의 말에 호랑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누군지도 모르는 적의 장난질이 뻔한데도?”
“상관없어. 이번 습격은 그들의 짓이 아니지만, 무당 등 네 개 문파가 척혈단 편에 붙은 건 확실하니까 이참에 정리를 좀 해주는 것도 좋겠지.”
“나도 찬성일세. 설마 호랑이 자네… 그 문파들이 무림맹 소속이라고 꺼려 하는 것은 아니겠지?”
뱀과 용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호랑이가 피식 웃었다.
그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네들 이제 보니 목적이 다른 데 있었군. 실은 폐관수련의 성과를 확인해 보고 싶은 거지?”
호랑이가 제대로 짚었다.
세 명의 혈승은 폐관수련을 통해 혈경을 익혔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과연 혈경의 가르침은 대단했던 것이다. 마치 인세의 무공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폐관을 끝내자마자 이곳 사천으로 달려온 탓에 새로운 무공을 시험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손이 근질근질할 수밖에.
“부인하지는 않겠네. 막 체득한 혈경의 무공을 안착시키려면 역시나 실전이 필요하거든.”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혈경을 익힌 후 시도 때도 없이 치솟는 피에 대한 갈망. 실은 이것이 더 큰 이유였다.
물론 그런 갈증을 느끼는 것은 호랑이도 마찬가지였고.
“좋아. 반대하지 않겠어. 하지만 무당, 화산, 아미, 점창을 모두 칠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전면전이 될 테니까. 자 혈승이 천마신교의 대군을 끌고 도착하기 전에 최후의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그럼 넷 중 어디를 치자는 말인가?”
“아미는 이곳 사천의 맹주이고 무당과 화산은 소요자와 위무진으로 척혈단과 연결되어 있지. 사태를 키우지 않고 혈경의 무공을 연습하기에는 점창이 적격이야.”
“고작 점창파 하나만 치자고?”
“왜? 무당이나 화산에 비해 급이 떨어져서 실망인가? 그럴 필요 없어. 점창은….”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이자 정파의 맹주이기에 호랑이는 무림맹 소속 문파의 사정에 정통했다.
점창파는 무림 문파이면서 운남의 군벌(軍閥)이기도 했기에 마치 군대와 같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번에도 타 문파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천 명의 무사들을 사천에 데리고 왔는데, 오백 명의 창기병도 포함된 것이다.
말을 타고 돌진하고 창을 휘두르며 거리낌 없이 활을 쏘는 점창파.
정통 무림 문파의 입장에선 인정하기 싫을 테지만, 격식을 갖춘 일 대 일의 대결이 아닌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소림이나 무당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점창파였다.
“그렇다는 말이지? 나쁘지 않군. 좋아, 점창으로 정하지. 언제 출발하는 게 좋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하지만 오늘은 청성의 풍광을 좀 더 즐기자고. 후후후.”
* * *
천궁과 청성산에서 지난 습격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을 때, 아미산에서도 같은 주제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 척혈단의 회의는 분위기가 매우 밝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척혈단과 원로들은 조금의 피해도 없이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단주가 괴인들의 목을 싹둑 베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강한월 단주가 괜히 단주가 아니지요. 솔직히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광군영과 위청보 이 젊은이들이 음양혈인을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논 것 아닙니까? 허허허.”
괴인들을 상대로 한 완벽한 승리는 원로들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했다.
전쟁을 앞두고 자만심이 드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강한월도 그리고 민정화와 제갈윤도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지금은 괴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더 중요하니까.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날 저희 말고도 적들을 습격한 곳이 또 있었어요. 하오문 정보원들에 따르면 일단의 정체불명 조직이 흑사련의 보급 기지를 습격하여….”
민정화의 보고를 들은 원로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뻐할 만한 정보이긴 하지만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요? 혹시 천마가…?”
“아직 사천에 당도하지 않은 천마신교일 리는 없지요. 저와 제갈윤 소협의 생각으로는 천궁이 나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 신주의협께서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신 거요?”